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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57)화 (5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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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여우에게 속셈을 들키면

“예……. 아주, 잘, 아는, 분입니다아…….”

“아, 그러시군요. 신고받았을 때엔 미성년자 성추행 미수…… 혐의, 상습적으로 유일한 씨의 명품 시계와 명품 의류를 절도했다고 하던데요. 성추행 건은 현장에서 사실무근이라는 증언이 있었고, 절도 건은…… 사실입니까? 혹시, 이분 성함과 신분을 증명할…….”

“최강, 2XXX년 9월 18일생, 제 페어입니다.”

일한은 자신의 신분 인증 창을 띄워 담당 경찰관 앞에 내밀었다.

“페어? 이능력자입니까? 어느 부대, 어디 소속이십니까? 관련 군부대로 사건 이전해 드릴까요?”

강이 책상에 수갑 찬 두 손을 툭, 올리고 담당 경찰관을 쏘아보았다.

“뭣 하러. 그냥 이대로 감방에 집어넣어.”

일한은 강의 입을 틀어막고 생긋 웃었다.

“예. 그리 수고해 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담당 경찰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진 신고된 건을 마무리 지었다. 사실 출동했을 때부터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기에 누가 올 때까지 강을 지키고 있는 게 다였다.

남들보다 빠르게 경찰서에서 강을 데리고 나온 일한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강아……. 혹시, 이 일로 내 근신이 3주에서 6주까지 가는 거냐?”

“모르지.”

“하아……. 최강, 우리 그냥 지금 페어 계약 해지할래?”

“그러든가.”

저게 말이야 똥이야. 일한은 잔뜩 눈에 힘을 주고 강을 노려보았다. 이 밤에 사고 친 놈을 풀어 주러 먼 곳에서 운전까지 해서 왔는데! 강은 고맙다기보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투로 제 손목을 내밀었다.

“이거 좀 풀어 봐.”

파장 제어 장치였다. 저번에 강이 망가트린 것보다 더 튼튼해 보이는 신모델이었다. 일한은 씩씩거리며 강의 손을 쳐 냈다.

“네가 풀어! 뭘 못 푸는 척해?”

“이것도 부서트리면 다음엔 약물을 쓰니까 그렇지.”

“씨, 됐다……. 일단 가면서 얘기 좀 하자.”

일한은 차 키를 삑 눌렀다. 경찰서 앞에 세워진 새빨간 스포츠카가 눈을 번뜩이며 양 날개를 쓱 열었다. 못 보던 새 차를 본 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일한을 흘겨보았다.

“유일한, 또 차 바꿨냐?”

“아니, 박 소령 차.”

“음?”

“박 소령이 나리 중사한테 새 차 뽑았다고 자랑하길래 내가 좀 시승해 봐도 되냐고 하고 여기로 튀었지.”

“또라이 자식.”

“너도 만만치 않아.”

“그럼, 이나리랑 박주환 둘이 있어? 그냥 순간 이동 하지……. 아, 이거 때문에 내 어빌리티는 못 쓰겠군.”

강은 셔츠 단추를 풀고 걸리적거리고 무거운 목걸이를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한은 차 키를 빙그르르 손가락에 걸어 돌리면서 씩 웃었다.

“내가 그렇게 허술한 놈이야? 둘을 같이 두고 오게?”

“……?”

❖ ❖ ❖

빵! 빵빵.

나리는 고개를 기울이고 본관 앞에 세워진 빨간색 스포츠카를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앉은 주환을 발견한 나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 박 소령님?”

창문을 내린 주환이 씩 웃더니 옆자리에 앉으라며 턱짓했다. 갑자기 나타난 반짝반짝하고 매끈한 신차를 본 나리는 입이 벙하니 벌어졌다.

설마.

“저는 바이크 잘 타시길래 새로 하나 뽑아 보라고 농담한 건데……. 신차를 언제 뽑으신 겁니까? 외, 외제 차는 요즘 주문하면 석 달 걸린다고 들었는데.”

부러움 반, 놀라움 반, 주환의 큼직한 씀씀이에 충격을 받은 나리는 멍한 목소리로 주환의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새로 뽑은 지는 꽤 지났습니다. 부함장으로 진급하면서 뽑은 건데 갑자기 이능력이 발현되고 이런저런 일들로 경황이 없어서 본가에 세워 두고만 있었죠. 이 중사에게 매번 바이크를 빌리기도 뭐해서 여기로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아, 아…….”

나리는 초롱초롱하게 눈망울을 굴리다가 차체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떼었다.

주환의 말에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그냥 무뚝뚝한 엘리트 소령님이신 것 같았는데 어딘가 사람이 달라 보였다.

이능력자도 아니고 일반인이 고속으로 진급하기 어려운 현실인데, 그가 부함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게 단지 철저한 군인 정신과 유능함 때문이었을까.

헌혈하다가 가이드로 발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도 그렇고…….

나리가 가만히 서 있자 주환이 물었다.

“안 타실 겁니까?”

“어디 가실 겁니까?”

나리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주환이 나리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작게 웃었다.

차는 숙실이나 의무실, 뭐…… 부대 내 어디든 불쑥불쑥 나타나는 방해꾼들 때문에 생각해 낸 차선책이었다.

옆에 나리를 태우고 가이딩이나 제대로 해 보려고 했는데, 가이딩도 가이딩이지만 데이트부터 생각했어야 했나 보다.

“이 중사, 가고 싶은 데 있습니까?”

“예? 가고 싶은 곳요?”

없는데…….

“예. 제가 경황이 없어 같이 기분 내고 저녁 먹을 수 있는 곳까지는 못 알아봤습니다.”

훈련이 끝나니 마냥 피곤하고 허기졌다. 석식 메뉴가 제육볶음인지 부대 내에 진동하는 매콤달콤한 고기 냄새에 사로잡혀 다른 곳이 불쑥 생각날 리가 없었다.

꼬르륵.

주환의 귀에도 선명히 들릴 만한 꼬르륵 소리에 나리는 멋쩍게 코밑을 쓱쓱 쓸었다.

“가고 싶은 곳은 딱히…… 없지 말입니다. 오늘 석식 메뉴도 맛있는 거 같고…….”

“타십쇼. 배고프지 않습니까. 식당까지 빨리 가죠.”

“…….”

살랑살랑 부는 바람 속에 주환의 가이딩이 실려 와 나리를 간지럽혔다. 그냥 덥석 그의 옆자리에 앉기에는 주환의 가이딩이 짙고 달았다.

저 좁은 거리에서 밀폐된 공간에 가득한 가이딩을 맡게 되면…….

꿀꺽.

나리는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키며 입 안을 혀로 훑었다. 허기 때문에 더 혹했다.

조수석이 있는 곳까지 발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속은 고픈 건지 체한 건지 쿡쿡 쑤셨다. 조수석 문고리를 누른 채로 나리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그게 걸린 것 같다.

〈그럼, 계속해.〉

말도 안 되는 신경질을 부리던 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리의 목깃을 잡아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는 “됐어.” 하고 단념한 듯이 차갑게 돌아서는 그 변덕쟁이가, 가이딩은 안 받고 폭주할 생각을 하는 무서운 미친놈이 명치 이쯤에 걸려서…….

“……이 중사?”

주환이 팔을 뻗어 창을 똑똑 두드렸다. 나리는 상념 속에서 퍼뜩 고개를 들고 애써 미소 지었다.

“박 소령님.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

본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주환은 걱정스럽게 나리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한 번만 운전하고 싶습니다.”

주환은 새 차를 보고도 기분이 가라앉은 나리의 반응에 본관 건물을 슬쩍 돌아보았다. 자신이 차를 받으러 간 그 10분 사이에 누굴 만났기에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볼일이 있다고 하더니,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나리는 쓰으읍, 숨을 크게 들이켜고 후, 내쉬면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좀…….”

아. 강을 만났구나.

주환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리가 괜찮은 척하게 하는 사람, 한숨 쉬게 만드는 사람이 저 본관에 누가 있겠는가.

주환은 착잡하게 시선을 모로 떨어트렸다. 며칠 전 그때,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라도 강에게 허락을 받고 더 이상 나리에게 신경 끄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

“박 소령님 차가 너무 부러워서요. 한번 타 보고 싶었던 차종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박 소령님 잡고 애걸복걸하기 전에 제가 먼저 타 보고 싶어서……. 어, 부, 불편하시면 안 된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리는 주환이 불편해할까 봐 두 손을 내저으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주환이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나리는 눈썹을 세모로 만들고 고개를 살짝 떨어트렸다. 입꼬리를 살짝 내린 앙다문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지며 오물거렸다.

“여기서 저기까지만…… 아니, 제가 주차장에 잘 세워 드릴게요.”

주환은 바이크를 타면서 신나게 웃던 나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자신이 운전하는 거나 나리가 운전하는 거나 그게 그거지, 뭐. 주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좋습니다. 이 중사가 한번 운전해 보십쇼.”

“예? 저, 정말요?”

나리는 깜짝 놀랐다. 주환이 선뜻 자신에게 새로 뽑은 신차를 운전하라고 비켜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주환은 운전석 문을 잡고 멀뚱하게 서 있는 나리에게 손짓했다.

별거 아니었다.

아니, 나리 기를 살려 주려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저도 배고픕니다. 우리 일단 배부터 채우고 난 다음에 기분 풀러 드라이빙이나 갑시다.”

나리는 활짝 입꼬리를 당기더니 한달음에 다가가 주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전 정말 너무너무 잘생기고 멋있는 페어를 만난 것 같아요!”

그걸 알면서도 왜 꾸물거리며 진도를 못 나가는 거냐고.

주환은 속으로 바득바득 강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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