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기꺼이 자수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황에덴 생도님을 챙겨 드려야지요. 우리 강이랑 꼭 맞는 SS급 가이드를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우리 훌륭하신 대통령님의 막내따님이라니 너무 잘됐지 뭡니까. 정말 이런 인연이 또 있겠어요?”
혜정은 활짝 웃으며 에덴의 손을 맞잡았다.
“많이 까칠하고, 살갑게 굴지는 않는 놈이지만,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내가 별거 아니지만, 생도님 입으라고 뭐 좀 사 왔는데…….”
혜정은 자리 밑에 놓인 커다란 쇼핑백을 꺼내 에덴에게 내밀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스타일 좋아한다고 했는데…… 맘에 들지 않으면 말해요. 나랑 같이 가서 바꾸면 되니까.”
“와……! 지금 열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나중에 데이트 갈 때 입어요.”
강은 입 안을 질끈 깨물고 혜정의 다리를 툭 찼다. 혜정은 우아하게 눈웃음을 치며 신나게 포장을 푸는 에덴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왜, 아들?]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합니까? 저 꼬맹이와 페어 할 생각 전혀 없는데. 뭣 하러 저런 걸 사 와요?]
[잘 보여야 하잖니. 상견례 자린데.]
혜정은 강을 돌아보면서 살포시 웃었다. 강은 허, 하고 혀를 찼다.
[상견례? 미쳤어? 쟤 아직 16살인데 무슨 상견례야. 말이 되는 소릴…….]
[2년은 금방 지나가. 그리고 나도 너 낳았을 때 열여덟이었어. 네 생각만큼 어린 나이 아니다? 나 18살에 혼자 너 낳고 모델 일 하면서 공부하고 젖병 삶고 기저귀 갈고 다 했어.]
또, 그 얘기…….
[그래. 어머니 고생한 이야기 다 알아. 그래서 효도하잖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서로 얼굴 본 게 3년 전인데 그게 효도니? 넌 나같이 살지 말고 훌륭한 집안에 예쁘고 젊은 애랑 알콩달콩 살아. 그게 효도야.]
강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주먹 쥐었다.
그는 SS급 에스퍼로 발현하고 싶어서 발현한 게 아니었다. 강력한 힘을 다루는 법을 채 알기도 전에 강은 철저히 이용당하고 통제되었다.
혜정은 어려운 살림에 홀로 아등바등 키우던 아이를 연구소에 보내고 막대한 돈을 받았다. 이게 아이에게 더 나은 선택이라 여기면서 제발 집으로 보내 달라는 아이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전보다 깨끗하고 안전한 동네, 전보다 더 넓고 높은 집, 좋은 차. 그녀의 스케줄은 전보다 많아지고, 모델 경력 13년 차가 되어서야 좋은 에이전시와 매니저까지 생겼다.
홀로 살기에 넓은 방에는 아들인 강의 물건보다도 그녀의 귀한 컬렉션으로 가득했다.
다 한통속이었다.
짜인 판 위에서 강의 편은 없었다.
X발, 개 같다. 강은 자신의 목에 채워진 제어 장치를, 아니 개 목걸이를 쓸었다.
현균은 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에덴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황에덴, 고맙다고 해야지.”
쇼핑백 안의 옷과 신발을 보느라 상기되어 있던 에덴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드레스랑 구두까지, 너무, 너무, 예뻐요.”
“아, 정말? 맘에 들어요? 우리 매니저가 목걸이랑 귀걸이도 넣었다고 했는데? 아, 그 밑에 있는 상자 열어 봐요.”
저렇게 큰 선물, 친아들인 자신은 생일에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강은 전식으로 나온 죽을 치우고,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C11 작전과 C12 처리에 대한 간단한 얘기라도 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일한에게 귀띔을 들었어도 설마 했었다.
“혹시 강이 쌀쌀맞더라도 원래 그런 애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아요. 겉은 그래도 속은 깊고 정이 많으니까.”
“제가 언제 속이 깊고 정이 많았습니까?”
“얘는. 유일한 소령과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아직까지 잘 지내잖니?”
누구한테 들은 건지 몰라도 자신은 혜정에게 일한에 대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0년 넘게 페어를 유지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유일한 소령도 그렇고 최 대령도 그렇고 앞으로 더 큰 일을 하려면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감합니다. 에스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아서 20대 중후반이면 다들 자리 잡는다고 들었는데, 그에 비해 우리 최 대령은 늦었죠.”
이 어색한 맞선 자리에서 신이 난 것은 에덴과 혜정, 그리고 현균뿐이었다.
“전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강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페어를 새로 만날 생각도 없습니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현균과 에덴을 대하던 혜정이 놀라 강을 쳐다보았다.
“얘! 너 설마, 유 소령이랑 진짜…….”
“저 게이 아닙니다.”
“어? 그, 그래. 아, 아니지? 난 여태……. 흠!”
강이 날카롭게 쏘아보자 혜정은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통령 각하의 막내딸이 성인이 되자마자 나이 많은 에스퍼와 페어 계약에 결혼까지 한다? 전 사람들에게 더 심한 뭇매를 맞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뭇매라니. 감히 누가 최 대령한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강은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현균의 얼굴에 대고 억울했던 지난 시간을 갚아 주고 싶었다.
평범한 남녀 페어들도 루머가 도는데, 훤칠하게 잘생긴 SS급에 연예인보다도 더 연예인처럼 곱상하게 생긴 S급을 붙여 놓으면, 당연히 망상과 상상력이 가미된 말들이 돌기 마련이었다.
그저 말뿐이었을까? 승전 기사가 날 때마다 환상의 SS+S급 게이 페어네, 쟤네들 궁합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린 강이었다.
악성 댓글과 루머 유포자들이야 잡아서 처리하면 된다지만, 강을 더 미치게 하는 건 기억을 잃은 나리가 그 악성 루머를 사실이라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아……. 상식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들도 다 하는 말입니다.”
“쯧쯧. 내가 더 신경 쓰겠네.”
“저보다 더 뛰어나고 잠재력 있는 후배들 많습니다. 황에덴 생도는 그중에서 테스트받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네 같은 인재는 없지. 팍팍하게 굴지 말고 선배로서 에덴 좀 잘 가르쳐 주시게나.”
강은 현균의 회유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봐달라’, ‘가르쳐 달라’ 하는 작은 부탁은 이미 현균의 큰 계획 속에 놓인 일부분이었으니까.
“남들 신경 쓰고 고집부리다가 후회하지 마렴. SS급 가이드는 우리나라에 1명이라며.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너랑 파장이 맞는다는데, 뭘 따질 게 있니? 얘는 참 약지 못하다니까?”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통령님. 그리고 황에덴 생도.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제가 최 대령을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약혼식 장소는 프라이빗한 여기 이곳도 괜찮을 거 같네요. 기자 몇 명만 부르고, 단출하게.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어머니!”
참다 못한 강이 소리쳤다. 혜정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며 살포시 웃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좀 조급하게 굴었나요? 원래 결혼 절차는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오래 걸린다고 들어서, 그만…….”
“아닙니다. 부인. 괜찮습니다. 오늘부터 차차 얘기해 봅시다.”
현균은 얼굴을 굳힌 채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는 강을 쳐다보았다.
“3개월.”
강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 안으로 최 대령이 확실한 답을 줄 겁니다.”
현균의 눈빛이 그윽하게 짙어졌다. 강은 한번 눈을 깜박이고는 현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확실한 답은 지금도 드릴 수 있습니다.”
강은 워치가 아닌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이 길게 나지도 않고 바로 연결되었다.
- 신서울 경찰서 콜센터 000 경위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자수하려고 하는데, 지금 제가 있는 곳으로 경찰관 좀 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 예? 자, 자수……?
“미성년자 성추행 미수입니다.”
- 이 정신 나간 쓰레기 새끼야! 너 딱 거기 있어! 미수는 무슨 미수야!
강은 귀에서 단말기를 떨어트리고 뚱하게 현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경찰 아저씨, 살려 주세요…….” 하는 게 아닌가.
- 야, 이 XX 새끼야! 지금 장난 전화 치냐! 바로 벌금 먹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상습 절도 혐의도 있습니다. 이번엔…… 뭐더라.”
강이 소매를 걷고 일한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게 롤렉스 코스모그래프라고 했던가? 정장 한 벌도 훔쳤긴 한데……. C1 군부대에 있는 유일한 씨에게 아직 신고 안 들어왔습니까?”
- 이 미친 XX야, 경찰관이 네 XXX 해 주는 데인 줄 알아?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운치 있는 가야금 소리가 흐르는 고풍적인 한옥 안채에 경찰관의 상욕이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아.
강은 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분명 자신을 욕하는 소리인데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혜정은 강의 손에 있던 단말기를 홱 낚아채고 통화를 종료했다.
“너 제정신이니?”
“저 제정신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강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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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은 퀭한 모습으로 경찰서 안에 앉아 있는 강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경찰서에 앉아 있는 것과 달리, 강은 잘빠진 명품 정장에 한쪽 다리를 꼬고 수갑을 찬 채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야…….”
일한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억누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접수대에서부터 일한을 데리고 온 경장은 강을 취조하고 있던 과장에게 “유일한 씨 왔습니다.” 한마디만 일러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유일한 씨? 이 사람 아는 분입니까? 뭘 물어도 묵묵부답에 신분증도 안 주고. 연락받아서 알겠지만 저도 살다 살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쪽팔려.
모르는 사람 하고 싶다.
일한은 어금니를 질끈 물고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