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재워 드리겠습니다
띵.
[박주환 부함장.]
띵.
[페어와 연애하니 좋은가?]
띵.
[우리 부함장은 보고서도 잊고 페어와 진한 시간을 보내고 있나 보네.]
띵.
[부함장이라도 예쁜 페어랑 잘되는 거 같으니 좋군. 하루빨리 배로 돌아오길 바라.]
“…….”
주환은 반쯤 감긴 눈으로 메시지 창을 한 번, 그리고 현재 시각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함장님, 안 주무십니까? 지금 새벽 1시 52분입니다.]
띵.
[아아,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네. 부함장. 보고서는 C12 건까지 합쳐서 내일까지 보고 바라.]
그것은 곧, ‘네가 이 야심한 밤에 좋은 시간을 보내든 말든 어서 일해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주환은 쓱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침대 위에서 진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페어는 없고, 남의 가이드가 곱게 누워 자고 있었다.
주환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다 삼겹살 때문이다.
내가 왜 그 삼겹살을 먹어서는…….
주환이 나리를 부축해서 숙실로 돌아왔을 때, 일한은 숙실 안에 연기가 자욱하도록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삼겹살과 더불어 각종 쌈 채소와 파 무침, 된장찌개의 화려한 한 상 차림을 그 누가 뿌리칠 수 있을까.
게다가 3주 근신에 감봉까지 받았다며 축하주인지 위로주인지 모를 술까지 기울였더란다.
[죄송합니다. 지금 작성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주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주방의 불빛이 다 닫히지 못한 문틈 사이로 새어 주환의 방에 긴 사선을 그었다.
“…….”
일한은 조용히 눈을 떴다. 숨소리까지 죽이며 다가가 문틈 사이로 주환을 엿보았다.
설마 나리의 방으로 몰래 가는 건가 싶었는데, 물 한 잔 마시고 허공에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누군가에게 보낼 문서를 작성 중인 듯했다.
일한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워치를 켰다. 파랗게 빛나는 워치를 손으로 가린 채 네트워크에 접속된 주환의 신호에 해킹을 시도했다.
가이딩 리포트
작성자 : 박주환 (#9983AA055)
대상자 : 이나리 (#4201A001)
기록 일자 : XX년 XX 월 XX일.
#4201A001 일일 ESP 파장 수치
- 그래프 1 -
#4201A001 주간 ESP 파장 수치
- 그래프 2 -
사용 어빌리티 분석
.
.
비고 :
XX일 14분간, 유일한 소령(#8314S005)의 밀접 접촉 가이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
일한은 주환이 적어 내려가는 마지막 비고란을 보고 정색했다. 14분이라니. 35분이었다.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주환은 가이딩 기록을 마무리한 뒤, C12 구역에서 사용했던 나리의 어빌리티, 파장 변화와 현장 상황 등을 써 내려가다가 에덴과 강의 부분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분명 황에덴……이 맞는데, 가이드 등록 번호가 왜 안 뜨지?”
주환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국내에 등록된 가이드들의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으으, 안 돼. 유일한.
오지랖 떨지 마. 착해지면 안 돼!
주환의 헛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일한은 답답한 마음에 참견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능력자 중에서도 능력에 따라 국가에서 숨기는 경우가 있었다.
특별한 가이딩 능력을 가졌거나, 정신계통 에스퍼는 비공개 요원으로 암암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시스템에 없었다.
황에덴이 SS급 가이드로 공개될 시 테러 세력이나 외국 군대의 타깃이 될 게 뻔했다. 강을 통제하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로도 국제법 위반이었다.
정부는 그런 위험천만한 가이드를 강에게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주환은 그 모든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특이 발현자가 갑자기 다수 발생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걸까.
황현균 대통령에게 지시받은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은 또 무엇일까. 그가 주환에게 자신과 같은 지시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일한은 잠자코 주환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끼이.
굳게 닫은 나리의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
“박 소령님, 이 시간에 뭐 하십니까?”
“미처 가이딩 보고서를 못 올려서 작성 중이었습니다.”
주환은 보고서 작성 창을 끄고 나리에게 다가갔다.
“저 때문에 잠이 깼습니까?”
“아닙니다. 눈을 가려 놓으니 귀가 더 예민해져서……. 못 자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럼 재워 드리겠습니다.”
“괘, 괜찮습니다! 일하셔야 하잖아요. 수면제만 먹으면 될 거 같아 나왔습니다.”
나리는 손사래를 치더니 벽을 잡고 주방 쪽으로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주환이 나리의 손을 잡았다.
“이쪽입니다.”
그러고는 주방이 아닌 나리의 방 쪽으로 안내했다. 나리가 아무리 앞이 안 보인다고 해도 자신이 나왔던 방향과 가려고 했던 방향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박 소령님……!”
나리는 엉덩이를 쭉 뺀 채로 주환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어머, 이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는데!
지금 이 주변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주환은 나리를 침대에 앉히고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중사.”
“네.”
“나한테 메시지나 말로 부탁해도 됐을 일인데, 굳이 나와서 수면제 핑계 댈 게 뭡니까. 페어한테 가이딩해 달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제가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멍청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짜! 물 한 잔과 수면제면 됩니다.”
“변명은 됐고.”
주환은 나리 옆에 앉더니 제 무릎 위에 나리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주무십시오.”
주환은 나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은은한 가이딩이 흘러나오며 나리의 귀를 덮었다.
나리는 콩닥거리는 가슴 위에서 두 손을 꼭 맞잡고 눈을 끔벅였다. 안대 속 퉁퉁 부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러다가 이 손길에 길들여지겠어. 아니, 벌써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한은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나리가 말한 대로 물병과 약통을 챙겼지만, 나리의 방 앞에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반사되는 윤슬처럼 주환의 가이딩을 따라 흐르는 나리의 파장은 반짝반짝하고 평화로웠다.
일한은 손에 들고 있던 물 잔과 약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리를 깨우지 않고 돌아가려던 순간, 나리의 방 안에서 푸르른 빛이 새어 나왔다.
일한은 저도 모르게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주환의 워치가 파랗게 빛나며 보고서 창이 떴다. 주환은 보고서의 남은 부분을 채우다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
그는 붕대 위로 삐져나온 나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생각에 잠겼다.
우연치 않게 가이드로 발현된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바로 가이딩 검사와 자신의 페어 후보군을 받았던 때에는 미처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었다.
몇십 명의 페어 후보 중 가장 높은 매칭률로 나온 이나리는 당연히 첫눈에 띄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해 보자면 1순위는 아니었다.
일한의 말대로 쉴드 어빌리티는 해전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으로 하게.〉
이능력자 연구소의 특이 발현 케이스 전문가라는 김 실장은 나리를 지목했었다.
〈하지만, 쉴드 어빌리티는…….〉
〈매칭률이 제일 높지 않은가. 10년 동안이나 페어 가이드 한번 없었다는데, 이 셋 중에 이 중사가 제일 우선순위야. 그리고 이 중사와 페어가 되면 위에서 박 소령에게 따로 맡길 일이 있을 걸세.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이 중사로 해.〉
따로 맡길 일.
주환은 에스퍼인 아버지와 남동생의 입김으로 남들보다 빨리 진급을 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능력자는 그런 주환보다도 더 진급이 빨랐다.
그는 나리와 페어가 되면 진급해서 다른 구역이나 군함을 하나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능력자 연구소와 일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 ‘일’이라는 것이 진급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리의 쉴드 어빌리티가 필요하다는 걸까.
나리의 머리에 감긴 붕대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그의 손이 나리의 귀 뒤쪽에 있는 흉터를 스쳤다. GPS 칩과 전뇌 시스템을 시술한 흔적이라기엔 큰 화상 자국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었다.
전에 일한이 말했던 사고가 이 흉터와 연관된 것처럼 보였다.
나리는 이능력자 연구소와 연관되어 있던 기밀 작전 수행 중 큰 부상을 입어 기억 상실증을 앓았다고 했었다.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뿐이면 이상할 것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리를 알면 알수록 드는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높은 매칭률을 보이는 자신의 가이딩에 쉬이 넘어오지 않는 것도, 가이딩포비아가 있다는 강에게는 과민하게 반응하다가 패닉 상태가 되는 것도…….
게다가 좀 전 병실에서 살펴본 나리의 워치에 기록된 로그파일도 이상했다.
규칙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할 작전 수행 전적, Esp 파장 수치와 어빌리티 측정치, 의료 정보 등 모든 기록은 10년 전, 나리가 입대한 후로 2년간 듬성듬성 사라져 있었다.
“박 소령님.”
잠든 줄 알았던 나리가 주환의 손을 잡아 흉터에서 떨어트렸다.
“그 땜통은 제 콤플렉스라서요.”
“아, 미안합니다. 난 이 중사가 가만히 있어서 자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아직도 모깃소리까지 다 들립니까? 귀마개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거슬리던 건 이제 잘 안 들립니다.”
가이딩 받는 기분은 좋았다. 다만 온몸이 나른해지며 선잠에 들락 말락 하면 건너편 숙실에 있는 강이 부스럭거려서 나리는 잠에 쉬이 들 수 없을 뿐이었다.
주환은 옆으로 돌아누워 있던 나리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서서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는데, 나리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