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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50)화 (5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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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운명의 페어는 개뿔

“예?”

……저기요?

나리는 멍하니 뻗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더니만, 언제 사라졌는지 그가 있던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설마.

“연대장님?”

나리는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강을 불렀다.

“이 중사, 최 대령님 가셨습니다.”

“……갔다고요?”

“예.”

주환의 말에 나리가 허망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람 죽일 듯이 파장을 뿌리며 급한 용무가 있는 것처럼 하시더니 가셨다고요? 내 옷 단추 두 개만 채워 주시고요?”

“예.”

주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아니, 이러다가 사시사철 동복만 입고 다니라고 하시겠네. 울 아부지도 안 그러시는데. 나한테 볼일 있다면서 소령님한테 오라고 하고. 무슨 변덕이 초마다 바뀐담? 이 정도는 병 아닙니까?”

“아무래도 최강 대령님은 이 중사 옷 단속, 문단속하라는 주의 주려고 오신 것 같습니다.”

“헐, 참 나, 이게 무슨! 아윽…… 내 옆구리.”

나리는 펄쩍 뛰며 열을 올리다가 결린 옆구리를 붙잡고 끙끙댔다. 주환은 구겨진 자신의 상의를 껴입고 턱을 괴었다.

“흠, 이 중사와 저를 질투해서 괴롭히려고 온 것 같기도 합니다.”

“역시나.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중사 가이딩할 때마다 오실 것 같습니다.”

“와! 그 불길한 예감을 저만 느낀 게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빼죽 나온 입술로 툴툴대는 나리가 귀여워 주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리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망했다. 이제 어, 어떡하죠……? 매일매일 가이딩받기가 참 힘들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긴.

“약속은 약속이지 않습니까.”

강이 깽판을 놓든 일한이 수작을 부리든 나리의 페어는 주환이었다. 그런데도 물러설 기색이 없는 두 남자를 보니 오기가 나서, 주환은 가만히 가이딩만 하기 싫어졌다.

주환은 나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엉겁결에 주환의 무릎 위에 앉은 나리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남의 눈치 보며 어설픈 가이딩만 하면 이 중사뿐만 아니라 나도 곤란해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주환은 나리의 양쪽 귀를 막고 가이딩을 흘렸다.

온몸에 곤두섰던 긴장감이 씻은 듯이 내려갔다. 종일 나리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불안과 걱정, 어디로 향하는 건지 모를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해 먹어야 하나, 하는 사소한 계획까지.

이 손에 기대고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이 나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사납게 들쑤셔진 마음이 마냥 편치 않았다.

강은 제게 무슨 용무가 있었을 거다. 대답을 제때 안 해서 괜히 심술이 난 거겠지.

“아무래도……. 대령님께 이러지 말라고 제대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나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강은 밀려들어 오는 보고에 정신이 없었다.

- C12의 상황이 변해서 C11 작전을 하루 연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C12 구역 동태를 살핀 위성 영상과 정찰 로봇의 상황을 보고하는 수색팀 정 상사의 말이 왼쪽에서 들리면.

- 최강 대령. 대통령 각하께서 10분 내로 연락하라 하십니다. 통화 준비하십시오.

대통령 비서실 쪽에서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 그 밖에도 강을 찾는 급한 용무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아저씨, 가이딩 마저 받아야 하지 않아? 연구소 사람들이 아저씨 잡아야 한다고 마취 총 들고 가던데?]

[연대장님, 중앙미디어에서 지금 실시간 속보로 C12 구역에서 16세 미성년자 SS급 가이드가 특별 훈련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보도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은 넓은 집무실 책상 위에 가득 생성되는 메시지 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일을 도맡아서 걸러 내 주던 일한을 불렀더니.

- 강아, 나 너 때문에 근신령 떨어졌다.

하필 이렇게 바쁠 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책상 위를 내리쳤다.

“며칠?”

- 3주. 이번 C11 작전에서 빠지라는 소리지.

“내 옆에서 근신하면서 박주환 캐라고 했던 거나 해.”

- 그게 근신이냐? 잡일이지.

“몰라. 나 머리 아프니까 이쪽으로 와. 아니면 내가 간다.”

냉장고를 열어 저녁거리를 찾고 있던 일한은 강의 곁으로 이동했다. 집무실 가득 띄워진 영상과 메시지 창을 본 일한은 혀를 찼다. 그러게 진즉 자신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최강 대령. 대통령 각하와 연결되었습니다.]

10분도 되지 않아 책상 위를 어지럽게 떠돌던 영상 보고들과 메시지 창들이 싹 사라지고 대통령 비서실 창만 한가득 커졌다.

강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자신의 눈앞에 크게 확대된 현균을 바라보며 경례했다.

현균은 인사도 받지 않고 심기 불편한 투로 물었다.

- 최 대령, 요즘 보고에도 없던 C12까지 불쑥 가서 대체 무슨 일을 한 건가?

아앗! 일한은 강에게 순간 이동 하자마자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똥을 밟게 되었다.

현균은 강의 뒤에 서 경례하는 일한을 본척만척 얼굴을 굳힌 채 강의 대답만 기다렸다.

“황에덴 생도가 가이딩 연수를 운운하길래 실제 현장을 좀 보여 줬습니다.”

강의 한마디에 현균은 허허 웃었다.

- 아, 그랬군. 벌써 실전 훈련을 하는 건가? 그래서 어땠나, 에덴은? 내 딸이라는 건은 배제하고 솔직하게 말해 봄세.

현균은 주름살이 더 도드라지게 웃으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강은 입을 꾹 다물고 욕을 참았다.

- 애가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아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그렇지. 최 대령이 좋다고 하는 아이라 최 대령을 잘 따를 걸세. 직접 운동 좀 시키면 체형도 잡히고 체력도 좋아지지 않겠나.

C12 구역의 상황과 그 여파로 인한 변수는 어찌 되든 상관없고, 에덴을 강의 군부대에 두라는 말이었다.

강은 일한을 쳐다보았다. 일한은 상큼한 미소를 띤 채로 열심히 손짓 발짓 하며 ‘절대 안 된다고 해라’라고 사인을 보냈다.

“객관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황현균 대통령은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한 인상과 달리 그의 눈빛은 아주 위험했다.

“전술적으로 황에덴 생도의 가이딩은 위험합니다. 모든 에스퍼의 파장을 컨트롤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나, 다른 가이드들의 가이딩까지 해치는 방식이라 실전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현균의 미소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실전에서 몬스터들은 가이드를 먼저 노립니다. 아무리 많은 수의 에스퍼가 완벽한 전술로 가이드 하나를 둘러싸고 경호하는 동시에 전투한다고 해도 1%의 확률로 가이드가 전투 불능이 될 경우, 어떤 사태가 이어지겠습니까?”

- 흐음…….

강의 이의 제기에 현균은 낮게 신음했다.

“B급 페어 분대와 A급 일반 분대 중 어떤 분대가 희생자를 줄이고 더 많은 몬스터를 소탕할 수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B급 페어 분대입니다. 같은 이유로, A급 페어 분대와 저와 에덴이 단독 작전을 수행할 경우 어느 쪽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도…….”

- 그건 해 봐야 알지 않겠는가. 해 보지도 않고 유추할 수는 없지.

현균은 강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미 윗선에서는 강과 에덴 페어를 시험하기로 내정한 것이었다.

강은 입을 꾹 다물고 주먹 쥐었다.

“황에덴 생도는 아직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미성년자입니다.”

- 허허허. 그렇다고 내가 아직 다 크지도 않은 막내딸을 실전에 투입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최 대령이 맡아서 좀 가르쳐 달라는 거지.

“저는 누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일개 군인입니다. 황에덴 생도는 좋은 선생님들과 교관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강이 자신은 보모가 아니라고 돌려 말하자 현균은 미소를 거두며 씁 혀를 찼다.

- 최강 대령. 내가 딴 사람을 통해서 자네에게 명령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부탁하는 게 더 듣기 좋지 않은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게.

이 나라의 미래?

강은 속으로 냉소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한 세기가 가까워지도록 이뤄지지 못했듯이, 세계 곳곳에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나서 ‘이세계 몬스터 퇴치’라는 말도 그저 말뿐인 이상이 된 지 오래였다.

S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가 있는 나라에서 본국의 차원 균열을 막은 것은 1건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SS급 가이드가 있다고 달라질 것이 뭐란 말인가.

강이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자 일한이 대신 입을 열었다.

“예.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저희 후배이자 다음 세대에 우리나라를 지킬 재목이지 않습니까. 하하.”

대통령 각하의 다음 선거를 위한 강력한 패이기도 하고요!

일한의 입에 발린 맞장구에도 불구하고 현균은 떨떠름하게 시선을 돌리며 강을 쳐다보았다.

- 아아, 유일한 소령도 다른 S급 에스퍼와 매칭될 수도 있는 거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게.

“하하, 저도 최 대령님보다 더 착하고 예쁜 분이 좋습니다.”

운명의 페어 매칭은 개뿔.

상위 계급 매칭은 다 윗선에서 정해 주는 거다. 그렇기에 그 매칭 상대와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 최강 대령. C12의 상황은 아직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고, C11 작전에 성공하면 C9과 C8 구역의 재건이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인 만큼, 모두 기대가 크다네.

“C12를 계속 주시하면서 현 작전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하겠습니다.”

강은 정석적으로 대답했다. 이 한마디에 몇 명의 사람들이 밤을 새우고 희생해야 할지를 계산하면서 말이다.

- 좋군. 그럼 언제 한번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어 봄세.

짧은 통화가 끝나려고 하자 일한은 강을 밀어내고 다급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대통령 각하. 이번 제 처우에 대해서…….”

- 3개월 뒤에 또 연락하지.

현균은 일한의 말을 끊고 통화를 중단했다. 일한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손을 툭 떨어트렸다.

강이 일한에게 물었다.

“3개월? 그건 뭔데?”

일한은 깜깜하게 종료된 통화에,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긴, 1년은 길다고, 저쪽에서 나리 중사를 데려가겠다고 엄포한 기간이지.”

“젠장.”

“그것보다 내가 왜 근신에 감봉까지 받아야 하는 건데? 야, 최강! 내가 너 때문에 징계를 받았는데 어떻게 내 부당한 입장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 안 하냐?”

억울한 일한의 성토가 집무실 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머리끝까지 짜증 난 강의 하울링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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