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낙하
주환은 태형에게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열 손가락이 멈췄다.
하아.
주환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이런 걸 다 적어서 보고해야 하나.”
자괴감이 든다.
항해 일지는 쓰겠는데 가이딩 기록은 아직도 내키지 않았다.
에스퍼 관리는 전적으로 가이드의 몫이었다. 내 페어가 받은 훈련이나 작전 수행, 어빌리티의 상향점이나 하향점, 혹은 특이점.
접촉 가이딩이었는지, 아니면 방사 가이딩이었는지, 가이딩 시간, Esp 파장 수치와 건강 상태를 매일 기록해야 했는데, 문제는 ‘비고’였다.
내 페어가 남의 가이드에게 무슨 가이딩을 얼마나 받았다더라, 이런 말도 적어야 하니까.
“…….”
일한이 떠오른 주환은 애써 적었던 것들을 다 지워 버렸다.
성격 좋고 유능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성격이 너무 좋고 머리가 아주 비상해서 미친놈 같았다.
서로 싫다는데, 왜 더 짜증 나게 붙어 있으려고 하냐고!
“그 여우 녀석을 어떻게 떨어트리지?”
오늘도 자신과 같이 자야겠다고 깽판을 부리면 태형에게 보고할 틈도, 보고서를 쓸 시간도 없을 것이다.
주환은 시간을 확인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최대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첫 글자를 입력했다.
“박 소령!”
“우악!”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일한 때문에 주환은 의자 뒤로 넘어졌다. 일한은 괴수용 자동 소총과 저격용 라이플을 든 채로 주환의 책상 위에 착지했다.
“뭐, 뭡니까!?”
“현재 나리 중사, 좌표 어딥니까? 상태는?”
빠직.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말고 메시지나 통화를 하란 말이야!
주환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으르르 따지려다가 자신의 워치를 확인했다.
“음?”
실시간 확인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찍힌 나리의 위치와 상태는 5분 13초 전.
Esp 수치 80991 (40% 상승)
혈압/심박수 : 118/88
“이나리 중사에게 통화.”
- 통신 연결 실패. 통신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
주환이 자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리를 찾자 일한은 책상에서 뛰어내려서 주환의 손목을 낚아챘다.
“강아, 나리 중사 위치 추적하고 있지?”
- 추적이 안 돼. 그냥 반경 500m 다 들어 올리려고.
“워어, 연대장님. 지금 가이드도 없이 산 하나를 통째로 자르겠다고요? 폭주하지 말고 기다려. 일단, 박주환만 데리고 간다.”
주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따지려고 했다.
“자, 잠깐만!”
그러나 몇 마디 떼지도 못하고 순간 이동 당했다.
좀 전에는 의자에서 넘어지며 바닥에 머리를 찧었지만, 이번엔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마른 나뭇잎들이 깔린 흙바닥 위에 떨어져 굴렀다.
“으으.”
주환은 아픈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며 일한을 노려보았다.
저 여우 자식……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무겁고 커다란 총을 들고서 멋지게 착지한 일한은 주환에게 소총을 건넸다.
“여긴 위험도 A등급의 C12 구역 중심부입니다. 이나리 중사와 황에덴 사관생도가 S급 흙아귀에게 삼켜진 장소이고, 우린 지금부터 위험도 B급부터 S급의 몬스터 처치 및 나리 중사와 황에덴 생도를 구출해야 합니다.”
“뭐?”
“흙아귀에 대한 정보는 공유하겠습니다. 저는 강을 맡을 테니, 박 소령은 나리 중사 파장을 감지해 안정시키고, 나리 중사의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참, 쉽죠?
철컥. 일한은 들고 있는 저격용 라이플을 장전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브리핑했던 얼굴을 굳혔다.
“몸 조심히 따라오십시오.”
일한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열 걸음 먼 곳에 나타났다. 축지법을 쓰는 듯 멀어지는 일한 때문에 주환은 후다닥 소총을 들고 뛰었다.
C12 구역의 낮은 하늘이 검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공포가 밀려오는 강의 파장이었다.
산등성이 중턱에 서 있는 강은 멀리서 봐도 곧 폭발할 것처럼 온몸의 핏대가 솟아 있었고 눈동자도 붉었다.
심상치 않은 강의 파장은 땅도 진동시켰다. 산속에 숨어 있던 작고 약한 몬스터는 혼비백산하여 파장 밖으로 도망가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먹이 사슬의 최상위 몬스터들은 땅 위로 튀어 올라온 몬스터를 집어삼키기 바빴다.
아수라장이었다.
타앙! 탕!
“박 소령! 조심하세요!”
일한은 주환을 덮치려는 몬스터의 미간을 총으로 쏘았다. 족히 2m는 넘어 보이는 몬스터는 쓰러지면서도 주환을 향해 날카로운 손을 허우적거렸다.
〈지상 몬스터들은 해상 쪽보다 약아서 에스퍼보다 가이드를 노려야 한다는 걸 압니다.〉
주환은 나리의 말을 떠올렸다. 땅 위를 디딘 먹이 중 제일 탐나는 먹이가 자신이었다. 주환은 넘어질 뻔한 몸을 일으키고 계속 고지를 향해 달리며 총을 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나리가 있다는 건지, 또 나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은 아닌지, 주환은 턱까지 올라오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나리 중사에게 통화…….”
띠리링.
이번에는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이 중사! 괜찮…….”
- 통신 연결 실패. 통신 상태를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몇 초도 연결되지 않고 끊겼다. 땅이 흔들리며 흙과 돌이 굴러 내려왔다. 발을 딛자마자 미끄러지길 몇 차례, 주환은 나무뿌리와 기둥을 잡아 어렵게 올라갔다.
일한은 어느 쪽으로 간 건지 너무 멀어진 것 같았다.
갑작스레 끌려온 몬스터 소굴에, 제 에스퍼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달랑 총 하나만 있다니.
“제길.”
유일한, 이 녀석…….
자기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케게게! 케겍!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 떼와 개만 한 크기의 청설모 몬스터가 주환에게 달려들었다. 주환은 괴수용 총의 반동을 줄이기 위해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은 자세로 발사했다.
두세 마리는 맞혔지만 수가 워낙 많고 빨랐다. 쓰러트리지 못한 몬스터들에게 공격당할 거라 생각한 주환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
그런데 양팔의 틈새로 보이는 건 몬스터 떼가 아니었다. 땅에서 솟구친 커다란 입과 삐죽빼죽 불규칙하게 난 자잘한 이빨, 흙아귀였다.
쿠우웅! 으직……!
흙아귀는 주환이 기대고 있던 나무에 가로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자 혀를 날름거리며 주환을 삼키려고 했다.
“허억, 허, 헉…….”
주환은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반투명한 쉴드를 쳐다보았다. 쉴드 위로 흙아귀의 끈끈한 침과 혓바닥이 훑고 지나갔다.
워치도 잡아내지 못한 나리의 파장을 주환이 간발의 차로 잡아낸 것이다. 피가 차갑게 식고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주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땅속……?”
주환은 미간을 좁히며 흙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확실히 이 아래에서 나리의 파장이 흐르고 있었다.
주환은 쉴드를 핥아 대는 아귀의 혓바닥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당! 총알은 얇은 쉴드를 깨트리며 아귀의 입천장을 뚫었다.
“유 소령! 땅속에 있는 이 중사를 어떻게 구합니까?”
주환은 총대로 피투성이가 된 흙아귀를 밀치고 발로 걷어차며 트럭만 한 아귀의 입 안에서 벗어났다. 귓가에서 일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땅속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니 땅을 들어 올려 뒤집을 겁니다.
일한은 강의 등에 기대어 주변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쏘고 있었다. 강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며 공간을 나누는 경계막을 그렸다.
지하를 흔들며 가로지르는 경계가 넓게 퍼지고, 하늘을 가린 붉은 반구의 돔이 맞닿았다. 그리고 이내 경계선과 경계선 밖의 지표면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건 미친 짓이다.
주환은 부리나케 중심점에 선 강과 일한을 향해 달렸다.
“이 중사 위치는?”
강이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주환에게 물었다. 주환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나리의 파장을 느낀 나무를 가리켰다.
“저, 아래입니다.”
강이 손가락을 기울여 각을 쟀다. 꽤 깊은 곳이었다. 나리가 마지막으로 보내 준 위치에서 수직으로 파고든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던 지표면은 90도에서 180도까지 빠르게 기울어졌다.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과 맞닿았는데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 지금 너 뭐라고 했냐?”
나리가 있는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환은 자신이 뭘 잘못 말했나 싶었다.
“지금 800m짜리 산 하나 들어 올렸거든.”
강이 두 손을 뻗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거꾸로 된 세상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허공에 붕 떴다.
“1000m 하강 준비해라.”
공중에 뜬 흙먼지와 나뭇잎들을 휘저으며 몸을 가누려고 하던 주환은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10…… 9…… 8…… 7…….”
10초? 10초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는 거 아닌가?
일한은 강의 어깨를 짚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발을 굴러 나리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주환도 서둘러 일한의 뒤를 쫓았다.
순간 이동 능력자면 몰라도 낙하산도 없는 가이드에게 1000m 하강은 페어 없이 무리였다.
“3초…… 2초…… 1.”
강은 짝, 손뼉을 치며 공간의 경계선을 거뒀다.
쿠구그그그!
두둥실 느슨해졌던 바위와 흙, 나무는 한데 뒤섞여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