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집행 유예 1년
나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해란의 표정은 예상 밖으로 무덤덤했다.
“이나리 중사, 이 순간을 열심히 즐기십시오. 저는 이 중사만을 응원하겠습니다.”
“예? 즐기라니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 하고 후회 없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적절한 밀당으로 어장을 유지하란 말입니다. 두 소령님께 밉보이면 앞으로의 군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나리도 힘들고, 상담해 주는 나도 힘들고. 차라리 눈치 볼 것 없는 소령님들 마음이 힘든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제가 안 중위님도 아니고 그런 훌륭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하핫!”
해란은 나리의 어깨를 치며 크게 웃었다. 아무리 철없는 시절에 이 가이드, 저 가이드 만나 봤다고 했지만 나리의 상대처럼 직급이 높은 분도 아니었고 상위 레벨도 아니었는데, 사람을 추켜세우면 곤란하다.
해란은 나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맘 같아서야 매칭된 가이드를 잡고 편안한 길을 가라고 나리의 등을 떠밀고 싶지만.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남이 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을 해란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동안 고생한 나리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한과 주환이 아닌, 강이다.
“연대장님께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나리 중사님은 연대장님만 조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강을 떠올린 순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나리의 촉촉한 눈망울은 썩은 동태처럼 뚝 얼어 버렸다.
“아……. 그렇죠. 연대장님…….”
안 그래도 이상한 억지를 부리고 시시각각 변덕이 오락가락하시는 분께 수습해 달라며 떠넘기고 도망쳤는데.
“역시 새 인사과장님께 전역 지원서를 제출해야겠습니다.”
“아아! 나리야, 그러지 마.”
해란은 나리를 붙잡고 말렸다.
“이제 페어도 생기고, S급 가이드님께서도 자처하여 가이딩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몸도 고치지 않고 전역하겠다니! 이 중사 지금 무작정 전역하면 센터에 있는 퇴역 C급 가이드에게 매일 가이딩받아야 할 텐데. 그거 못 할 짓입니다. C급 가이딩이 얼마나 비싼 줄 아십니까? 거기서 가이딩받다가 3년 안에 퇴직금 다 날린다는 소리 못 들었습니까?”
힝.
나리는 두 무릎을 껴안았다. 전역 후 계획을 알차게 짜 보기도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무서워서, 다음엔 돈을 모아야 할 것 같아서, 나중엔 정 때문에, 전역하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을 끌다 보니 그냥 이대로 살면서 못 해 본 거 펑펑 해 보다가 죽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죽자!’가 제일 막막했다.
“이 중사, 유 소령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 마음을 정할 필요 있습니까? 박 소령님 연수 기간은 1년이나 있고, 이 중사는 그때까지 마음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 그래도 될까요?”
해란은 자신 있게 미소 지으며 나리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아주 많이 살면 50입니다? 인생 막사는 에스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중사 인생에 한 번 오는 순간인데, 이젠 좀 즐겨도 돼요. 단, 나중에 결정은 후회 없이 확실히 합시다.”
“네.”
나리는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해란은 부러운 듯이 발갛게 홍조가 오른 나리의 뺨을 잡아당겼다.
“자, 됐지? 이제 빨리 가. 나도 좀 데이트하게!”
“으아아.”
해란은 나리의 얼굴을 잡은 채로 복도로 내쫓았다. 숙사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리는 얼얼한 뺨을 쥐었다.
“그래도 된다 해도…….”
마음은 불편하고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일부터 제대로 한 뒤에 제 허락받고 썸 타라던, 강의 살벌한 명령이 가장 많이 불편했다.
❖ ❖ ❖
오늘은 소민이 전역한 뒤, A구역 이능력자 가이딩 센터로 첫 출근 하는 날이었다.
“윤소민 씨가 담당해야 할 에스퍼 명단이고, 이건 오늘 예약 건이에요.”
상사인 중년의 가이드가 리스트가 빼곡한 서류철을 소민의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가이드 경력 10년에 대위 달고 전역했으니 알아서 잘할 수 있죠?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
소민은 두꺼운 서류철과 쉬는 시간 없이 빼곡하게 짜인 스케줄을 보고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역시나 텃세가 심하구나.
C급 가이드 주제에 대위까지 달았으니 센터에서 일하는 가이드들이 그녀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소민은 자신이 담당해야 할 에스퍼 리스트부터 열어 보았다.
범죄 기록이 있는 퇴역 군인에서부터 불명예 제대를 한 용병, PTSD를 호소하는 에스퍼. 주의 및 특이 사항이 빽빽하게 채워진 사람들뿐이었다.
“아, 맞다. 우리 센터에 경호 에스퍼가 있긴 한데……. C급 신체 강화 어빌리티뿐이라 곤란한 일 생기면 경호원 말고 경찰 부르시는 게 나을 거예요.”
가이딩 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안내를 맡은 가이드가 나가고, 소민은 가이딩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오늘 일정을 확인하면서도 힘든 첫날이 되겠다는 감상보다 태형이 마음에 걸렸다.
군함으로 돌아가는 내내 애원하고 빌던 태형은 군함에 발을 딛자마자 소민을 붙잡지 않고 홀로 내렸다. 소민이 섰던 자리에는 승자의 미소를 띤 다희가 보란 듯이 섰다.
이게 맞다.
무능력한 가이드는 그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발목만 잡으니까.
인수인계하는 일주일 동안 소민은 태형을 쳐다보지 않았고 태형은 묵묵하게 함장석에만 앉아 있었다.
〈함장님, 앞으로도 건승하십시오.〉
〈…….〉
마지막 인사를 할 때에도 태형은 소민을 쳐다보지 않았다.
물안개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은 파장만이 자욱했다.
“괜찮으시겠지…….”
소민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약된 가이딩만 10건. 응급 가이딩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첫날은 당연히 정신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삐이익, 도어 벨이 울렸다.
“들어오십시오.”
소민은 자세를 고쳐 앉고 빠르게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예약자 이름이…….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배형준 에스퍼 님을 맡게 된 가이드, 윤소민…….”
고개를 든 소민은 우뚝 굳었다.
배형준 에스퍼는 39세, 푸짐한 인상에 짙은 눈썹을 한 남자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긴 털 코트를 입고 푸른빛이 감도는 긴 장발을 흩날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가이딩실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후우.
그의 입에서 터지는 하얀 입김이 가이딩실의 두꺼운 통유리를 꽁꽁 얼렸다.
태형은 소민이 일하게 될 거라는 가이딩실을 쓱 둘러보았다. 편하게 앉거나 누울 수 있는 리클라이너와 작은 책상, 그리고 기록 카메라와 비상벨이 소민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응급 가이딩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태형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억누르려고 애써도 한기가 뭉텅뭉텅 새어 나왔다.
“함장님. 죄송하지만, 예약한 분이 곧 오실 거라…….”
“그 사람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됩니까?”
“아무리 응급 가이딩이라도 센터에 등록부터 하셔야 할 겁니다.”
“했습니다. 나 돈도 냈어.”
“공태형 함장님.”
“나 좀 안아 줘. 소민 씨.”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차가운 파장에 소민은 무의식적으로 달려가 그를 안아 줄 뻔했다. 앞으로 살짝 들어 올린 손을 멈칫 말아 쥐고 입을 열었다.
“함장님 페어는 한다희 소령님이십니다. 새 직장까지 와서 이러시면 제가 많이 난처합니다.”
아, 한 소령…….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고개를 떨궜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태형은 소민의 가이딩실을 나가 문 옆에 놓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얼어 버린 통유리에 비친 태형의 뒷모습은 소민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상처받고 지독히 외로운 그의 기분이 파장에 뒤섞여 소민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정신 차려. 동화되면 안 돼.
“함장님, 저 오늘 스케줄이 빠듯해서 언제 응급 가이딩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다른 가이드분께 빨리 가이딩받으시고 승선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태형은 못 들은 척 요지부동이었다.
소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 소민에게 예약한 에스퍼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저 고집쟁이 에스퍼 같으니, 저러다 무슨 일이 나든지 말든지 신경 끄자.
소민은 문 앞에 서서 태형을 자꾸 흘끔거리기만 하는 첫 예약자를 직접 나가 맞았다.
“예약하신 배형준 에스퍼 님 맞으십니까? 들어오십시오.”
“아, 예…….”
첫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한기를 뿜어내는 태형이 센터를 오가는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를 얼려 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첫 손님은 주저하며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후덜덜덜덜…….
“……입니다. 앞서 짚어 드린 주의 사항에 동의하신다고 서명하신 뒤, 저쪽 의자에 편하게 앉으시면 됩니다.”
대충 동의서에 사인을 휘갈긴 손님은 리클라이너 위에 놓인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덜덜 떠는 에스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소민은 숨을 크게 쉬고 앞에 앉은 에스퍼의 파장에 집중했다.
10분 후.
흐덜더러덜덜덜…….
“…….”
소민은 미간을 팍 구기며 손을 뗐다. S급 파장이 난리를 치는데 앞에 있는 C급 퇴역 군인의 파장이 느껴질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밖에 있는 분과 얘기 좀…….”
“예예! 빨리 일 보고 오십쇼! 어후! 이 여름에 얼어 죽겠습니다!”
소민은 가이딩실에서 나가 태형에게 따졌다.
“함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저뿐만 아니라 다른 가이드들도 집중을 못 합니다! 어디 커피숍에서 따듯한 음료라도 마시며 몸 좀 녹이고 계십쇼. 제가 빨리 끝내고 가이딩해 드리겠습니다.”
“치, 커피 마시면 잠 안 오는데…….”
“제 것도 한 잔 부탁드립니다. 바닐라 카페라테 라지 사이즈로 사 오십시오.”
소민은 엉덩이가 무거운 에스퍼에게 자신의 카드를 쥐여 주고 가까스로 쫓아냈다.
“하아.”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