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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40)화 (4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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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다 같이 놀면 되지. 싸우지 마

킁킁?

나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맛있는 냄새다. 어제 쇼핑했던 주방용품과 식기들이 벌써 배달되었나 보다. 박 소령님이 요리도 하시고 커피까지…….

이런 행복한 아침, 너무 좋다.

나리는 거울 앞에 서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나리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나갔다. 그런데 주방에 있는 주환의 뒷모습이 어딘가 어제와 달랐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리 중사.”

주환의 옷을 걸친 일한이 활짝 웃으며 시커멓게 내린 커피를 잔에 따랐다.

“아, 예. 유 소령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안녕히 못 잤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카페인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유 소령님께서 여기에 계십니까? 박 소령님은…….”

“박 소령은 늦게 자더니 아직 자고 있습니다. 오늘 훈련 없는 날이니 깨우지 맙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 파악이 안 되네.

나리는 멀뚱멀뚱하니 서서 작은 식탁에 차려진 아침상을 쳐다보았다.

“앉아요.”

일한은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하얀 밥에 콩나물국, 계란찜에 두어 가지 반찬까지 놓인 밥상은 1인분뿐이었다.

“유 소령님은 안 드십니까?”

“전 이거면 됩니다.”

일한은 머그잔을 들었다.

“상사가 옆에 계시는데, 저만 먹기 좀 그렇습니다. 저 때문에 일부러 차리신 거라면…….”

“차린 사람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요. 식으면 맛없잖아요.”

“네. 감사합니다.”

나리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일한의 앞자리에 앉았다.

또 질투 대마왕 강이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나리는 수저를 든 채로 이리저리 기척을 살폈다.

일한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잘 먹겠습니다.”

“네. 많이 드세요.”

나리는 경계를 풀고 한 숟갈 크게 밥을 펐다. 술 마신 다음 날 입 안이 행복하도록 해장하다니, 아직 꿈인가 싶다.

나리는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일한에게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러자 일한이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리 중사 먹는 거 보면 다음에 또 뭘 해 줘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저처럼 음식 안 가리고 복스럽게 잘 먹는 에스퍼도 드물어요.”

“그래서 메뉴 고를 때 힘듭니다.”

“그런 고민 하지 마시고, 유 소령님이 좋아하시는 거, 드시고 싶은 거 하시면 됩니다.”

일한이 손을 뻗어 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령님은 오늘 뭐 하십니까?”

“비상입니다. 장 소령이 다시 인사과장으로 왔다고 해서.”

“아, 정말요?”

장대신 소령이 부대에 있었을 때, 강과 일한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던가. 같은 팀원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부임을 받고 나간다거나 전역하는 일이 많았다.

“이번 작전 쉽지 않겠군요.”

“예.”

나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누가 작전에서 나간다고 할까. 벌써 어깨가 뭉치고 허리가 뻐근한 느낌이다.

“나리 중사, 손.”

일한이 손을 내밀었다.

“저 아직 밥 다 안 먹었는데, 어디 가야 합니까?”

역시 공짜 밥은 없는 법. 더 일 시키려고 든든하게 먹이는 걸 수도 있으니까.

“아니, 가이딩해 주려고요. 작전 전까지 나리 중사 파장 좀 풀어 보게요.”

“어……. 음.”

나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주환의 방을 쳐다보았다.

〈이 중사, 저 두고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받지 마십쇼. 특히, 페어 있는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받는 건 페어 시스템에 어긋나는 거 알잖습니까.〉

어젯밤 주환이 단단히 일러둔 말이 걸렸다. 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이제 페어가 있으니까요. 가이딩은 박 소령님께 받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일한이 또 상처받는 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한은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고 내밀었던 손을 말아 쥐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는데 서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손잡는 건요?”

❖ ❖ ❖

- 엄마 엄마! 이거 봐 봐. 나 잘하지?

- 하연이가 발레 학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더니, 김 서방이 이번 주말에 등록해 줬더라.

해란은 친정에 맡긴 4살 딸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훈련에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 중이었다.

“하연아, 너무 예쁘다. 엄마 닮아서 공주님 같아!”

해란은 자신의 옆에서 침울하게 쭈그려 있는 나리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이 중사, 이 중사도 우리 하연이 보면서 힐링해. 빨리.”

나리는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흘끔 들었다. 홀로그램 영상 속의 하연이 발레복을 입고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나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연이 너무 이쁘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님 같아.”

- 나리 이모, 아포?

“으응? 아니야. 이모 안 아파.”

- 안 아포? 나리 이모 남자 친구가 호호 해 줬어?

으윽…….

4살짜리의 순수한 질문에 상처받은 나리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해란을 째려보았다. 해란은 모른 척, 딴 곳만 쳐다본다.

“하연아, 이모는 남자 친구 없어.”

- 엄마가 어제 나리 이모 남자 친구 생겼다고 했는데? 거짓말했어?

“아니, 남자 친구가 아니라 가이드…….”

- 하연이는 남자 친구 있어! 택이랑 유성이랑 준우랑, 그리고…….

좋겠다.

예쁜 하연이는 남자 친구도 많아서.

나도 4살 하고 싶다.

나리는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하다 말고 순수한 동심에게 물었다.

“하연아.”

- 응?

“하연이 남자 친구들이 하연이랑 둘이서만 놀고 싶다고 싸우면 어떻게 해?”

- 다 같이 놀면 되지. 친구끼리 싸우면 안 되잖아. 이모는 어른인데 그것도 몰라?

“…….”

4살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 멍청이다. 상처받은 나리는 입술을 쭉 내밀고 토라졌다.

아픈 곳 호호 해 주겠다는 가이드님이 둘이나 계시는데 한 분은 페어 가이드고, 한 분은 10년 동안 너무 잘 챙겨 주신 S급 가이드이시다.

게다가 둘 다 계급장도 같은 소령님이고, 서로 한 치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는 소유욕과 승부욕을 가졌다.

이런 난제가 또 있을까.

“하연아. 엄마가 다음 주에는 꼭 하연이 보러 갈게! 할머니랑 할아버지 말 잘 듣고 있어? 알았지? 사랑해.”

끝이 없을 것 같던 인사를 뒤로하고 해란은 영상 통화를 껐다. 그리고 아침부터 자신의 숙실로 들어온 나리를 돌아보았다.

“이 중사, 이제부터 상담은 페어 가이드와 알콩달콩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입니다. 이 금쪽같은 휴일에 페어와 오후까지 엉겨 붙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남의 남편은 눈치 보이게 내쫓고……. 응?”

“안 중위님…….”

“예. 이나리 중사님.”

“페어 두고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받는 거, 꽤 흔한 일인가요?”

“벌써 바람피우겠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다른 에스퍼들은 종종 그런다고…….”

“뭐 페어 시스템 무시하고 바람기 자자한 가이드들이랑 엔조이하는 애들은 그렇다 치지만, 왜요? 뒤늦게 후회가 몰려들고 다른 가이드가 생각나십니까?”

나리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떤 분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길래…….”

“누가 그렇게 말하는지 몰라도, 절대 가까이할 사람은 아니네요! 이 중사, 그 사람과 당장 연을 끊으세요.”

“유일한 소령님이신데요.”

“…….”

열을 올리며 외치던 해란이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3초 후, 짝짝짝……. 느릿느릿 박수 치던 해란은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기 시작했다.

“여윽시! 우리 유일한 소령님이시네요! 잘생기고 성격 좋고 능력 있고 빵빵한 스펙과 집안을 가진 이 완벽한 남자에게 에스퍼 1명만 매칭시키다니. 저는 줄곧 대단한 인적 자원을 낭비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우, 이 중사는 너어무 좋겠습니다?”

너무나 빠른 태세 전환 어빌리티 아닌가? 질투하는 건지, 놀리려고 하는 건지 해란의 얄궂은 말이 도움은커녕 위로도 되지 않는다.

울적하게 고개를 숙인 나리는 한숨만 내리쉬었다.

“한숨만 쉬지 말고 얘기를 하십쇼. 이 중사 얘기 들어 주려고 주말 부부인 제가 남편까지 쫓아냈단 말입니다.”

“그게 말이죠…….”

❖ ❖ ❖

〈박 소령이 그냥 손잡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그런 말은 없으셨습니다만.〉

〈아니면, 나리 중사의 선택 장애가 단 하룻밤 만에 고쳐진 겁니까?〉

오늘 아침 식사 시간, 일한은 나리만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닫은 나리의 얼굴을 보며 그녀의 속마음에 대한 힌트라도 발견하고 싶은 듯했다.

상처받은 듯, 불안해 보이는 일한의 눈빛에 나리는 한 번 더 일한을 밀어 낼 수가 없었다.

〈페어 아닌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한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버린 나리를 나무라는 듯한 혼잣말을 흘렸다. 나리는 입술을 꾹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

〈미안합니다. 내가 요즘 불안해서 나리 중사한테 부담감만 주는 것 같네요. 자제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소령님께서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

〈박 소령 깨워야겠네요.〉

일한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

망했다.

나리는 아직 반도 마시지 않은 따뜻한 일한의 커피를 보며 수저를 툭 내려놓았다.

너무 맛있게 먹었는데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이 내려가지 않았다. 나리는 물을 마시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시무룩하게 한숨을 쉬었다.

일한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환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박즈화안 소령니임.〉

〈…….〉

〈마지막 만찬을 차렸으니, 먹고 뒈지세요오.〉

뒤이어 갑자기 쾅, 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나리는 벌떡 일어나 주환의 방으로 뛰어갔다. 벽에 부딪힌 일한이 뒤통수를 매만지면서 버럭 따졌다.

〈아, 아야. 곱게 아침밥 지어서 예쁘게 깨워 주는 사람한테 발길질이 뭡니까?〉

〈그러게 누가 남의 귀에 대고 저주를 하랍니까.〉

자업자득이었다. 나리는 일한을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유 소령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일한은 주환을 째려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일한 때문에 잠을 설쳤는지 오늘따라 눈 밑이 퀭한 주환도 일한을 쏘아보았다.

흥. 일한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코웃음을 치더니 나리에게 안겼다.

〈아야야……. 나리 중사, 저 의무실까지 좀 부축해 주세요.〉

허. 주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꾀병 부리지 말고 순간 이동 하시죠. 이 중사, 이리 오십쇼.〉

〈제가 순간 이동 하면, 박 소령을 1대 칠지도 모르는데요?〉

〈쳐 보시죠. 칠 수 있으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섭게 일한이 주환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리고 쉴드를 친 주환이 공격을 막아 냈다.

〈…….〉

파장이 상쇄되며 일어난 충격파가 나리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잘생긴 남자와 좋은 커피 향, 화창한 햇살, 따끈한 아침밥과 행복했던 나의 아침이여. 안녕, 잘 가렴.

질투에 휩싸인 두 남자가 티격태격 싸우는 걸 보면서 나리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연대장님.〉

최 대령님, 계십니까?

안 주무시죠? 잘 들리시죠?

〈연대장님. 저는 두 분 못 말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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