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나야? 아니면, 쟤야?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간지럽다.
밀린 보고서를 읽고 있던 강은 인상을 구겼다.
“하.”
심기 불편해 보이는 연대장님의 한숨 소리에 주위는 땡, 얼어붙었다. C11 구역 수색 작전에서 돌아온 팀장과 해란, 주말에도 열심히 일하는 행정병까지.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들었나? 주말인데 빨리 숙실로 가서 빨래하고 밀린 드라마 좀 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걸까?
행정병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강은 아까 봤던 시계를 또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때제때 복귀 좀 하지…….”
이나리, 얘는 종일 어딜 가서 뭐 하는 거야? 머리 아픈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아침부터 박주환을 데리고 나가서는, 지금 몇 시냐고…….
오늘 하루 내내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던 불만이 입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수색팀 팀장, 정 상사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C11 구역 몬스터들이 많아서 부상자를 데리고 빠른 퇴각은 무리였습니다.”
강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C11 구역 영상을 껐다.
“정 팀장은 가서 가이딩받고 쉬어.”
“예.”
정 상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깨를 늘어트리는데 강이 잠시 멈춰 세웠다.
“아, 맞다. 정 팀장.”
“예.”
“혹시 의무실에서 생도 꼬맹이가 가이딩해 주겠다고 설치면 엉덩이를 차서 쫓아내 버려.”
“……사관생도가 이 주말에 여기까지 와서 가이딩을 합니까?”
오랫동안 최전방에 복무한 정 상사와 해란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낙하산…… 아니, 지뢰 같은 놈이야. 미성년자인데 설쳐 대서 골치 아프니까 알아서 피해.”
“예. 알겠습니다.”
“황에덴한테 말도 걸지 말고, 뭔 말을 하든 씹어. 걔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놈 1명이라도 띄면, 네가 털릴 각오 하고.”
“예!”
정 상사는 양어깨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대답했다. 정 상사가 집무실을 나가고, 다음은 해란의 차례였다.
“안 중위는 무슨 일인데?”
강은 머리를 짚은 채로 해란을 쳐다보지도 않고 보고서를 읽었다.
“이 중사 상담 말입니다.”
“……?”
“이제 페어에게 넘기는 건 어떻습니까? 본래 가이드가 맡는 일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정신적 유대감도 향상될 겁니다.”
이건 또 뭔 소리지?
강은 해란을 가만히 쏘아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해. 여태 잘했잖아.”
해란은 물러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연대장님, 실은…….”
“실은 뭐?”
할 일이 많다.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데, 박주환 얘기를 지금 굳이 해야 하나?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강이 뾰족하게 되묻자 해란은 에라 모르겠다, 폭탄을 투척했다.
“유일한 소령님께서 이 중사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
“그…… 유 소령님은 연대장님 페어 아닙니까?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유 소령 걱정을 왜 안 중위가 해?”
어휴……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개나리가 맘고생 해서 안타깝고, 우리 연대의 이인자이자 실질적 일인자인 것 같은 유일한 소령님이 허튼짓하는 것 같아서 걱정되고.
대외적 일인자이신 우리 연대장님은 페어가 다른 마음을 품어도 뭔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고, 그 줄을 너무 꽉 잡은 제 미래가 너무너무 걱정되어 잠이 안 와요. 잠이!
……라고 강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해란은 빙그레 웃으며 이것저것 근거를 들었다.
“흠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페어가 있는 에스퍼들도 S급 가이딩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중사도, 박 소령님도 숙맥이라 아직 별 진도도 없는데……. 서로 속마음을 터놓을 기회를 만들어 줘야죠.”
“…….”
강은 그게 용건이냐는 투로 해란을 째려보기만 했다. 해란은 마른침을 꿀꺽 넘기고 하하, 웃었다.
그랬더니 ‘지금, 웃어?’ 하며 강의 뾰족한 눈꼬리가 움찔거렸다.
……이게 아닌가?
해란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페어끼리 알콩달콩 잘되어 행복하고 무탈한 군 생활을 하자는 의견의 어디가 문제란 말인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안 중위는 여태 하던 대로만 해.”
짜증이 섞인 강의 말투에 해란은 입 안을 꾹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항상 연대장님의 평안과 행복을 기도하는 똘마니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강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유일한 이 녀석…….
[유일한, 어디야?]
넌 어디서 뭘 하길래 아직도 안 오는 건데?
째깍째깍 초침 흘러가는 소리가 강의 귀에 맴돌았다. 적막 속 잠잠히 부유하는 먼지들까지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내가 가이딩해 준대도?’
의무실 쪽에서 에덴이 얄밉게 키득거렸다. 강에게 하는 말이 아닐 텐데도 바로 그의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잠깐 손만 잡는 것뿐이잖아? 나 페어도 없어서 눈치 볼 사람도 없어.’
“좀 닥쳐라.”
가이드한테는 그냥 손만 잡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에스퍼한테는 아니다.
강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워치에 찍힌 일한의 좌표를 확인한 후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유일한, 답 없으면 좌표대로 간다.]
‘SS급 가이드가 해 주겠다고 할 때 감사히 받는 게 나을걸? 다음은 없을 테니까?’
쾅!
참다 못한 강이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전혀 집중이 안 돼.
[유일한, 너 5초 후에 보자.]
강은 이동했다.
일한에게 가기 전에 지뢰부터 처리하려 의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
모든 이의 시선이 불쑥 나타난 강을 인지하기도 전에 강은 에덴을 걷어찼다.
“아악!”
강의 기습 공격에 에덴은 풀썩 고꾸라졌다.
“정 팀장, 내가 얘 설치면 엉덩이 걷어차서 내쫓으랬지?”
험악하게 생긴 얼굴로 에덴에게 경고만 하던 정 상사가 깨갱, 꼬리를 내렸다.
아니, 조그맣고 연약한 가이드님을 어떻게 걷어찬단 말인가. 보통 가이드도 아니고 SS급 가이드님을 대차게 뻥 찰 수 있는 사람은 강뿐일 것이다.
에덴이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강을 돌아보았다.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강의 귀에 선명했다.
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삐딱하게 턱을 추켜들었다.
“집에 가서 자라. 꼬맹이.”
화가 난 에덴이 강의 파장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힌 것 없이 강은 사라진 뒤였다.
❖ ❖ ❖
“으으음!”
나리는 기분이 좋았다.
“맛있습니까?”
“네에!”
술이 술술 들어가서 적당히 알딸딸하고, 육즙과 기름으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기는 턱을 움직이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었다.
고소하고 감미로운 향과 맛이 혀 위에 녹아드는 이 환희를 가이드들이 알까? 강처럼 입이 까다로운 에스퍼도 이 미식의 행복을 모를 것이다.
게다가 술 잘 마시는 사람이 하나 더 있으니 오래간만에 흥도 돋울 수 있다.
“자아! 세 사람이니까, 우리 게임 할까요?”
신이 난 나리의 제안에 눈싸움 중이던 두 남자는 승부욕을 더 불태웠다.
“재밌겠네요.”
“좋습니다.”
나리는 활짝 입꼬리를 당기며 주환과 일한에게 물었다.
“뭘 걸까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떻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승자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건지, 각자 들어줘야 하는 건지, 소원의 범위는 얼마나 한정할 것인지 정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그냥 깔끔하게 진 사람이 벌주 마시는 거로 하죠.”
“저는 유일한 소령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나리는 한껏 흥이 올라 어깨를 들썩거리며 물개 박수를 쳤다.
일한이 싱긋 웃으며 술을 말기 시작했다.
“자아. 어떤 게임으로 할까요?”
1라운드의 패자, 주환은 덤덤하게 1잔을 들이켰다. 2라운드의 패자인 일한도 청량하게 원샷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연달아 이긴 나리는 너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예, 앗싸! 저 또 이겼어요오.”
발갛게 홍조가 오른 동그란 얼굴에 걸려 있는 간지러운 눈웃음부터 살랑살랑 흔들거리며 까르르 웃다가 헤헤 꼬부라지는 말투까지. 취한 이나리는 심히 귀여웠다.
세 번째 판에서 또 진 주환은 가득 따른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탁, 하고 빈 잔을 내려놓고 일한을 노려보는데 옆에서 나리가 주환을 콕 찔러 물었다.
“박 소령니임. 괜찮으시죠?”
“멀쩡합니다.”
“오올. 박 소령님 각이 살아 계십니다? 진 거 억울하시면 다른 게임도 있지 말입니다아.”
아무리 귀엽게 봐 주려고 해도, 나리는 좀 취한 것 같았다.
“나리 씨, 취한 거 같은데?”
“하나도 안 취했습니다. 지금 제가 게임 삼세판 다 이겼잖습니까?”
“맞아 맞아. 우리 나리 중사 하나도 안 취했지!”
그런데 나리가 헤실헤실 풀린 얼굴로 취하지 않았다고 억지를 부려도 일한은 말리지 않고 더 부추기는 게 아닌가.
“다들 술이 세다고 했으니까, 이번 판은 2잔으로 할까요?”
“예!”
일한의 제안에 나리는 곧바로 용감하게 ‘고’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세상사가 늘 그렇듯, 항상 이기는 사람은 없었다. 벌주 2잔에 당첨된 나리는 이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비장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일한이 나리의 팔목을 잡아 멈췄다.
“나리 중사, 내가 대신 마셔 줄 수 있는데?”
“아닙니다. 게임의 흥이 떨어지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흥이 왜 떨어집니까. 내가 마셔 주는 대신에 소원 하나 들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저도 술 마시고 싶어서요.”
나리가 큰맘 먹고 쏘는 술인데 주환과 일한에게 모두 빼앗길 수 없었다. 누가 말리기 전에 나리는 재빨리 목을 젖히며 시원하게 마셨다.
꿀꺽꿀꺽, 입가에서 알싸한 술 한 줄기가 그녀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탁.
“크흐, 1잔 원샷했죠?”
나리는 손등으로 입가를 훑고 속에서 올라오는 트림을 삼켰다.
“딸꾹?!”
그랬더니 딸꾹, 어깨가 움찔거리며 반쯤 감긴 눈이 동그래졌다.
안 되겠다.
주환은 나머지 한 잔을 멀리 밀어 내고 얼음물을 나리에게 내밀었다.
“나리 중사. 나머지 잔은 우리 둘 중 하나가 흑기사 해 줄게요. 골라요.”
일한이 또 제안했다.
주환과 일한에게는 술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야?
아니면, 쟤야?
빨리 고르라고, 이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