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전조 증상
“아하하. 이러지 마시고…….”
두 남자 사이에 낀 나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자신 앞에 있는 테이블과 일한이 가리킨 옆 테이블을 턱 붙였다.
“후우! 됐죠?”
2인용 작은 테이블 2개를 붙여 4인용 테이블을 만든 나리가 생긋 웃으며 일한과 주환에게 자신의 양쪽 자리를 권했다.
“전 여기 앉을게요. 유 소령님은 여기, 박 소령님은 이쪽에 앉으시면 보다 넓은 테이블에서 평화롭게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한과 주환은 서로 눈싸움하며 나리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두 남자가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나리가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강력히 선언했다.
“두 분께서 서로 밥값을 내 주신다고 하셨지만, 오늘은 가이드님들께 신세와 민폐만 끼치는 제가 쏘겠습니다!”
“아닙니…….”
“나리…….”
“괜찮습니다! 제가 내겠습니다!”
나리는 일한과 주환의 말을 끊고 주문 버튼을 눌렀다.
“저, 소령님들께 얻어만 먹는 거지가 아닙니다! 오늘 약속이 겹친 것도 제 탓이고 너무 죄송한데, 고기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못된 에스퍼가 돈을 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나리는 두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테이블 위로 뜬 주문 창에 양 꼬치 모둠 세트와 술을 주문했다.
이번엔 내가 이겼네.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데에 성공한 주환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흥.”
일한은 주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끼었다. 하,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었다.
주문한 음식들이 한 상 가득 도착했다. 나리는 먼저 나서서 맥주잔을 채워 일한과 주환에게 돌렸다.
“자아! 첫 잔은 시원하게!”
불판 위에서 탱탱한 양고기가 고소한 기름을 흘리며 자글자글 익어 가고, 그 위로 맥주잔이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박주환 소령.”
일한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주환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가이드로 특이 발현 한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일한의 질문에 헤벌쭉 풀어진 눈으로 양 꼬치 냄새를 킁킁거리던 나리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환을 쳐다보았다.
“어라? 그렇네요. 에스퍼면 몰라도 가이드로 발현되는 건 테스트 말고 알 방법이 없는데, 박 소령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좋은 걸 먹었다든가, 이상한 꿈을 꿨다든가, 몸이 막 아팠다든가, 그런 전조 현상이라도 있었습니까?”
주환은 다 익은 양 꼬치를 들며 덤덤하게 말했다.
“헌혈했다가 알았습니다.”
“헌혈?”
“1달에 한 번씩 헌혈하지 않습니까? 어떤 에스퍼가 수술 중에 수혈받고 파장이 안정되었다길래 형질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
일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리도 일한과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예? 가이딩과 Esp 파장은 심장 박동과 뇌파…….”
쉿.
일한은 테이블 밑으로 나리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헌혈이라……. 꾸준히 헌혈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것 없습니다. 배에서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전 수병이 의무적으로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지상군과 다르군요.”
싱글거리던 일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부에서 전 수병을 상대로 실험했고 꾸준히 지켜보기 위해 1달에 한 번씩 전수 검사를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영화처럼 딱히 어디가 아팠다거나 사고로 인한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유 소령은 뭐가 달랐습니까?”
주저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하는 걸 보니 주환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도 어디가 아팠다거나 충격적인 사고를 겪은 건 아니었지만…… 아주 생생한 꿈을 꾸곤 했습니다.”
일한의 말에 나리의 귀가 쫑긋거렸다.
가이드와 에스퍼에게 이능력이 발현되는 전조 증상은 개인차가 커서 미신처럼 여겨지곤 했다.
웹상에서 이런 일을 겪으면 이능력자로 발현된다고 하더라, 이런저런 현상을 느끼면 어떤 능력자가 된다더라 등등.
증명된 적 없는 정보들이었지만, 혈액형 성향이나 성격 심리 분석처럼 커뮤니티에 자주 심심풀이로 떠도는 화제들이었다.
“와아. 유 소령님.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나리 중사, 이런 얘기 싫어하지 않았었나요?”
눈 뜨자마자 에스퍼였으니 이능력 발현 전조 증상이나 이상 현상에 관해 관심 없던 나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강이 제 목을 잡고 왈왈 짖어 대던 개꿈도 그렇고, 주환과 키스하면서 스쳐 지나갔던 생생한 기시감까지……. 소설 속에 빙의하고 나서 이랬던 적이 없었기에 문득 궁금해졌다.
“싫긴요? 궁금합니다. S급 가이드께서 꾼 꿈이라니, 완전 대박 꿈 아니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10년 만에 페어가 생긴 것도 기적인데, S급 이상으로 각성하는 로또 맞은 에스퍼가 나일지도 모르잖아?
이대로 각성해서 등급이 높아지면, 고속으로 승진해서 간부 직급을 달고 떵떵거리며 다닐 수 있지 않을까? SS급 연대장을 때려눕혀 본다든가, SS급 엉덩이를 걷어차 본다든가…….
나리는 말도 안 되는 행복 회로를 돌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음, 남한테 말한 적 없어서 조금 낯 뜨거운 얘기긴 한데…….”
일한은 빈 잔을 쥐고 빙그르르 굴렸다. 뜸을 들이던 그가 나리를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당겼다.
“꿈에 나리 중사가 나왔던 거 같아요.”
“예? 저, 저요?”
나리는 들고 있던 꼬치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거 뭐 운명이라든가, 예지몽 같은 건가? 갑자기 어디서 많이 보던 진부한 전개에 소름 돋으려고 하네.
“네.”
일한은 나리의 손을 자연스럽게 그러잡았다. 부드럽게 휘는 눈매와 헤실헤실 번지는 그의 미소,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온기가 나리의 온몸에서 긴장을 사그라들게 했다.
“햇살이 너무 밝았어요. 따듯하고 포근하고. 햇볕에 눈가가 그늘져서 잘 안 보였지만 나리 중사 같은 예쁜 에스퍼가 나한테 안기면서 귓가에 속삭이는데…….”
“자기 전에 뭘 본 겁니까?”
수작질 좀 작작 해라.
주환은 이상한 말로 꼬리 치지 말라는 경멸 가득한 표정으로, 일한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일한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주환을 향해 눈썹을 삐죽댔다.
하, 이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고 순수했던 청소년기의 나를 이상하게 몰아가네?
일한은 이를 물고 항변했다.
“뭘 보긴요? 목표가 사관 학교인 중학생이 문제집과 교과서 말고 더 볼 게 있습니까? 박 소령님은 공부 안 하고 자기 전에 뭐 좋은 거 보셨나 봅니다?”
“뭐…….”
호르몬과 호기심 왕성할 신체 건장한 청소년이 그런 걸 안 본다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주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양고기 꼬치를 물고 쭉 빼서 와작와작 씹었다.
“윽.”
되레 공부 안 하고 흐뭇한 BL 웹소설과 웹툰을 파며 청소년기를 보낸 나리가 뼈 맞고 신음을 흘렸다.
흑흑, 재수 없는데 둘 다 잘나서 할 말이 없다!
가이드로 발현해 사관 학교에 특수 입학한 일한이나, 피지컬과 멘탈, 성적으로 최악의 경쟁률을 뚫고 해군 사관 학교에 일반 입학한 주환이나 저보다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요?”
“지금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이었는지 흐릿한데, 엉엉 울면서 일어났었죠. 잠에서 깨고 나서도 몇 시간이나 펑펑 울어서 학교도 못 가고. 이상하게 여긴 부모님이 연구소로 데려갔습니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파장과 감정에 잘 동화하니까 그런 꿈을 꿨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꿈 때문에 몇 시간이나 엉엉 울었다는 소년 유일한은 얼마나 귀여웠을까. 나리는 턱을 괴고 멋대로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엄청 슬픈 꿈이었나 봐요.”
“글쎄요. 슬프다기보다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그 복잡한 감정을 단지 슬펐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품에 안긴 그녀가 생생했다. 온기와 체향, 자신의 살갗을 간지럽히고 피를 전율시키는 감촉까지 너무나도 좋았다.
그 순간, 애절하고 슬픈 감정이 가슴속 깊이 흠뻑 젖어 들어가서 숨이 벅차오르다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일한은 나리를 따라서 턱을 괴고 씩 웃었다.
그게 너였을 것 같아. 너 말고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나리 중사는 에스퍼로 발현하기 전에 무슨 특별한 경험 없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눈 뜨니 에스퍼였어요.”
나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능 만점자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음.”
나리는 허공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잘 생각해 봐도 모르겠습니다.”
빙의했는데, 이 몸 주인의 사소한 것을 어찌 알겠어?
주환이 나리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나리 씨는 몇 살에 발현했습니까? 다른 에스퍼처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입대했습니까?”
나리처럼 귀한 병력으로 확인된 에스퍼는 그 순간부터 대기업 과장님 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았기에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주환은 나리가 당연히 일반적인 절차를 밟아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툭 튀어나온 나리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뇨. A급 방패막이라서 고등학교 졸업은커녕 바로 입대시켰던데요? 첫 작전이 17살이었던가?”
“……예?”
놀랍지? 나도 빙의하자마자 기절할 뻔했다. 나리는 자신이 처음으로 빙의했을 때를 떠올리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는 본디 학업을 등한시한 고등학생이었고, 어쩌다 재밌게 읽던 웹소설에 빙의해서 눈을 떴는데.
“우씨! 내가 고등학교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있을 줄은 몰랐지. 응? 다른 애들은 펄럭거리고 팔랑거리는 드레스 입고 황제 품 안에서 깨던데, 나는 이게 뭐냐고. 창창한 청춘에 세계관 최강 싹퉁바가지한테 굴렁쇠처럼 굴려지면서 뼈 빠지게 개고생하고, 죽을 뻔하고…….”
“…….”
구시렁거리며 입가를 훔치는 나리를 보던 주환이 조용히 일한에게 눈짓했다.
쟤, 주량이 얼마야? 주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