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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34)화 (3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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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타깃은 신속히 옮길 것

“아, 진짜 왜 이러십니까…….”

일한은 허공에 대고 따졌다.

“여태껏 착하고 성실하게 일한 경력직 고급 인력에게 이런 부당한 대우 섭섭합니다.”

그에게 답변해 줄 사람은 없었지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분께 불만이 접수됐을 터.

일한은 가느다랗게 느껴지는 강의 파장을 끌어와 포박을 끊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시큰거리는 손목을 털었다.

나리와 약속한 시간까지 14분 남았다.

일한은 헝클어진 머리를 쓱 뒤로 넘기며 귀 뒤를 만졌다. 머리에 심어 뒀던 GPS 칩을 뺀 것은 안 들킨 듯했다.

페어와의 거리 : 21.7km

Esp 파장 감지 : 31%

좌표 : ……

이 정도면 큰 어빌리티를 쓰지 않는 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일한은 황 대통령이 재킷 앞주머니에 찔러 넣은 쪽지를 꺼냈다. 지시 사항은 짐작했던 것과 같았다.

3개월 내로 타깃을 해군으로 옮길 것.

“…….”

일한은 쪽지를 잘게 찢어 버렸다.

후우.

숨을 조르는 듯한 넥타이를 끌어 내리는 일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유능하고 잘생긴 S급 가이드보다 SS급 가이드와 특이 발현자를 더 내세우겠다는 말이지?

언제든 버리는 카드가 될 수 있으니 잔꾀 부리지 말고 명령대로만 잘하라는 상부의 경고가 왜 이렇게 우습게 느껴지는 걸까.

일한은 낮게 코웃음 치며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아무리 뒤져도 딱히 나온 것이 없었을 것이다.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에 일을 다 봐 놨었으니까.

서류 가방을 들고 연회장을 나온 일한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며 세면대 밑에 설치해 놓은 도청 장치를 자연스럽게 회수하고, 첫째 칸에 들어가 변기 뚜껑에 감춘 소형 권총을 허리춤에 넣었다.

군용품이 아닌 사비로 마련한 워치를 켰다.

연회장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의 신상 정보와 함께 현재 어디에 있는지 표시가 되었다. 화장실 내 음성 정보를 분석한 AI가 통화 내용과 함께 발신자와 수신자까지 잡아낸 결과를 일한의 눈앞에 비추어 주었다.

AI가 추려 낸 이들 중 최고 등급 기밀 접근 권한을 가진 사람과 그 비밀 키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알 사람은 아마도.

“…….”

시간이 없다. 10분 안으로 처리해야 한다.

일한은 허리춤에 찼던 명찰 줄을 길게 뽑아 두 손에 말아 쥐었다.

그리고 이동했다.

❖ ❖ ❖

평범한 주말 오후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던 이 준장은 갑자기 차가 덜컥거리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윽!”

칼날 같은 서늘한 금속이 그의 목을 콱 죄고 있었다.

“끄그…… 으……!”

이 준장은 핸들에 올린 손을 놓고 뒷좌석에 있는 일한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일한은 숨죽인 채로 이 준장의 귓바퀴 뒤에 있는 칩에 프로그램을 주입했다. 그의 움직임이 멎으며 손이 떨어지는 순간 와이어를 놓았다.

“켁! 콜록, 콜록!”

죽다 살아난 이 준장이 마른기침을 토해 내며 목을 쥐었다.

“누, 누구야!”

그러나 뒷좌석은 문이 활짝 열린 채, 차가운 바람만 웅웅 몰아쳤다.

다음 타깃은 이 준장과 통화를 연결한 황 대통령의 비서, 그리고 해군 측과 은밀한 통화를 하던 이능력자 연구소장이었다.

황 대통령의 비서실에서 액세스 키를 복사하고 마지막으로 연구소장 쪽으로 이동했을 때, 나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유일한 소령님. 저 약속 장소에 왔는데 말입니다.]

벌써?

일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미안해요. 나리 중사, 5분만 기다려요. 금방 갑니다.]

일한은 은은한 불빛과 고요한 음악이 흐르는 복도를 걸었다.

스파에서 마사지 테라피를 받던 손님들이 일한을 흘끗거렸다. 고급 스파의 투시 도면과 함께 그들의 신상 정보가 일한의 눈에 지나갔다. 그리고 보안 등급이 제일 높은 인물의 위치를 확인한 그가 테라피스트를 멈춰 세우고 물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인가요?”

“화장실은 오른쪽으로 돌면 나옵니다. 담당 테라피스트가 안내해 드리지 않으셨나요?”

“감사합니다.”

일한이 해맑게 웃으며 화장실 쪽으로 향하자 테라피스트도 길 잃은 손님께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던 일한은 오른쪽 코너를 돌자마자 순간 이동 했다.

“으음…….”

긴장을 풀고 마사지를 받고 있던 연구소장은 갑자기 떨어진 테라피스트의 손길이 곧 이어지겠거니 했다.

철컥.

묵직한 쇠붙이가 그의 뒤통수에 닿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연구소장이 화들짝 놀라 경호원을 부르기도 전에, 일한은 그의 뒤통수를 세게 짓누르며 왼손에 쥐어진 워치를 쐈다.

핑!

“우윽! 으, 으윽!”

연구소장은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총상에도 짓눌린 신음만 시트 속에 울려 댈 뿐이었다.

[10초 안으로 15년 전 이능력자 유전자 편집 실험 기록을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10…….]

일한의 메시지를 받은 연구소장은 고통과 압박에 컥컥 막히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9, 8…….]

“그, 그 기록은 이미 파기되어서 없어요. 없, 없다고요……!”

[7, 6…….]

“실험은 2가지 플랜으로 진행되었고, 이능력자 가족을 둔 아이 중에 이능력 발현 유도 유전자를 자극하는 실험이 하나, 그리고…… 처음 수정 단계에서부터 유전자 편집 아기를 만드는 것이 플랜 B였는데…….”

[4, 3…….]

“첫 실험은 36명이 특이 발현 했고, 두 번째 유전자 편집 아기는 단 1명밖에 서, 성공하지 못…….”

[1, 0. time is up.]

일한은 연구소장의 머리를 세게 가격해 기절시켰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테라피스트의 손에 총을 쥐여 주고 벽에 한 발을 쐈다.

그의 말이 믿을 만한 사실인지는 나중에 알아봐야겠지.

일한은 나리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이동했다.

❖ ❖ ❖

몇 시간 전.

달콤하고도 야릇한 분위기가 흐르던 피팅룸 안은 몇십 분째 대치 상태였다.

“익! 아앗! 하아, 우씨……!”

나리는 울상이 되어 주환을 붙잡고 콩콩 뛰며 팔을 쭉 뻗었다. 아무리 힘껏 폴짝폴짝 뛰어도 주환의 손에 들린 라이더 슈트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박 소령님! 진짜 이러실 겁니까? 이런 말은 없으셨지 말입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뛸 때마다 짧은 치맛단이 팔랑팔랑 들려서 더 민망했고, 주환은 현역 농구 선수 못지않은 현란한 수비를 펼쳤다.

“벌써 5시 넘었습니다. 점심만 먹겠다는 말도 없었지 않습니까?”

“치사합니다. 빨리, 제 옷 주십쇼. 저 이대로 못 나가요.”

“예쁘다고 100번은 얘기했는데, 왜 못 나갑니까? 계산은 끝냈으니 나오십시오. 부대 가기 전에 슈트 줄 테니까…….”

“저녁은 선약이 있단 말이에요…….”

선약이 있다는 말에 주환은 우뚝 멈췄다.

“선약? 누굽니까?”

“…….”

누군지 알아서 뭐 하시게요…….

나리는 시선을 돌리며 우물쭈물했다. 나리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꾹 다문 것을 보니, 주환의 머리에 한 남자가 스쳤다.

“어딘데, 거기가.”

주환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짧은 말이 나리의 심장을 쿵 떨어트렸다.

두 남자는 눈으로 험한 욕을 해 댔다.

“…….”

“…….”

안 그래도 나리가 일한과 선약이 있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던 주환은 말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머리에 정장까지 차려입은 일한을 보니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일한도 하얀 블라우스에 A라인 치마를 입은 나리에게 눈길을 멈췄다가 자신을 쌀쌀하게 노려보는 주환을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박 소령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거긴 내 자린데?

“팔이 완치되어서 말입니다.”

주환은 오른쪽 손목을 매만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일한도 주환이 앉은 의자에 한 발을 턱 올리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아, 그러시구나. 아시다시피 저도 다리가 아주, 멀쩡합니다.”

어쩌라고.

주환은 아니꼽게 일한을 모로 올려다보았다.

서로 아주 멀쩡하다는 걸 뽐내며 맘껏 술을 마시겠다는 건지, 아니면 싸우자고 도발하는 건지.

하아, 내 팔자야…….

복이 많은 건지, 죄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가시방석에 앉은 나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냉수를 들이켰다. 꽉 막힌 체증이 내려가며 얼얼해지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개운해졌다.

이거 뭐 어쩌겠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된 거 평소엔 없어서 못 먹는 양고기 맛이라도 봐야지.

“소령님. 저어, 그게 말입니다…….”

나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하자 주환이 나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유일한 소령님.”

“예? 박주환 소령님께서요? 아니, 뭐 굳이 그러실…….”

“어차피 나리 씨가 바이크 태워 줘서 내가 밥 사기로 했고, 유 소령님께 신세 진 것도 있고 말입니다.”

뭐? 나리 씨?

이 자식이 은근슬쩍 어딜 끼려고?

발끈한 일한은 워치를 톡 건드리더니 생긋 웃었다.

“감사한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미 오늘 저녁은 나리한테 내가 쏘기로 약속한 거라서, 박주환 소령님은 소령님 몫만 계산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한은 반대쪽에 있는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며 공손히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그 자리는 제가 예약한 자리라서, 박 소령님은 이쪽으로 앉…….”

“제가 먼저 왔습니다.”

빠직.

일한은 나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리야, 여기 앉아.”

그러자 지지 않겠다는 듯 주환도 나리를 향해 말했다.

“나리 씨, 늦게 온 사람이 알아서 앉으라고 하고 여기 앉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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