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리액션을 크게 하라며?
“전 이제 살 건 다 고른 것 같습니다. 박 소령님은요?”
마트를 이리저리 돌고 오르내렸더니 카트가 물건으로 가득 차서 더는 쌓을 공간이 없었다. 이제 계산하고 나가서 어디 앉을 곳을 찾아볼까 했는데, 주환은 계산대로 가는 나리를 멈춰 세웠다.
“다 고른 거 맞습니까?”
“예? 예에…….”
나리는 주환과 공유한 리스트를 보며 잊은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잘 생각해 보면 이 중사가 잊은 것이 있을 겁니다.”
주환은 찌푸려진 나리의 미간을 검지로 톡톡 문질렀다.
“분명히 이 중사가 나한테 그랬거든. 월급 받으면 뭐 많이 살 거라고.”
“아아, 그건…….”
그제야 나리는 로또처럼 뚝 떨어진 가이드님을 붙잡아 보겠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중사,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군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저 지금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1달 월급 치 치마와 원피스를 맨날 입어 준다고 해서 이 중사 옆에 남았는데, 일주일 넘게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끄으응.
죄인 이나리는 주환과 눈도 못 마주치고 얼굴을 붉혔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닌데,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고 사 본 적 없는 제 옷을 사러 같이 가겠다는 주환 때문에 너무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던 나리가 주환을 흘끔 올려다보며 작게 말했다.
“오늘은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주환은 단칼에 거절하며 계산대에서 뒤돌아 갔다.
으으.
눈앞이 아찔해진 나리는 힘 빠진 걸음걸이로 주환의 뒤를 따라 여성복 매장이 있는 층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나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주환의 눈치만 보면서 휘적휘적 옷을 골랐다. 아무것도 고른 것 없이 다른 쪽으로 가고, 또 성의 없게 쓱 훑어만 보고 옆으로 옮겨 갔다.
“하아.”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람?
장 보는 거, 아닌 것 같아…….
주환이 신경 쓰여서 온몸의 털이 삐죽삐죽 서고 심장이 두근두근 간지러워 멀미가 일었다.
“이 중사. 아니, 나리 씨.”
“네?”
나리가 화들짝 놀라며 주환을 돌아보았다. 주환은 옷걸이에 걸린 하늘색 원피스를 나리의 어깨 위에 대어 보았다.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토끼 눈이 된 나리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가, 천천히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한번 입어 보십쇼.”
“이, 입어 봐야 합니까?”
“옷을 안 입어 보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예, 그렇죠…….
나리는 하늘색 데님 원피스 외에도 주환이 이것저것 집어 온 옷을 한 아름 안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그냥, 한 번 입어만 보는 거다. 육군 정복도 치마잖아? 몇 벌 입어 보고 괜찮은 거 골라서 이 이상하고 묘한 장보기를 끝내야겠다.
나리가 크게 한숨을 쉬고 라이더 슈트를 벗는데, 밖에 있던 주환이 말했다.
“입고 나오십쇼.”
혼자만의 패션쇼를 후다닥 끝내려던 나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아무리 예민해도 폐소 공포증은 없었는데,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똑똑, 주환이 문을 두드렸다.
“다 입었습니까?”
“이, 입긴 입었습니다만, 너무 이상해서…….”
“사이즈가 안 맞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나리가 문을 빼꼼, 1cm만 열고 말했다.
“저, 진짜 안 어울려도 리액션 크게 해 주셔야 합니다.”
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주환은 풋 하고 웃었다.
“알겠습니다.”
“안 어울리면 안 어울린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을 놓았다.
등에 달린 지퍼를 끝까지 못 잠가서 한쪽 어깨끈은 비뚤어지고, 맨발에 휑한 맨다리를 배배 꼰 채로 무릎 위로 올라간 원피스 밑단을 잡아 내렸다.
“…….”
“……?”
거봐, 이상하잖아.
리액션 크게 해 준다고 했던 주환이 조용했다. 쿵쿵 제 심장이 고막을 때리는 소리를 하나, 둘…… 열까지 세며 제 발가락만 보고 있던 나리가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탁.
주환이 문틈을 잡아 젖히더니, 나리의 허리를 잡아 그대로 피팅룸 안으로 들어갔다.
“바, 박 소령님?”
“예쁩니다. 근데, 나리 씨 말대로 이건 부대 내에서 입기 좀 그렇네.”
전면 거울 위로 나리를 밀어붙인 주환이 나리의 양 손목을 한 손에 그러잡고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찬찬히 그녀를 훑어보는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지금 나만 봐야겠습니다.”
주환이 나리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지금 말해서 미안한데, 이건 가이딩 아닙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입술이 포개어졌다. 모세혈관까지 화하게 퍼져 나가던 가이딩은 없었다. 그저 따뜻하고 다디단 부드러움뿐이었다.
입술 위를 살포시 짓누르던 부드러운 입맞춤이 잠시 그쳤다. 주환은 턱을 기울여 나리의 잇새를 젖혔다. 혀끝이 깊숙이 짓쳐들어와 나리의 혀와 엉켜 들었다.
“음, 으……!”
혼을 빼놓던 가이딩이 없으니 맞닿는 숨결과 감촉이 홍수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길 몇 번. 예민해진 오감이 뇌를 쿡쿡 찔러 대도 사고 회로는 또렷했다.
일을 우선해야 하는 전우니까, 오늘은 데이트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키스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리의 이성이 그녀를 흔들어 댔다.
그런데 가슴속이 보글보글 끓었다. 어서 주환의 혀를 헤집고 그의 가이딩을 끄집어 삼켜 보라고 온 세포가 아우성치는 듯했다.
나리는 손톱이 박힐 듯이 주먹을 쥐고 바르작거리며 들끓는 유혹을 힘겹게 억눌렀다.
“저어, 흐읍.”
“하아.”
무슨 말도 못 하게 주환은 나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나지막하게 터지는 그의 숨에서 화하고 단맛이 났다. 잘하지도 못하는 컨트롤을 억지로 하는 듯이 그의 미간이 깊게 팼다.
차라리 가이딩해 주지.
여태껏 은은하게 흘리던 가이딩을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끊는 걸까.
“하아. 박주환 소령님…….”
살짝 그의 혀가 떨어진 틈을 타 나리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 주환은 짙게 가라앉은 시선을 들어 눈을 맞췄다.
“실전도 아니고 여기서 갑자기 이러시면…….”
“리액션을 크게 하라며?”
“예?”
“예쁘다고.”
예뻐서 참기 힘들었어.
주환이 나리의 입가에 쪽 입을 맞추더니 씩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이러면 나리 씨는 아니라고 우겨도 난 지금 데이트하는 거라고 우길 수 있을 테니까.”
“…….”
나리는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주환을 째려보았다. 그를 탓하며 화를 내는 나리의 표정이 주환의 눈에는 앙큼해 보이기만 했다.
“나중에 데이트하는 것과 지금 하는 것이 뭐가 다른 건지 난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나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를 밀어낼 핑계를 찾지 못해 억울하기도 하고 원망스러운지 앙다문 입매가 물결 모양이 되었다.
“지금도 좋아서 얼굴이 빨간데.”
“……그, 그야! 에스퍼한테.”
“가이딩 안 썼습니다. 내 가이딩 때문에 좋아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제멋대로 설레지 말라고 제 심장을 말리고 쉴드를 꽁꽁 둘러서 가려 보아도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다 표가 났나 보다.
졌다.
둘러댈 말도 못 찾고, 그렇다고 주환을 밀어 내지도 못하는 나리는 제 눈앞에서 반들거리는 입술로 맛있는 숨만 내쉬는 커다란 가이드를 향해 툴툴거렸다.
“에잇, 그래요! 저, 되게 많이 설레었어요!”
풋.
“아까부터 감질나게 가이딩 흘리던 잘생기고 엉큼한 가이드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사람 민망하고 곤란하게 왜 하필 이런 공공장소에서 그러세요. 정말…….”
순간, 어쩔 줄 모르며 흔들리던 나리의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이며 주환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주환의 팔목을 잡으며 어빌리티를 끌어 올려 그의 팔을 풀었다.
“제가 정신 줄 놓으면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대환영이지.
주환은 웃으며 나리의 입술을 물었다.
삑.
누군가의 심박수가 한계에 다다른 소리가 났다.
가이딩 하나 없는 맛, 그리고 생생한 날것의 감촉, 머리를 뒤흔드는 습한 숨소리와 심박수. 나리는 휘몰아치는 감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도 느껴져?’
예?
‘난 네가 너무 생생해서 미칠 거 같은데.’
헉.
뇌리를 스치는 낮은 웃음소리에 나리는 화들짝 놀라 주환을 밀어냈다.
“이런 데서 미, 미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예?”
“음?”
“아니, 방금, 미칠 거 같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나리 씨는 미칠 정도였습니까?”
주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황한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나리는 제 이마를 짚고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주환과 비슷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자신의 이마와 눈썹을 간지럽히던 감촉은, 뭐였을까. 짧은 주환의 머리카락이 제 이마에 닿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꿈이라도 꾼 건가?
꿈이라고 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고, 잘못 들었다고 넘기기엔 소름 돋을 정도로 이상한 기시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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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따끔하게 손목을 찌르는 느낌에 일한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대체 언제 정신을 잃은 건지 기억조차 없었다.
주홍색 햇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며 빈 연회장을 가득 채울 뿐, 아무도 없었다. 빈 테이블과 의자는 깨끗하게 정돈됐지만, 일한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그의 서류 가방이 활짝 열려 소지품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앉았던 자리에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있다. 손을 움직여 더듬어 보니 수갑은 아니고 플라스틱 케이블이었다.
일어나면 알아서 끊고 가라는 거다. 일한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늘어지게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