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불필요한 감정은 일을 그르치니까
나리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주환은 너 하나, 나 하나, 식기를 따로따로 살 생각이었던 거 같은데, 저 혼자 같이 쓸 생각으로 식기 세트를 보고 있던 거 같아서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저쪽에 젊은 커플도 서로 팔짱을 끼고 알콩달콩 커플 머그잔을 보고 있었다.
“아아, 그럼…….”
주환이 풋 미소 지으며 화한 가이딩을 흘렸다. 나리가 움찔거리며 손을 떼려고 하자, 주환이 나리의 손을 붙잡아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나리 씨 리스트 중에 나랑 겹치는 것 있으면 같이 고르죠. 어차피, 같이 쓸 건데.”
“……!”
“난 아까부터 이게 더 깔끔하고 깨끗해 보이더라고. 이걸로 삽시다.”
주환은 박스 하나를 빼서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식기, 다음은 뭡니까?”
“커피……포트요…….”
“제 리스트에도 있습니다. 가죠.”
“아, 저기, 박, 박 소령님……. 소, 손 좀.”
손 좀 놔 달라고 했지만, 주환은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더 힘을 줬다.
나리는 쿵쾅쿵쾅 뛰는 가슴 때문에 머리털이 삐쭉 섰다.
이러면 당황스럽다.
데이트 한 번도 안 했는데, 데이트 몇백 번 한 동거하는 커플…… 같아 보이잖아. 그래서 몇 발짝 뒤로 떨어지려 했는데.
“조심.”
주환이 나리를 선반 쪽으로 밀어붙였다.
반대편에서 뚱뚱한 할머니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천천히 두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 뒤로 한 가족이 가득 쌓은 카트를 끌며 오고 있었다.
주환의 가슴에 이마를 콩 찧은 나리는 코와 피부로 확 와 닿는 주환의 향과 가이딩에 휘청거렸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네. 가까이 붙어요.”
손잡는 게 나았다.
주환이 어깨를 감싸 안는 바람에 손으로만 퍼지던 가이딩의 면적이 커져 버렸다. 심장은 속절없이 빨라지고 발끝부터 머리털 한 올까지 온몸이 움찔움찔했다.
위험해…….
이러다 공공장소에서 제정신이 홀랑 날아가게 생겼어. 안 돼. 정신 차려, 이나리.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지금 좀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나리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이를 지르물었다. 날뛰는 심장에서 일어나는 파장을 감추려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간지럽던 나리의 파장이 단단해지자, 주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음? 나리 씨 왜 쉴드 칩니까?”
“……위, 위, 위험하니까요…….”
“예?”
주환은 맥락을 잡지 못하고 심각한 얼굴로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 ❖ ❖
오찬이 진행될 연회장 내에는 각 부대의 고위급 가이드가 15명이나 있었다. 일반인까지 합하면 36명. 다들 못 올 줄 알았는데, 비공식 모임치고 규모가 컸다.
일한은 포켓에 넣었던 안경을 끼고 자신의 잘생김을 조금이나마 가려 보려고 했다.
“유 소령도 왔군? 오래간만이야. 요새 어떤가?”
얼굴이 명찰이라 조용히 앉아 있기도 힘들다.
“안녕하십니까? 이 준장님.”
일한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지나가던 사람 다 부나방처럼 몰려들어서 일한과 인사하기 시작했다.
몰려든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이 들은 소문을 나눴다.
“자네 그 말 들었나? 이번에 해군에서 소령 하나 가이드로 특이 발현 했다고.”
“소령이요? 해병대 우 상사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공태형 함장 밑에 있는 애.”
“그럼, 특이 발현 가이드가 둘입니까?”
“가이드뿐입니까? 저기 K 해상 기지는 특이 발현 에스퍼가 셋이래요! 남중국해 돌고 있는 잠수함에서도 1명 나왔고.”
“예? 이게 대체…….”
일한은 모른 척 잠자코 들으며 사람들의 눈을 살폈다. 일한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얼굴 옆으로 신상 정보와 함께 최근 행적이 올라왔다.
손목이 따끔했다. 회의장에 있는 누군가가 일한의 워치를 해킹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손목을 들어 워치를 본 일한은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황현균 대통령께서 오십니다. 모두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장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비서가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그가 찬 인이어에서 VIP의 동선이 흘러나오는지, 잠시 주춤하다가 문을 열었다.
동시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백발의 노인이 덩치가 산만 한 에스퍼의 경호를 받으며 회의장 내부로 입장했다. 모두 부동자세로 경례했다. 황현균 대통령, 23년 동안 독재 정치를 이어 가면서도 전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였다.
인자해 보이는 그의 눈이 맨 앞 좌측에 앉아 있는 일한에게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에도 떠야 할 인물의 신상 명세는 생일, 출신지, 가족 관계, 출신 학교 등 텅텅 비어 있었다.
Ko089138dqo…… 출처 추적 불가
CC009x102336…… 출처 추적 불가
일한에게 해킹을 시도한 이들의 역추적이 불가하다는 알림 위로 띵, 메시지가 울렸다.
[최강 대령은 요즘 잘 지내나?]
발신자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메시지였지만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일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황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으시죠. 격식 차리지 말라고 일부러 마련한 자리인데.”
사람 좋아 보이게 허허 웃고 있어도 최고 권력자라서 낼 수 있는 여유로운 농담이었다. 황 대통령은 제일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안부를 물으며 긴 인사를 나눴다.
[최 대령은 예전과 별다를 게 없습니다. 여전히 성격도 나쁘고 고집도 셉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황 대통령은 악수하던 손을 올려 서 있는 좌중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일한은 자리에 앉아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박주환 소령뿐만 아니라 특이 발현 이능력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황 대통령은 상석에 앉아 작지 않은 규모의 비공식 오찬 모임에 대해서 말했다.
“여러분께서 여태껏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공로와 수고를 치하하고,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화할 국내외 정세를 살펴 국가 정상화를 위해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황 대통령의 짧은 말이 끝나자 오찬이 시작되었다.
[최 대령이 예전과 다를 게 없다, 라…….]
일한은 메시지와 황 대통령을 동시에 보면서 쓰흐읍, 숨을 골랐다.
저 사람은 대역이다.
진짜 황 대통령은 이 연회장에 없었다. 어디선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최 대령도 뭔가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이러다 고인 물 되겠어.]
[제가 더 잘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자네는 잘하고 있지.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더 잘할 것인지부터 명확하다면 말이야.]
쳇.
일한은 입 안을 꾹 깨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고 해도 심장이 뜨끔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꼬리를 잘 흔들었던 개도 상부의 의심을 산 것이다. 수고를 치하하는 자리가 최후의 만찬이 될 수 있는 법. 도란도란 일한의 주위를 감싼 가벼운 웃음소리와 그에게 향하는 시선이 오히려 그를 따갑게 죄어 왔다.
[하하.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 봅니다. 늘 제 주제와 역할에 대해 명확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제가 물러날 때가 아니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그걸 똑바로 보여 줘야 알지.]
황 대통령이 답했다.
마치 그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을 증명하라는 듯이.
“……유 소령, 유일한 소령? 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습니까?”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가이드가 일한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일한이 고개를 들어 원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유일한 소령은 이제 나이가 어떻게 되나?”
“서른하나입니다.”
“딱 결혼하기 좋을 나이로구먼. 우리 딸이 말일세, 이제 딱 스물일곱인데…….”
“강 중령, 유 소령이 딴생각하는 이유가 자네 딸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러는 걸세. 자네 얼굴을 보면 딱 눈에 보이지 않나? 유일한 소령, 자네 이 사진 좀 보게. 예쁘지 않나?”
왼쪽 분과 달리 오른쪽 분은 사진까지 공유하며 들이댔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가이드가 픽 코웃음을 치더니, 일한에게 눈짓했다.
[유 소령님은 인기가 여전하십니다.]
인기 많아서 뭐 하나.
일한은 제 앞에서 놓인 애피타이저를 보는 척, 웃음기를 지웠다.
[군복 벗고 예쁘게 차려입고 가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유일한 소령님께 잘 보이고 싶은 분들이 이렇게도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아. 황 대통령은 전생에 중매쟁이셨나.
나리와 주환을 이어 주고, 강한테 SS급 가이드를 보내더니, 이번엔 자신 차례인가 보다.
일한은 한숨을 작게 내쉬다가 다시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쁘십니다.”
일한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가이드의 얼굴도 붉어지고, 딸 사진을 보여 준 중년의 남성도 껄껄거리며 활짝 웃었다. 일한이 웃으며 찬물을 끼얹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죄송하지만, 전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뭐?”
“응? 자네 부, 부친께서는 그런 말이 없던데…….”
다들 미어캣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제히 일한을 돌아보았다.
“봄 햇살처럼 따듯한 마음씨에 저절로 웃게 되고, 졸졸 따라오는 게 노란 병아리 같아서 지켜 주고 싶은데, 알고 보면 되게 강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좀 이따가 데이트도 가야 해서…….”
일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애피타이저를 쓱 밀었다.
“제 것도 드십시오.”
난 이 자리가 불편해서 입맛 떨어졌으니까.
일한은 싱긋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리고 상체를 젖혔다. 부드럽게 거절하는 바람에 다들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면서도 그 이상 묻지 못했다.
“하긴. 유일한 소령님 같은 분이 싱글인 게 말이 안 되죠. 축하드립니다.”
흥이 식은 떨떠름한 축하 인사가 툭 떨어졌다.
[유 소령과 이나리가 그런 사이일 줄은 몰랐군.]
일한의 대답을 들은 황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일한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일한에게는 최후이자 최선의 수였다. 나리를 견제하여 다른 곳으로 떨어트리려는 황 대통령의 수에 맞대응하려면 그가 자신을 얼마나 신임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자신을 믿는다면 제게 나리를 맡길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나리를 주환에게 보내라고 할 테니까.
[모르셨다니, 의외입니다.]
[유일한 소령.]
[예.]
[쓸데없이 나대지 말게.]
일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워치를 찬 손목이 꽉 죄면서 검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윽!
그가 당황하며 워치를 풀려고 하는 순간, 따끔한 바늘이 살을 찔렀다. 그리고 차가운 무언가가 핏줄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불필요한 감정은 일을 그르치니까.]
그 섬뜩한 한마디가 일한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양옆에 앉아서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허허 웃고 있던 남자 둘이 벌떡 일어나 일한의 팔을 잡아 그를 일으켰다.
황 대통령의 대역이 일한에게 다가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쪽지를 꺼내 일한의 재킷 속주머니에 넣고는 귓가에 또박또박 말했다.
“처신 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