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이건, 데이트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유 소령님, 그래도 저어, 외박은 좀…….]
한참 뒤에 온 나리의 답장을 본 일한은 책상에 기대서서 살포시 입꼬리를 당겼다.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고 있을 나리가 눈에 훤했다.
[그럼 6시 반으로 할까요?]
나리는 냉큼 6시 반으로 약속을 정했다.
[네. 6시 반!]
[좋아요. 그때 봐요. ^^]
일한은 오늘 하루 내내 그 시간을 기다리며 설렐 것이다. 눈앞의 처리해야 할 일들을 쓱 훑어보던 그는 침대 위에 올려 둔 검은 서류 케이스 안에 있는 권총과 나이프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흐음, 30분 일찍 와야 하네?”
일한은 뺨을 긁적거리며 장비들을 골랐다. 케이스를 들고나오자 강이 팔짱을 끼고 일한을 쏘아보고 있었다.
“30분 일찍, 왜?”
“아아, 그럴 일이 있습니다.”
일한이 생긋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나 어때?”
일한은 넥타이에 정장을 빼입은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뽐냈다.
“나 오늘 좀 괜찮지 않나? 잘생겨서 너무 눈에 띄나?”
“…….”
강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일한을 보다가 시선을 모로 돌렸다. 빼죽 나온 입술에서 “재수 없는 새끼.” 하고 쌀쌀맞은 칭찬 한마디가 툴툴 새어 나왔다. 일한은 낮게 웃으며 강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다녀오마. 형이 가서 윗분들께 자알 말하고 올 테니, 넌 새로 오는 인사과장한테 점수 좀 따 봐.”
강은 일한의 손을 쳐 내고 몸을 틀었다.
“일 크게 만들지 마라.”
“누가 할 소리?”
최강, 너나 잘하세요.
❖ ❖ ❖
빨리 장부터 봐야겠다.
커피 좀 마시고 싶었는데 커피는커녕 물 끓일 것도 없었다.
주환이 복무했던 배보다 낫지만, 페어 숙실에 달린 주방은 요리보다는 즉석식품을 데워 먹기에 적합해 보였다. 주방 캐비닛 안에는 나리가 가져온 짝이 다른 컵 2개, 텀블러 하나, 그리고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간단하게 데워 먹을 인스턴트 음식 몇 개가 한 칸에 다 들어갔는데도 공간이 텅텅 남아돈다.
끼익, 작은 문소리가 났다. 주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빨랫감을 안고 나온 나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주환은 잠긴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물었다.
“잘, 잤습니까? 몸은 좀 어떻습니까?”
나리는 멍하니 주환을 쓱 쳐다보았다. 왁스로 결을 낸 짧은 머리,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윤곽이 비치는 얇은 니트와 청바지를 입은 주환은 평범하고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생경한 사복 차림에 멍청하게 넋을 놓는 바람에, 나리는 그가 뭐라 했었는지 잠시 되새겨 봐야 했다.
“아, 어…… 네! 피, 피곤해서 그런지 꿈자리가 뒤숭숭했지만, 박 소령님 덕분에 5시간 이상 푹 잤습니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니, 설마 어젯밤 강 때문일까.
주환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꿈을 꿨습니까?”
나리는 입술을 쭉 내밀고 “으음.” 뜸 들이며 생각했다. 강이 내 멱살을 잡고 뭐라 뭐라 X랄을 하던데…….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분명 개꿈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리가 생긋 웃으며 명료하게 대답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 어젯밤은…….”
“근데, 박 소령님 오늘 외출하십니까? 모델이 서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언제 광고 홀로그램 켰나 했지 말입니다.”
나리와 동시에 입이 열리는 바람에 주환의 질문이 묻혀 버렸다. 또 하필이면 생글생글 웃는 입에서 나온 말이 아부성 칭찬이라 주환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주무르다가 아, 하고 나리에게 물었다.
“짐을 일주일 치만 챙겨 오는 바람에, 부대 밖에서 살 건 많은데 차가 없어서……. 이 중사 외출할 일이 있으면 같이 갈까, 했습니다.”
아아. 그렇지 않아도 살 것이 많았다. 주중에는 너무 피곤해서 쓰러져 자기만 했지, 숙실을 옮기고 나서 제대로 짐 정리도 못 했으니까.
“커피랑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나리는 미소 띤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바르르 떨리는 아래턱을 꽉 윗니에 붙이고 또박또박 사실 확인부터 했다.
“박 소령님, 이거…… 데이트, 입니까?”
“그야, 당연히…….”
당연히 데이트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주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리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환과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저……. 평범한 사복 입고 바이크는 무리……지 말입니다.”
주환과 맞춰 입으려면 가벼운 평상복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바이크를 몰 수가 없었다.
“큼! 예. 오늘은 장 보고 배만 채우는 거로 하죠.”
그걸 데이트라고 하는 건데, 두 사람은 장보고 밥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라 합의를 보았다.
❖ ❖ ❖
주환은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꾹 말고 바이크와 나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바이크라고 해서 평범한 이륜 전기차인 줄 알았는데, 시속 300km/h까지 단숨에 치고 달릴 수 있다는 짐승이었다. 검은 차체는 매끈한 무광택에 몸집도 컸다. 저 짐승과 한 세트로 바람막이와 안전성에 목적을 둔 라이더 슈트는 나리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서 위험하고도 아찔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나리는 입꼬리를 씩 끌어당기며 주환에게 헬멧을 건넸다.
“이 바이크, 차보다 더 비싼 것 아닙니까?”
“네. 페어 없는 에스퍼가 돈 아껴서 뭐 합니까? 짧고 굵게밖에 못 살 텐데, 하고 신세 한탄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통장이 마이너스였습니다. 하하핫.”
나리는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것과 달리 화끈했다. 그녀가 목깃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목깃에 접힌 플라스틱 부분이 펴지며 나리의 머리 전체를 감쌌다.
“하.”
주환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총기류에 돈을 펑펑 지르는 일한도 그렇고, 고급 바이크를 타는 나리도 그렇고, 이 말세에 적금 넣고 매일 투자 현황을 확인하며 내 집 마련 계획을 실행 중인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박 소령님, 수동 운전 해 본 적 있으십니까?”
“요즘에 수동 차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나리는 긴장한 주환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뒷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주환은 헬멧을 쓰고 바이크 위로 긴 다리 하나를 훌쩍 올렸다. 나리의 뒷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잡으니 기분이 묘했다.
“꽉 잡으셔야 할 겁니다?”
나리는 자신의 아랫배에 손을 올린 주환의 큼직한 손을 잡아당겨 핸들 위에 대고 제 손을 포갰다. 왼손에 클러치, 오른손으로 스로틀을 감아 쥐자 으르르 낮게 짖어 대던 바이크가 땅을 박차며 내달렸다.
주환이 “어어!” 하는 사이에 나리는 몸을 낮추고 더욱 속력을 올렸다. 주차장 입구가 재빠르게 열리고 부대 입구를 통제하는 헌병이 손을 크게 흔들며 감속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60km/h, 88km/h…… 102km/h…… 나리는 개의치 않고 헌병을 피해 바리케이드가 닫히기 전에 쏙 빠져나갔다.
이슬을 머금은 평화로운 아침이 우렁찬 배기음에 뒤흔들렸다. 바람이 상쾌하고 시원해야 하건만, 옷을 펄럭거리다 못해 옷감을 뚫고 살갗을 때리는 듯했다.
- 다음 코너 돌고 나서 속력 더 올릴까요?
헬멧 속에서 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지.
주환은 픽 웃으며 브레이크에 검지와 중지를 걸고 핸들을 꽉 그러쥐었다. 처음 수동 운전을 해 본다는 사람치고 빨리 배웠다. 어느새 기어도 그가 바꾸고 있었다.
- 재밌네요.
어려운 산악 코너를 돌고 난 주환이 짧은 감상을 말했다.
- 본가에서 차 가져오려고 했는데, 그냥 나도 바이크나 살까, 그런 충동이 듭니다.
- 예엡! 지르십시오!
신이 난 나리의 목소리에 주환이 풋 웃었다.
- 아. 그런데 나도 한 대 사면, 이렇게 같이 못 타는데…….
그의 혼잣말이 귀에 울리자 나리가 흠칫 몸을 굳혔다.
데이트 아니라며. 아니라고 했잖아!
운전하는 사람 정신 사납게 왜 갑자기 훅, 꼬시는 거냐고.
예민한 옆구리 잡지 말라고 주환의 두 손을 핸들에 올렸던 건데, 등 뒤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쿵쿵 울리는 주환의 가슴이 뜨겁게 느껴졌다.
- 돌아올 땐, 내가 운전해 봐도 됩니까?
나리는 입술을 깨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 네.
한 번도 남에게 빌려준 적 없고 처음 타는 초보자에게 자리를 내어 준 적도 없었는데, 차라리 뒤에 앉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나리였다.
❖ ❖ ❖
강은 숙실 창가에 서서 부대를 빠져나가는 나리와 주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리의 바이크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다가, 그들이 사라진 산길에서 부대 쪽으로 오는 검은 차들을 보고는 칫, 혀를 찼다.
“일찍도 왔군.”
반쯤 남은 커피는 식은 지 오래. 강은 일한이 정성스레 키우는 화초에 식은 커피를 쏟아 버리고 터벅터벅 주방으로 향했다.
강은 한국을 대표하는 에스퍼라고 하면 바로 떠올릴 사람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군부는 국가의 전투력을 홍보하듯이 잘생긴 SS급 에스퍼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사관 학교에 떠밀리듯이 들어가자마자 세계 곳곳에 파병 나갔었고, 악명 높았던 인도네시아 S급 균열의 몬스터 소탕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되고 싶지도 않던 신예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국위 선양한 공로로, 강은 사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위로 임관했다.
군부는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상명하복, 명령 복종은 군인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
그러나 군부는 앳되고 혈기 넘치는 강에게 복종해야 할 정당한 동기를 대지 못했다.
S급 균열을 소탕한 전적이 있는 그에게 몬스터 경계 전선을 지키며 정화 및 복구 작업만 하라니.
그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균열을 닫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엔 강의 인사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예산을 삭감했다.
그래도 강이었기 때문에 몬스터 경계 전선이 뚫릴 일은 없었다.
3대의 검은 차량이 줄이어 바리케이드와 검문소를 통과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왔다.
강은 차가 주차된 곳으로 순간 이동 했다.
홀연히 나타나 흉흉한 파장을 일으키는 강을 보고 맨 앞차가 ‘삑삑!’ 하고 클랙슨을 울렸다.
동시에 차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내렸고, 가운데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훌륭하신 분이 좌천당하셨나?
강은 미간을 구기며 팔짱을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