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네가 먼저 선 넘었잖아
하얀 목덜미만 물린 게 아니었다. 워치를 찬 손목 안쪽도, 헐떡거리며 오르내리는 가슴 둔덕 위에도 붉은 잇자국이 묻어 있었다.
주환이 나리의 목덜미를 쓸고 빗장뼈를 지나 가슴골 사이를 지분거리며 가이딩을 흘렸다.
“또 어디야. 여기 말고.”
나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 자신을 샅샅이 살피는 주환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달음박질치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부푼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시원하다 못해 뜨겁고, 뜨겁다가도 서늘한 감각이 피부 위에 덧씌워지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나리는 입을 막고 끅끅 넘어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다가 눈물로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흐, 가, 가이딩 좀…… 아파, 심장이…….”
주환이 뚝 멈췄다.
10년 동안 페어 없던 에스퍼였다. 제대로 된 가이딩도 못 받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그녀의 심장은 이런 자극에 약했다.
주환은 바르르 떠는 나리를 일으켜 안았다. 자그마한 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가이딩을 거두자 헐떡이던 숨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발갛게 양 뺨을 붉힌 나리는 주환의 어깨에 젖은 숨을 내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뜨겁고도 단단한 어깨에 그가 쓰는 샴푸 향과 시원시원한 가이딩 냄새가 섞이면서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후각적인 자극은 바로 허기로 이어졌다. 아무 필터를 거치지 않은 본능적인 욕구가 입 안에 감돌았다.
시원하고 맛있을 것 같은 냄새.
나리는 입 안을 훑은 혀를 내밀고 주환의 빗장뼈를 물었다.
“아.”
주환이 흠칫 몸을 굳히며 낮은 신음을 내는 사이, 나리는 그의 어깨를 밀어 넘어트렸다. 주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넘어지지 않게 팔꿈치로 받쳤다.
“나리 씨, 그……. 하아.”
조물주가 이 남자를 만들 때, 숨만 쉬어도 근육이 붙게 한 건가. 나리는 정교하고도 균형 있게 짜인 우람한 가슴을 지나 단단하고 불룩한 복근을 쓸며 입을 맞췄다.
제발.
째깍째깍, 느리게 흐르는 초침이 저기서 멈췄으면. 주환은 불 지펴진 충동을 참으려 애꿎은 이불만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틱.
야속한 시간이 흘러, 기상 알림이 시끄럽게 울렸다.
흠칫, 주환은 놀라 몸을 일으키는 나리를 붙잡았다.
집합까지 10분 전.
“박주환 소령님. 그, 아앗!”
“씻죠.”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는 없었다. 주환은 나리를 번쩍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 ❖ ❖
“훈병들도 시간 맞춰 딱딱, 나오는데, 정신이 없지? 너네.”
강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리와 주환을 째려보았다. 나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몸을 굳혔다.
“박주환, 넌 뭐야. 15분 전, 5분 전 칼같이 지키던 놈이 페어 생기니까 시간 개념이 없어?”
“죄송합니다.”
“페어가 네 애인이야? 아니면 전우야?”
“전우입니다.”
“전우, 맞아?”
강이 나리를 쏘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환은 주먹 쥔 손바닥 안에 손톱을 세우며 꽉 움켜쥐었다.
“넵, 전우 맞습니다!”
“전우답게, 박주환 소령 어깨에 둘러멘다. 실시.”
헐.
아무리 나리가 신체 강화 어빌리티를 가진 10년 짬밥 에스퍼라도 190cm가 넘는 거구의 주환을 어깨에 둘러메고 뛰는 건 고역이었다.
“시, 실시!”
그래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법.
나리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낮춰 주환의 무릎을 잡고 들쳐 제 어깨에 올렸다. 남자 어깨도 아니고, 자신보다 좁은 여자 어깨에 걸쳐진 주환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뛰어가.”
강의 명령에 나리는 어빌리티를 끌어 올리며 달렸다. 그 뒤를 강이 가볍게 따라붙었다.
“느려. 전력으로 안 뛰지?”
아으!
강의 한마디에 나리는 눈에 독기를 품고 뛰었다. 먼저 출발해서 연병장을 뛰고 있었던 훈병들을 따라잡자 모두 두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X발.
여기 10년 동안 짬밥 먹은 여군도 저렇게 되는구나.
“너네도 느리다. 지금부터 선착순. 뒤에서 20명은 페어 메고 5km 더 뛸 거다. 실시.”
감탄할 새가 없었다. 저 미친 짓을 또 하지 않으려면 가이드든 에스퍼든 전력으로 선착순 안에 들어야 했다. 머리 좋은 에스퍼들은 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제 가이드를 업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이나리, 너도 포함이야.”
아아아악! 미친!
유일한 소령니임! 대령님 좀 말려 줘요!
평지도 아니었다. 군장보다 2배는 무거울 사람을 이고 지고 뛰다 보니 하늘이 노랬다. 겨우겨우 선착순 안에 든 나리는 간만에 체력과 기운, 정신력까지 탈탈 소진한 채 흙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나리 중사, 괜찮아요?”
일한이 불쑥 나리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헤실거리며 괜찮다는 말이 나왔을 텐데, 쇠 맛 나는 마른 숨만 색색 새어 나왔다. 멀쩡한 일한의 우윳빛 얼굴이 별 이유도 없이 미울 정도로 힘들었다.
“잘했습니다. 역시 알파 특수 부대 대원답습니다.”
일한은 나리의 어깨를 토닥이고 얼굴 위에 젖은 수건을 대 주었다. 나리는 힘이 빠진 팔을 들어 수건으로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 입술을 축이고 나서야 겨우겨우 “감사합니다.”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리 옆에 있는 주환도 속이 안 좋은지 엎드린 채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일한은 그의 등을 팡팡 세게 내리치며 약을 올렸다.
“정신 차립시다. 박 소령. 이 정도 훈련, 해군 특수 작전 부대에서도 기본 아닙니까? 벌써 지치신 거 아니시죠?”
“……손 치우십시오.”
주환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일한을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다 이놈 때문인데 왜.
“눈빛 좋습니다.”
일한은 픽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헉헉대는 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아이고. 페어 다 죽어 가네. 뭐 합니까? 페어 안 챙깁니까? 음? 가이드라고 에스퍼 등짝에 매달려 있을 겁니까? 실전에서 내 에스퍼가 전투 불능 상태라고 두고 갈 겁니까? 가이드, 일어납니다. 자기 페어 챙깁니다. 실시.”
“시, 실시이!”
“저어기, 헬기장에 선착순 20명만 헬기 탈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살아남아 몬스터가 득실대는 산을 타고 복귀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오늘은 정말 게거품 무는 날인 듯했다.
선착순 20명. 즉 10등까지만 밥 주겠다는 말이었으니까.
악에 받친 복창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입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고 네발로 기어서 숙실로 돌아온 나리와 주환이었다. 둘이 숙실 신발장 앞에 널브러진 채로 앓는 소리만 내는데, 안에서 살기 띤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훈련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뭐가 있는 거야?
나리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좁은 거실에 서 있는 강을 올려다보았다.
“제 숙실인데, 왜 여기 계십니까?”
“왜, 여기 있으면 안 돼?”
“…….”
“…….”
안 된다고 하면 내일이 또 무섭고.
된다고 하면 잠을 못 잘 것 같고.
아아, 이건 지옥주 훈련인가?
일부러 잠 못 자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뭐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됩니다. 거기 계십시오.”
자포자기한 나리는 제 방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주환도 강을 날카롭게 쏘아보고는 몸을 일으켜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양쪽에서 샤워 소리가 났다. 저녁 점호가 울리고, 당직 사관이 이상 무, 확인하자마자 나리와 주환은 “주무십시오.” 한마디씩만 나눴다. 그러고는 강은 본체만체하고 방으로 들어가 소등했다.
서늘한 밤바람처럼 주환의 가이딩이 잔잔하게 흘렀다.
[강아, 네 방으로 와라.]
강은 일한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최강, 너 그렇게 하면 나리한테 미움만 받는다?]
[네가 먼저 선 넘었어.]
[어허. 그 무슨 말씀? 페어가 수술대에 올랐는데, 의리를 저버리고 나리랑 술 마시러 간 사람이 누구십니까?]
메시지 창을 홱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공간에 경계선을 그어 자신의 파장이 일한에게 닿지 않게 브레이크를 걸었더니 두통이 몰려왔다. 강은 머리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야, 강! 너 진짜! 이럴래? 파장을 끊어?]
낸들.
[그런다고 내가 못 갈 거 같아? 앞집인데, 그냥 문 따고 들어가 버린다?]
뭐라 하든지 말든지.
강은 여기서 밤을 버틸 생각이었다.
“대령님. 뭐 하신 겁니까?”
“……?”
나리의 말에 강이 눈을 떴다.
말끔하게 씻고 나온 애가 잘 개켜진 모포 이불을 들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이 파장 뭡니까? 제 방에 가지 말라는 겁니까?”
아, 씨…….
이 변수는 또 뭐란 말인가.
강의 심기를 안 건드리려고 발소리도 없이 오는 나리였다. 일한 때문에 나리가 제 반경에 들어온 것도 몰랐다.
공간 제어 어빌리티를 풀면 일한이 강의 파장을 잡아 언제든 이동할 것이고, 공간 제어 어빌리티를 안 풀면 나리가 제 방으로 갈 수가 없다.
나리는 불편한 표정으로 제 작은 거실에 금을 그어 버린 강의 파장을 흘긋 쳐다보았다. 금이 간 공간 안쪽은 주환의 가이딩이 끊어지고 강의 파장만 넘실거렸다.
강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분거리다 나리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내게 무슨 볼일 있냐는 듯이.
“전 새벽에 쌀쌀하니까 덮을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모포 담요 좀 가져온 건데 말입니다.”
나리는 손에 든 군용 모포를 강에게 내밀었다.
“…….”
강이 받지 않고 나리만 빤히 바라보고 있자, 나리는 그의 발치에 모포를 내려놓았다.
“용건은 이게 다입니다. 파장 좀 거둬 주십쇼.”
“안 돼. 유일한 녀석 때문에.”
저기요. 이건 또 뭔, 개똥 같은 소린지…….
나리는 똥 씹은 표정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최 대령님, 유일한 소령님은 다친 발목 개의치 않고 연구실에 감금된 대령님 구하려 뛰어다니고, 대령님 깨실 때까지 재수술도 미뤄서 회의도 가셨습니다. 그렇게 페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는 분인데 대령님은 대체…….”
나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손을 들었다 놨다.
“제 눈에는 대령님께서 제게 화풀이하고 계시는 거로 보입니다. 아무리 제 페어가 다른 에스퍼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최강 대령님이 애도 아니고 내게 이럴 분이 아니다, 내가 모르는 두 분 사이의 일이 있겠지,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요.”
정말, 피곤하다.
나리는 육체적으로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다.
강은 이마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나리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심장을 뻐근하게 짓눌렀다. 그는 제 발치에 놓인 모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로는 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면서, 못된 상관을 챙기는 눈치와 오지랖은 몸에 밴 거야? 대체 뭐야.
얘가 이럴 때마다 강은 흔들렸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길 몇 년째였던가.
그 빠릿빠릿한 눈치를 가지고도 어떻게 모를 수 있는 걸까.
10년간 쓴 파장 때문에 심장뿐만 아니라 뇌도 고장 난 거 아닐까.
강은 나리의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었다.
“……너만 모르는 게, 난 더 이해가 안 가.”
030. 얘가 괜히 집착광공이 아니야
“에? 저만 몰랐던 겁니까? 저 빼고 온 부대가 아는 일이었어요?”
강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 유일한 가이딩 안 받아. 걔가 누굴 좋아하든 내가 화풀이할 이유 없지. 난 필요도 없는데, 내가 원치 않는 놈을 페어로 붙인 게 누굴까? 왜 내가 연구소 저 밑바닥에 꽁꽁 묶여 갇혀 있어야 했는지, 넌 생각이 없지?”
“……?”
나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다시 반대쪽으로 갸웃거렸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엥?’, ‘어어어……?’, ‘잉?’, ‘에이’, ‘으음?’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뭔 생각을 하든 간에 나리는 그 질문의 정답을 맞히지 못할 것이다.
쯧, 이나리 머리는 언제쯤 고쳐지려나.
강은 모포를 몸에 두르고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야 나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최강 대령님. 저 정말 바본가 봐요. 모르겠어요.”
거봐.
못 맞히잖아.
“그러니까 음, 대령님과 유 소령님은 페어지만, 서로 썸씽이 없었다는 거죠? 최 대령님은 유 소령님의 가이딩을 받은 적이 없…… 없으시고요?”
“…….”
나리는 ‘이게 말이 돼?’, ‘아으으.’ 앓는 소릴 내며 이마를 툭툭 때렸다.
“유일한 소령님, 타국에서 온 연구소 간첩입니까? 아, 아니죠? 그것도 아니면……. 아,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으으!”
역시나, 헛짚기만 한다.
강은 가만히 나리가 어디까지 헛다리를 짚는지 보기로 했다.
“최 대령님께서 연구소 기밀 빼내셨습니까? 아니면 폭주……하셨습니까?”
“…….”
“최 대령님? 주무십니까? 사람 잔뜩 궁금하게 해 놓고?”
“……네가 여기서 자라고 모포까지 줬잖아.”
나리는 움찔거리더니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추우니까 덮고 있으랬지, 내가 언제 자고 가라고 했냐며 구시렁댄다.
“아니, 왜 그런지 말씀은 해 주시고, 저 파장도 걷고 난 뒤에 주무십시오.”
“내가 말해 준다고 알아?”
“와, 씨.”
“뭐?”
“아닙니다. 주무십시오.”
나리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나리.”
강은 나리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강을 흘긋 쳐다보다가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더.”
강의 낮은 목소리에 나리는 반걸음 앞으로 옮겼다.
“더.”
나리는 또 반의 반걸음 찔끔 움직이면서, 머리꼭지가 들리기 직전인 강과 최대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리의 손목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 정도 오라는 소리였어.”
그의 무릎 앞이었다.
강은 나리의 워치를 꽉 움켜쥐고, 나리의 뒷덜미를 잡아 내렸다. 나리는 뻣뻣하게 힘을 준 채로 강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강이 당황한 나리의 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리의 귓가에 말했다.
“내가 너 ……고 했잖아. 내가 말을 해도 넌 ……해서 못 알아들어.”
“에?”
찌이이이잉.
“아악!”
끔찍한 소음이 고막을 긁고 뇌를 관통했다. 나리는 비명을 지르며 강을 뿌리쳤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쉴드가 발산하며 제한된 공간 안에 있던 물건들을 밀어냈다. 그 바람에 강의 어깨를 감싼 모포도 허공으로 펄럭거리다 금이 간 경계선에 부딪치고, 떨어질 듯 나풀거리다 다시 보이지 않는 벽에 팡 부딪혔다.
강은 발작하듯 버둥거리는 나리의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그의 손에서 이는 강렬한 파장에 나리의 워치는 상태 이상 신호도 못 전송하고 오작동을 일으켰다. 강의 워치도 마찬가지였다.
강은 이를 사리물고 나리를 제 코앞까지 바싹 당겼다.
말로 못 알아들으면,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삼켜 똑똑히 알아차리게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긴 부대 안이었다.
“으윽!”
“다 ……으면 전부 다 ……할 것이지. 왜!”
“놔, 놔!”
나리는 깨질 듯한 머리를 쥐며 괴로워하다 정신을 잃고 풀썩 허물어졌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강도 파장을 거두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 하아, 후…….”
그리운 온기를 아주 잠깐, 몇 초만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군부의 눈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언제 또 정신을 잃은 채 끌려갈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끌려가면 다행이다.
그때처럼 나리가 끌려가면…….
오작동을 일으키던 기기들이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되며 윙윙 움직였다. 강은 천천히 쓰러진 나리를 바닥에 눕히고 모포를 덮어 주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쪽과 저쪽을 나눴던 경계선이 사라지자마자 강의 파장을 잡고 이동한 일한이 어질러진 거실과 쓰러진 나리를 보고 혀를 찼다. 격렬한 파장의 잔여물들이 허공 가득히 부유하고 있었다.
일한은 강을 거칠게 밀치고 쓰러진 나리를 부축해 안았다. 그녀의 워치를 살피고 목에 손을 대 맥박과 파장을 살핀 일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강, 적당히 좀 하지?”
“적당히가 어디 있어? 내가 뭔 말만 하면 바로 프로그램이 간섭하는데.”
“이거 벌써 상부에서 알아차렸을 거다.”
“오라고 해. 이젠 나도 안 참아.”
“강아.”
“캐낸 거 다 불어. 너도 이럴 줄 알고 놈들 캐고 있었잖아.”
“…….”
일한은 입을 꾹 다물고 강을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나리를 안아 들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강이 일한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침대 위에 나리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던 일한이 나리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가이딩을 흘렸다. 뒤죽박죽 엉킨 그녀의 머릿속을 보듬어 주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주다가 뒤에서 저를 쏘아보는 강을 째려보았다.
“지금은…… 가만 있자. 강아, 조금만 참자. 좀! 응?”
“저쪽은 벌써 SS급 가이드를 만들어 냈어.”
“알아.”
SS급 가이드뿐인가?
그보다 더 기가 막힌 특이 발현자, 박주환도 있다.
일한은 주먹을 말아 쥐고 제 이마를 짚었다.
“C9 구역까지 거미들이 내려온 거 보니까, C15 구역 몬스터들이 활개 쳐서 C11에서 C9까지 온 거 같아. 정찰대가 돌아오면 더 자세히 알겠지만, 나리랑 박주환 없으면 작전 세우기 까다로워.”
“…….”
“SS급 가이드 아직 어리잖아. 나 대신에 전투에 투입 못 해. 그 귀한 걸 함부로 안 쓸 거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일한도 자신 있게 확신할 수는 없었다. SS급 가이드가 황에덴 하나일지, 더 많을지 모를 일이다.
“괜히 나리 좀 건드리지 마.”
뭐?
강은 일한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었다. 비뚜름히 올라간 입매가 불편한 심기를 내뿜었고, 쌀쌀한 눈빛이 일한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툭, 인기척이 났다.
일한은 가이딩을 멈추고 강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온 주환을 돌아보았다. 강의 눈도 주환에게 향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듣고 있었는지 몰라도 주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강은 문가에 등을 기대어 시커먼 가이드 두 놈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가 먼저 건드렸잖아?”
미친.
“난 너네 멋대로 이나리 건드리라고 한 적 없는데?”
강의 이기적이고 오만한 태도에 욕이 절로 치솟았다. 주환과 일한이 나리가 언제 네 ‘것’이었냐고 멱살 잡고 따지려던 순간, 강은 살기등등한 파장을 내뿜으며 으르르 낮게 짖었다.
“내 거야. 쟤.”
와, 저 미친놈.
상종을 말아야지.
일한과 주환은 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 ❖
삐빗, 삐, 삐…….
나리는 부스스 일어나 머리맡에 놓인 알람을 껐다.
“하아암.”
아침부터 머리가 찌뿌둥했다. 손목 관절도 쑤시고 허리가 살살 아픈 것이 그날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날씨가 우중충한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창밖을 보며 하품하던 나리는 두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하며 근육통으로 무거운 몸을 풀었다.
숙사를 옮기고 난 뒤 맞는 첫 주말.
훈련이 없는 하루는 바쁜 주중에 미뤘던 일들로 바빴다.
“뭐야, 이거 언제 다쳤대?”
워치를 보려고 소매를 걷은 나리는 벌겋게 멍이 든 손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격투 훈련 하다가 다쳤던 걸까? 그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말이다.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주물러 보니 그다지 아프지는 않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리는 이를 닦으며 쌓인 빨랫감을 바구니에 넣고 못다 푼 짐을 정리했다.
[나리 중사, 좋은 아침입니다.]
일한의 메시지가 뿅,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
나리가 칫솔을 문 채로 답을 마저 쓰기도 전에, 다음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간밤에 잘 잤어요? 근육통은 괜찮고?]
[아, 그리고 전에 내가 밥 사 준다고 했잖아요. 그거 떼먹었다는 말 안 들으려고 하는데, 오늘 시간 좀 내줘요.]
오늘?
나리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나 머리를 뒤적거린 뒤, 답을 적었다.
[오늘 저녁에 말입니까?]
[네. ^^ 저녁 몇 시에 만날까요?]
앞에 눈웃음치는 이모티콘이 거울에 비치자, 바로 뒤에 일한이 있는 것 같아서 나리는 괜히 주변을 홱홱 돌아보았다. 좁은 화장실과 방 안에 아무도 없다. 주환이 주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뭘 하는 소리만 들렸다.
[저녁 6시 어떻습니까?]
[7시는 어때요?]
[7시는 너무 늦지 않습니까? 오늘 저녁 9시까지 부대 복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늦어지면 외박 끊죠. 뭐.]
헐, 외박?
툭.
턱이 멍하니 벌어지며,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리는 입 안 가득 거품을 문 채로 세면대를 잡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어, 어쩌지? 그냥 예전처럼 술친구로 하하 호호 웃으며 술과 안주를 나누는 자리가 아닌가 보다. 과감하게 자신의 이불 속으로 들어와 생글생글 웃음을 흘리며 모닝 키스를 하는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건 당연히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