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소민은 이 에스퍼를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10년간의 경험과 에스퍼 연구 리포트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자면.
“…….”
그의 파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소민 씨이…….”
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의 파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게 다였다.
소민은 태형을 부축하고 있는 주환에게 물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반병밖에 안 마시셨습니다.”
“…….”
소민이 싸늘하게 주환을 쳐다보았다. 주환은 태형을 지켜 주지 못하고 이실직고했다.
“그, 음, 위스키로…….”
“하아……. 박 소령님, 저기 던져 놓으십시오. 내일 아침에 처리하겠습니다.”
소민이 태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쌩하니 뒤돌아 가버리자, 남의 에스퍼를 숙사 앞까지 배달하러 온 가이드는 당황했다.
“저기…… 말입니까? 잠깐만, 윤 대위……?”
윤 대위, 저긴 화단이지 말입니다?
태형은 늘어지게 한숨을 쉬더니, 매정하게 돌아서는 소민을 비틀비틀 뒤따라갔다.
“함장님?”
태형이 손을 홱홱 내저으며 주환더러 가 보라고 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 그 자리에 서 있던 주환은 이내 제 머리를 세차게 털면서 돌아섰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뭔 힘이 난 건지, 태형은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는 소민을 붙잡고 와락 끌어안았다.
“놓으십시오.”
“…….”
“함장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가이딩 안 할 겁니다.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도 않고요.”
안 할 거라고 말해도 이미 그의 손에 잡히면 끝난 일이었다.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나는 간격이었다. 태형의 파장이 하필 그녀와 맞아서 그에게 닿는 순간 소민은 가이딩을 모조리 뺏길 수밖에 없었다. 소민은 덜덜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 자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파장에 휩쓸리지 않게 버텼다.
태형은 소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댔다.
“소민 씨, 나 아까 되게 찡한 말을 들었어……. 그 순간 최강 녀석이 엄청 부러웠어.”
“아, 예. 그러셨습니까.”
소민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소민 씨도, 나랑 같이 죽으면 안 돼?”
“예?”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인가?
시비 거는 거 같은데, 그게 뭐가 감동적이라는 거지?
소민은 뚱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리며 이 에스퍼를 어떻게 곱게 죽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최 대령님, 무사히 잘 도착했습니다.”
나리는 핸들을 놓고 강을 돌아보았다. 조수석에 앉아 “운전해.”라는 한마디만 남긴 강은 출발 때부터 도착할 때까지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술 취하면 더 모나고 예민하게 굴던 강이었다. 일한이 아니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던지라 나리는 함부로 잠자는 사자를 깨우는 객기를 부리지 않았다.
차가 움직이지 않는 걸 알 테니 곧 깨겠지. 깰 때까지 기다리자.
태형을 데려다주러 간 주환을 기다리기로 한 나리는 가만히 앉아 앞을 보다가 제 신경을 콕콕 찌르는 강을 흘끔거리기를 반복했다.
“…….”
긴 정적 속에 차의 모터 소리가 윙윙 울렸다.
소등한 부대 내의 숙사 건물은 캄캄하고 야전등만 이 깊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하아…….”
강이 나지막이 숨을 내쉬는 소리에 나리가 움찔거렸다.
“짜증 나.”
나리는 대꾸 없이 못 들은 척 굴었다. 괜히 워치를 보면서 일한이 깨어 있는지, 강을 데리러 나올 수 있는지 물었다.
[나 회복실. 다들 나 빼고 좋은 저녁을 먹었나 봅니다? 강이가 취했다니, 술도 정답게 나누고? 저 엄청 섭섭합니다. 한마디라도 남겨 주지.]
역시나, 불가능.
[죄송합니다, 유 소령님. 박 소령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쉬십시오.]
나리는 한숨을 작게 쉬고는 양어깨를 늘어트리고 카시트에 등을 푹 기댔다. 자는 줄 알았던 강이 눈을 뜨고 그녀를 불렀다.
“이나리.”
“네. 중사 이나리.”
“뭐 해. 운전 안 하고.”
“다 도착했습니다.”
“근데 왜 가만히 있어?”
강이 안전벨트를 풀고 나리 쪽으로 팔을 뻗어서 차의 전원을 껐다. 그러고는 그대로 우뚝 멈췄다.
술 한 잔도 안 마신 나리 입술에서 위스키 향이 났다.
“…….”
“……대령님?”
나리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강을 불렀다.
하아, 그가 가쁜 숨을 내쉬며 손을 더듬더니 운전석 문을 달칵 열었다.
“내려.”
“최 대령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내려.”
내가 너한테 뭔 짓을 하기 전에 가라고.
“……주스 사 놨습니다. 마시고 술 좀 깨십시오.”
컵 홀더에 놓은 주스 병을 가리키고 나리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깼으니 알아서 숙실로 이동하겠지 하고.
그런데 강은 운전석에 팔을 툭 떨어트리고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의 등과 어깨가 잘게 떨리는 듯했다. 차창 밖에서 그를 보고 있던 나리는 정말 괜찮은가 싶어 문을 두드렸다.
“이 중사.”
저만치서 터벅터벅 다가오는 주환이 나리를 불렀다. 걱정스럽게 강을 보고만 있던 나리가 몸을 돌렸다.
곁에 있었던 발걸음이 하나, 둘, 세 발짝 떼다가 이내 멀어졌다.
강은 카시트에 남은 온기를 움켜쥐고 이를 지르물었다.
너넨.
내일부터 죽었어.
강은 페어 시스템이고 뭐고 강력한 솔로 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 ❖ ❖
나리는 앞서 걷는 주환을 쳐다보았다. 숙사가 가까워지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닌 척 굴어 보려고 해도 긴장했는지 소화가 잘 안되었다.
차라리, 딴생각하자.
최 대령이 왜 그럴까, 뭐 그런 답 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나리는 바닥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주환의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그가 나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빨리 걸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아, 삑사리.
나리는 큼, 목을 가다듬고 주환에게 먼저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 정중한 예의를 멀뚱히 보던 주환은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흠칫. 나리가 뚝 멈춰서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물었다.
“손 안 잡을 겁니까?”
“아, 그…… 가이딩입니까?”
“예.”
헐.
나리는 빨개진 얼굴로 쭈뼛거렸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요동치는 파장을 따라 나리의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말렸다. 엄청나게 당황했나 보다. 주환은 웃음을 터트리며 나리의 손을 잡았다.
“이 중사, 안 잡아먹습니다. 오늘 하루 길지 않았습니까? 숙실 가면 빨리 짐 정리하고 푹 자요.”
“네에…….”
얼굴에 빤히 드러난 제 감정이 부끄러워서 나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소등 후 캄캄한 숙사 복도를 지나 어떻게 새 숙실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생체 확인과 본인 인증까지 끝나고 두꺼운 철문이 반짝 빛나며 열렸다. 은은한 전등불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렸다.
“주무십시오.”
주환은 그러쥔 나리의 손을 들어 손등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시원한 밤바람 같은 가이딩과 그의 온기가 그녀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현관에 놓은 그의 짐 가방을 들고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문이 잠기고 나서야 나리는 바짝 세웠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흐아아…….”
그대로 주환이 잡았던 손을 쥐고 흐느적거렸다. 심장이 콩콩 뛴다. 앞으로 매일매일 이럴 텐데, 어떻게 가이드에게 감정이 안 생길 수가 있겠어?
철컥. 쿵!
“와악!”
나리는 화들짝 놀라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조심스레 철문에 귀를 댔다. 육중한 철문 너머로도 전해지는 날이 선 파장에 따끔따끔하게 소름이 돋는 것이, 강이 숙실로 돌아온 모양이다.
나리는 아랫입술을 물고 끅끅 흐느끼며 문에 매달려 주르륵 미끄러졌다.
“어허엉. 난 몰라.”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나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 ❖ ❖
해상으로 돌아가기 전, 태형은 주환에게 명령했다.
“훈련이든, 작전이든 그날그날 상황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주환은 짧게 대답했다. 태형은 그의 어깨를 잡고 묵직하게 힘을 주었다.
“첫 페어라고 들뜨겠지만, 일은 일이야.”
서늘한 파장에 단단한 주환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UDT에서 받아야 할 훈련을 육군에서 받는 거니까, 저놈들에게 얕보이지 말고 1년간 죽기 살기로 하라고. 이 중사도 확실하게 잡아 놔.”
“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 ‘너’만 있는 거 아니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태형은 주환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대기하고 있는 군용 헬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소민과 해군 장교, 그리고 한다희 소령의 팀이 차례로 헬기에 올랐다.
로터 블레이드가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하늘 위로 멀어지는 헬기를 보면서 강은 오전 보고를 받았다.
[한다희 소령이 비공식 매칭 테스트를 받은 것 같습니다.]
강은 그 상대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강은 행정병에게서 전송된 사진 파일과 보고서를 읽다가, 픽 입꼬리를 올리며 주환을 흘긋 쳐다보았다.
[한 소령이 맡던 인사과장 자리에 누가 오는 거지?]
[후보군은 둘입니다만, 한 소령 밑에서 일하던 구 중위는 경험도 짧고 계급 때문에 적합하지 않고, 아무래도 타 부대에서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부에 연락해 봐.]
[네.]
강은 누가 인사과장이 되든 상관없이 조질 생각이었다. 제풀에 지쳐 군복을 벗거나, 한 소령처럼 제 살길을 궁리하겠지.
여기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보다 제 밑에 있는 부하와 등을 맡긴 동료가 감춘 의중이 더 위험하고 악한 법이다.
X같은 놈들을 상대하려면, 더 독한 X새끼가 돼야 살아남는다.
“그리고, 과장들 당장 회의실로 오라고 해.”
강은 사납게 벼린 이를 보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