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했던 거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웨이트리스가 마실 것부터 물었다.
나리와 함께 와인을 마시려고 했던 주환은 메뉴를 돌려주며 술은 됐다고 넘기려고 했다.
“칼빈 케스트 싱글몰트 스카치 한 병, 잔 2개 주십시오.”
강의 주문에 나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술 메뉴를 뺏어 들었다. 가격이야 비쌀 것을 예상했지만, 56.6% ABV라고?
“최 대령님? 이거 도수 너무 높은데요?”
“그러니까, 네가 운전하라고.”
“대령님 이거 마시고 죽으시려고요?”
“안 죽어.”
쟤가 죽겠지.
강은 흘긋 주환을 쏘아보고는 메뉴를 웨이트리스에게 넘겼다.
주환은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그가 에스퍼와 술을 마셔 본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술 배틀은 가이드가 훨씬 유리한데 말이다.
나리가 펄쩍 뛰면서 태형과 주환에게 강 좀 말려 보라고 돌아보았다.
“잔 하나 더 추가해 주시죠.”
하지만 한 잔만 마시겠다던 태형까지 가세했다. 상사 세 분 때문에 머리가 아파진 나리가 미간을 짚고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아니, 다들 내일 근무 안 하시려고 이러시는 건가?”
풋.
속으로 웃는다는 게, 티가 났을까. 주환은 강을 쓱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메뉴를 보았다. 물론, 메시지 창은 켜 놓은 채로.
태형은 턱을 괸 채로 맞은편에 앉은 나리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이나리 중사. 이번엔 내가 참고 넘어가 주는 건 알고 있나?”
나리는 퍼뜩 풀어진 자세를 고치고 태형에게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유 소령이 말했던 것처럼 자네 어빌리티가 해전에 유용한 어빌리티도 아니야. 박 소령이 받은 매칭 리스트 중에서도 A급 에스퍼는 이 중사 외에도 서넛 더 있었어.”
그래서 사무직을 제안받은 건가?
아무리 해전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그렇지, 쉴드 어빌리티가 사무 볼 어빌리티는 아닌데. 나름 유용하고, 중요하고…….
나리는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다음번엔 최강이 뭘 걸더라도 어림없어. 그 점 똑똑히 알아 둬.”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나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을 덧붙였다.
“그분들 중에서 공 대령님 어빌리티 5분 이상 버틸 A급 에스퍼는 없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리가 강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강은 고개도 까닥거리지 않고 눈만 들었다가 내렸다.
“최 대령님……. 저 유능한 부하라고 한마디만 거들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런 걸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봤지? 이 중사, 이런 애야. 내가 만만한 줄 알아. 골 때려.”
칫.
나리가 입을 삐죽거리자 주환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떨며 웃었다.
[아니! 소령님은 왜 웃으세요?]
귀여워서.
[윗분들 상대해 주신다면서요! 저 지금 SS/추가S급 에스퍼 대령님들 때문에 쉴드 펴고 밥 먹어야 할 판이에요!]
[아, 미안.]
주환은 목을 가다듬고 화제를 바꿨다.
“두 분 다 10년 동안 한 페어를 유지하고 있는데, 저희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
“하…….”
웬걸.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그 질문에 답하기 싫은지 강은 인상을 쓰며 주환을 째려보았고, 태형은 멍하니 넋을 놓고 허공을 쳐다보다가 차가운 한숨을 푹푹 쉬었다.
❖ ❖ ❖
“최강, 이 재수 없는 놈. 네 가이드, S급 가이드며언 다냐? 어? 왜! 왜, 우리 소민 씨 탓을 하는 건데! 나 하나 가이딩하면 되지, 그게 왜…… 뭐가 어때서어…….”
“…….”
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태형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밥맛 떨어졌다는 듯이 몇 숟갈 뜨지 않은 메인 디시를 옆으로 치웠다.
비싼 술 주문한 돈이 아깝게 강은 딱 한 잔 마셨다. 주환은 강의 권유를 마다하지 않고 몇 잔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혀가 꼬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병은 저 주정뱅이가 강 때문에 실연당한 거라면서 병나발을 부는 게 아닌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오겠다던 나리는 돌아오지 않고. 취한 것 같다고 바람 좀 쐬겠다던 주환도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것 같다.
“젠장.”
강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 휘청거리는 몸을 주체하려고 했다.
“최강, 너 어디 가려고오……!”
태형이 팔을 뻗어 강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어, 나랑 소민 씨 사이도 갈라놓고 어딜 가. 어? 우리 부함장 좀 가만 놔둬. 괜히 분위기 좋은 페어한테 가서 허튼짓하지 마라?”
“……취할 거면 곱게 취할 것이지.”
“쯧, 너나, 나나……. 참 답이 없다. 앉아. 한 잔 더 마셔.”
탁.
강은 태형이 건네는 술잔을 밀치고 으르르 이를 세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못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민한 청각은 계속 나리를 쫓고 있었다. 배시시 웃음기 섞인 나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릴 때마다 어지러워서 터질 것만 같았다.
독한 술이 넘어간 목구멍은 홧홧하지, 입 안은 타는 듯이 마르고 심장 부근은 지끈거렸다.
태형은 강을 위해 따른 술을 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난 이제 놔줘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생각해 보니까, 소민이는 나 때문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넌 안 그러냐? 너 때문에 걔가 좋을 게 뭐가 있다고.”
“…….”
“고생하다가 죽기밖에 더 하겠어……?”
앉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던 강이 나지막이 말했다.
“죽더라도, 같이 죽자고 했던 건…… 이나리였어.”
❖ ❖ ❖
밤바람이 뺨에 붙은 나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리는 레스토랑의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을 담은 강물과 바쁘게 오가는 차들의 불빛들을 보면서 주환을 기다렸다.
주환은 대충 말린 손을 털고, 소매를 바로 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갈까요?”
나리는 제 옆으로 다가온 주환을 돌아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얼음물을 건넸다.
“일단 속부터 챙기시지 말입니다.”
나리가 씩 웃으며 그에게 눈짓했다. 주환은 물 잔을 받아 마시며 그녀가 보고 있는 도시의 야경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리가 말했다.
“경치 좋죠? 이렇게 보면 참 현실감 없기도 해요. 몬스터들이 활개 치는 곳에서 잠깐만 나오면 이렇게 예쁜 곳도 있고.”
책 속의 세상이었다.
종이 한 장 너머는 이토록 화려하고 고요한 밤인데, 그 반대쪽에는 총소리와 화약 냄새, 몬스터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세계였다.
강 너머 전광판을 보면 시야 가득히 뉴스가 떴다.
오늘은 어느 몬스터 경계 구역의 치열한 전투로 누군가가 희생됐고, 어느 복구 지역이 열려서 이주민을 받기 시작했고, 이능력자 연구소에서 새로운 변이 몬스터를 발견했다는 등등 소설 속에서는 읽은 적 없던 주인공들 외의 삶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아프고 힘들고, 모든 것이 이토록 생생한데, 가끔 이게 실화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주환도 동감했다.
“그래도 이 세상 어느 한 부분이라도 평화로운 것이 낫지 않습니까? 지킬 것이 있다는 동기가 생기고, 언젠가 은퇴해서 저곳으로 돌아갈 거라는 장래 계획도 세울 수 있고.”
“음, 저쪽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돌아간다 해도 행복할지…… 전 잘 모르겠어요.”
10년이 흘렀다.
나리는 원래대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도 사라지고, 비현실이라 생각했던 곳을 내 현실로 받아들이고 눌러앉았다.
그랬더니 ‘원래대로’가 어떤 곳이었는지 희미했다. ‘10년? 10년이나 흘렀어?’ 하고 놀랄 만큼 시간 감각도 너무 빠르게만 느껴졌다.
“저기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행복할 때도 있고 안 행복할 때도 있겠죠.”
나리가 주환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적응 못 할 거 같아서요. 저기에서 내 어빌리티로 뭘 해 먹고 살까, 과연 평범한 일반인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아아.”
에스퍼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몇 달 전만 해도 일반 군인이었던 주환은 생각해 본 적 없던 고민이었다.
나리가 배시시 웃으며 주환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보면 예뻐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그렇죠?”
1년을 더 벌었다.
저 야경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훗날은 모르겠으나, 이 순간만큼은 기쁘고 설레는 일이었다.
응.
주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리의 미소 가까이 다가갔다. 이 입맞춤이 가이딩이라는 고지는 없었다. 깊고 진한 오크 향과 함께 부드럽고 단 입술이 닿고, 혀끝이 조심스럽게 나리의 입술을 벌렸다.
네가 나한테 살짝 입 맞췄을 때부터 줄곧 이 생각뿐이었다고. 아니, 그 전부터, 계속.
나리는 눈을 감고 한참 제 혀끝에 닿는 감각들을 새겼다. 주환의 입 안에 남은 감미롭고도 깊은 위스키 맛에 스르륵 취할 것만 같았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가이딩도 좋았다.
나리가 풀어진 입꼬리를 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박주환 소령님. 내게 남아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