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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25)화 (2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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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에스퍼끼리 밥 먹기 너무 힘들다

부대 내외를 통틀어 이 외진 곳에서 식당이라고는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같이 먹는 병영 식당에서 외부 손님을, 그것도 대령님의 저녁 식사를 대접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리는 슬쩍 주환을 쳐다보고 다시 태형에게 말했다.

“저, 병영 식당에서 대령님과 같이 저녁을 먹기엔 좀 그렇고, 부대 밖으로 나가려면 꽤 멀리 가야 하는데……. 박주환 소령님까지 태울 수가 없습니다.”

“……?”

나리는 주머니에 있는 키를 꺼냈다.

“바이크라서요. 한 사람밖에 못 태웁니다.”

“…….”

“공 대령님과 저, 단둘이 저녁 먹자는 말씀이 아니시면 유 소령님께 차 좀 빌려 오겠습니다.”

하, 태형은 픽 입꼬리를 올리며 주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 못된 부하 놈을 떨어트려 놓고 갈까 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3분 이내로 와.”

“넵!”

나리는 불편한 구두를 벗어 손에 쥐고 후다닥 뛰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주환보다 나았다.

나리는 아랫입술을 꽉 물고 전력으로 뛰면서 워치를 두드렸다.

‘유 소령님, 유 소령님, 유일한 소령님! S.O.S!’

벌써 재수술 받으러 병동으로 가셨나? 일한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 나리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눈이 팽그르르 돌았다.

“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맨발로 숙사 복도를 펄쩍펄쩍 뛰던 나리는 일한의 숙실 문을 두드렸다.

“최강 대령님!”

나중에 죽더라도 일단 살고 보자.

나리는 천국과 지옥의 문을 두드리며 대마왕을 불렀다.

“뭐야. 이 중사.”

그리고 소환된 대마왕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대령님! 차, 차 키 좀요!”

“뭐?”

“아니, 아니다. 저랑 같이 좀 가요!”

“어딜.”

“밥 먹으러요!”

최종 보스를 혼자 상대할 수는 없는 법. 나리는 기꺼이 제 영혼을 팔기로 했다.

❖ ❖ ❖

“이나리.”

“네…….”

“내가 네 운전병이야?”

강의 쌀쌀한 말에 나리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구겨진 치마 위에 두 주먹을 쥐고 있다가 방긋 웃으며 운전석에 앉은 강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운전하겠습…….”

“됐고. 어디로 갈 건데? 예약은 해 놨어?”

“아니요. 지금 해야죠.”

하하하.

그럴 새가 없었다니까요?

나리는 뒷좌석에 앉은 태형과 주환을 돌아보았다.

“공 대령님, 박 소령님.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오?”

“…….”

“…….”

“양식? 한식? 중식? 육식? 하하, 하…….”

두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답도 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강이 대시보드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그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 연락했다.

- 안녕하십니까. 최강 고객님. 레스토랑 ‘Whiskey Barrel’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4명 예약 가능합니까? 7시 반. 프라이빗 룸으로.”

- 예. 가능합니다. 7시 반, 네 분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최 대령님?

그렇게 일방적으로 식당을 잡으면, 손님들께 선택지를 준 저는 어떻게 됩니까?

나리가 두 눈에 힘주어 강의 옆모습을 보며 따지자 강이 나리를 흘긋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가는 데는 내 입맛에 안 맞아.”

“…….”

눼에눼에. 그러시겠죠.

하아, 입맛 까다로운 사람을 데려온 죄가 크다. 나리는 부들부들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콧구멍으로 숨을 조절했다.

미치겠다.

이 분위기 어쩔?

SS급 에스퍼와 S급 에스퍼, 자신까지 합쳐서 A급 이상의 에스퍼가 셋인데, 제 페어는 이제 막 가이드가 된 1개월짜리 신생아다.

이 예민한 인간들을 데리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냔 말이지?

나리는 미간을 쥐고 끄응 신음을 삼켰다.

“최강, 너는 왜 오는 거야.”

태형이 벌써 입맛 떨어졌다는 투로 강의 뒤통수에 대고 인상을 구겼다. 강의 차를 타고 밥 먹으러 가는 줄 알았으면 안 왔다.

강은 백미러로 뒷좌석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네 녀석을 말이다.

“…….”

태형은 턱을 괸 채로 픽 입꼬리를 올렸다.

“믿을 놈 하나 없는데, 누구한테 내 걸 빌려줘?”

“거참, 영광이군. 불신을 단단히 샀는데도 최강 대령님이 날 이리 후하게 대접할 줄은 몰랐어.”

“알면 됐어.”

“꽤 궁금한데 말이야. 훈련장 새로 지어 달라고 떼쓰더니, 네가 왜 그걸 다 물리면서 쓸개까지 내주나 하고.”

태형은 나리가 강의 속내를 알까, 슬쩍 떠보기로 했다.

“이 중사 생각은 어때?”

“네?”

나리는 고급스럽고 안락한 조수석에 등도 못 기대고 딱딱한 자세로 앉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 대령 밑에서 오래 일해 봤으니 알 거 아닌가? 최 대령이 왜 저러는지.”

나리도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지 가만히 강을 돌아보았다. 앞만 보며 운전하고 있던 강은 한쪽 팔을 창가에 걸치고 손끝을 깨물다가 흥 코웃음을 쳤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강의 속을 알아야 하나? 군인이 상부에서 까라면 그냥 까는 거지.

“최 대령님께서 생각이 다 있으시니 한 결정이겠지요. 전 상관의 의도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리의 말에 강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생각 없이 사는 게 이 중사답긴 해.”

“하하하…….”

나리는 이마의 핏대를 세우고 애써 웃었다.

“앞으로는 생각 좀 하고 살아. 내 속도 좀 헤아려 보고.”

“생각해 보니, 제가 없으면 괴롭힐 사람이 없어 그러신 것 같습니다.”

“내가 애야? 너 괴롭히려고 손익 못 따지고, 할 일 없어서 여기서 한가하게 운전하고 있게?”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아주 유능한 에스퍼이긴 합니다.”

뻔뻔한 얼굴로 맹랑하게 되받아치는 나리였다.

“…….”

태형은 주환을 돌아보았다. ‘네 페어 왜 저러냐?’, ‘저 여자, 최강이 저 좋아하는 거 정말 몰라?’ 하는 뜻을 반반씩 섞어서.

주환은 창밖을 보며 한숨만 늘어지게 쉬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었다.

❖ ❖ ❖

몬스터 경계 구역에서 멀어져 안전 지역에 들어오자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반짝거리는 야경이 펼쳐졌다. 높은 건물과 거리를 메운 사람들, 오래간만에 보는 일상 풍경에 나리는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강은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웠다. 대리 주차를 맡는 직원이 나와 에스코트까지 해 주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곳이었다.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가기 전, 주환이 나리의 팔을 살짝 잡아 귓속말했다.

“메시지 확인 좀.”

그렇게 스치듯 한마디 내뱉고 태형의 뒤를 따랐다.

아, 메시지?

나리는 일행의 맨 뒤에 서서 워치를 확인했다.

[이 중사, 조금만 마시십시오. 공 대령님 오늘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가 상대할 테니, 시간 봐서 우린 따로 나가죠.]

“…….”

나리는 주환의 뒷모습을 보고 풋 미소를 지었다.

큼!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나리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문지르며 빠르게 메시지를 적었다.

[최 대령님 차 빌려서 억지로 모시고 온 건데, 후일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미 눈 밖에 나서.]

[박 소령님 용감하십니다. 두 대령님들 모시고 날름 튈 생각 하고.]

[기껏 여기까지 나왔는데, 외출 받으려면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앗. 그건 그렇네요.]

메뉴를 들여다보는 중에도 뭘 시켜야 하는 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리가 메뉴만 들여다보며 시시덕거리고 있자 옆에 있던 강이 메뉴를 뺏었다.

“술꾼 아니랄까 봐. 술 메뉴만 뚫어지게 보고 있어?”

아, 술 메뉴였구나.

나리는 딴짓 안 한 것처럼 시치미를 떼더니 태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태형 대령님. 분위기도 좋은 곳인데, 와인 어떻습니까?”

태형은 와인과 원수진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위스키, 얼음 없이 스트레이트 샷으로. 박 소령도 시켜.”

주환이 메뉴 너머로 나리를 흘긋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살짝 들린 나리의 입꼬리에 시선을 두다가 잘 마셔 본 적 없는 와인을 시켰다.

“그럼 전……. 레드 와인으로 하겠습니다.”

“앗, 그럼 저도.”

“넌 마시지 마.”

나리가 웃는 얼굴로 입을 떼기도 전에 강이 저지했다.

“아, 왜요?”

“내가 취하면 네가 운전해야 하니까.”

“…….”

나리가 못마땅한 눈으로 강을 돌아보자, 강이 턱을 들고 비스듬히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누가 운전해? 저 둘은 길도 잘 모를 테고.”

“차주이신 대령님께서 안 마시는 선택 사항은 고려 안 하십니까?”

“어.”

“대리운전도요? 자동 귀가 시스템도요?”

“몬스터 경계 지역까지 누가 대리운전을 해 줘? 복귀하는 중에 뭐라도 튀어나오면?”

아, 진짜 짜증 나!

술도 못 마시면서 왜 오늘은 술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거지?

간만의 외출인데, 진짜 분위기 좋고 비싼 레스토랑까지 와서 알코올로 입도 못 헹구다니! 확, 도망갈 테다.

나리는 머뭇거리던 마음을 굳히고 주환과의 2차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강은 메뉴를 보다 말고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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