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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24)화 (2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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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최강 대령님 때문입니까?

태형은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서 바깥 노을을 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깎이고 그을려서 휑한 구석이 있는 숲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깜박거리는 빨간색 전선. 저 너머는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균열 구역이었다.

똑똑.

소민이 왔는지 문을 두드렸다. 그냥 들어와도 되는데. 페어가 된 지 10년이 되어도 소민은 철저하게 태형을 모셔야 할 상관으로만 대했다.

“함장님, 회의 시간입니다.”

태형은 고개를 돌려서 소민을 느른하게 쳐다보았다. 제 페어의 파장을 본 소민의 표정이 굳었다. 곤란한지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5분만 해 드릴 겁니다.”

소민이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5분은 너무 부족하지.”

“손 주십시오.”

“세상에, 손만 잡고 5분? 실화야?”

태형이 말도 안 된다고 따지며 제게 가까이 다가온 소민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손만 잡을 거면, 왜 문을 잠갔어?”

“함장님 버릇이 대체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습니다.”

소민은 태형의 깨진 안경을 벗기고 상처 난 뺨을 쓸었다. 차다. 매번 이렇게 차갑게 식어서 오는 제 에스퍼가 못마땅했다. 소민이 태형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빌리티로 얼어 버린 것은 입김을 불어도 녹지 않는다. 가이딩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빌리티 쓰고 난 뒤엔 따뜻한 물에 몸 좀 녹이십시오. 차가워서 만지기 싫다고 했잖아.”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는 거야.

“난 네 몸으로 녹이는 게 좋아.”

“읏.”

태형은 제 손을 소민의 옷 속에 넣어 등골을 쓸었다. 소민은 그의 상의를 벗기다 말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사나운 파장이 저를 따뜻하게 달래 주라고 소민의 가이딩을 강하게 빨아 당겼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소민은 두 눈을 감고 덜덜 떨었다. 태형은 가여운 제 가이드를 더 꼭 끌어안았다.

S급 에스퍼의 파장은 C급 가이드에게 너무나도 벅찼다.

띵.

[함장님. 오고 계십니까?]

태형은 주환의 메시지를 보고도 무시했다.

띵.

[유일한 소령의 수가 상당히 곤란합니다. 나빠서 곤란한 게 아니라……. 회의 시간을 잠깐 뒤로 미루고 대책을 세워야 할 거 같습니다.]

대책?

태형은 빙그레 입매를 당기면서 소민의 맨어깨를 베어 물었다.

띵.

[함장님? 이러다가 저희가 말려듭니다.]

띵.

[제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띵.

[어디 계십니까?]

“아, 정말…….”

태형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동동 떠다니며 성가시게 구는 메시지 창을 꺼 버리고 통화를 눌렀다.

“……하, 함장님!”

소민이 제 입을 틀어막고 얼른 일어났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태형은 소민의 작은 손을 잡아당겨 제 심장 위에 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부함장, 왜 이리 눈치가 없어? 내가 답이 없으면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구나, 해. 그리고 우리가 말려들긴 뭘 말려들어? 네가 이나리 에스퍼한테 분위기 있게 다가가서, 나 따라 해군 오라고 그윽하게 어필하면 끝나는, 쉬운 일이야.”

- 그게, 쉽지 않습니다.

“?”

- 그 사람, 가이딩에 전혀 연연하지 않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소리야. 세상에 그런 에스퍼가 어디 있어? 너, 손만 잡고 그런 소리 하는 거면…….”

- 그, 그렇다고! 회의 5분 전에 어떻게 사람을 덮칩니까! 저 그런 짓은 못 합니다!

“왜 못 해. 난 하고 있는데?”

- …….

뚝.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기자마자 소민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태형의 어깨를 확 밀어 버렸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옷을 주섬주섬 주워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쾅!

“소민 씨?”

태형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가 뭘 잘못한 건가, 곱씹어 보았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귀를 축 늘어트리고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제 가이드를 달래야 했다.

❖ ❖ ❖

주환은 태형의 전화를 끊고 텅 빈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회의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도, 회의실에 있는 사람은 주환뿐이었다.

복도를 서성이고 있을 때, 정복으로 갈아입은 나리가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여느 때처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모습이 아니었다. 긴 생머리에 군모를 쓰고 옅은 화장기도 있는 얼굴, 구두에 치마까지 입은 건 또 딴 사람 같아서 주환은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나리가 씩 웃는다.

“저 낯선 사람 보듯 하지 마십쇼. 중요한 회의 자리, 아닙니까. 박 소령님만 멋진 제복 있는 거 아닙니다?”

“아, 네. 잘 어울립니다. 치마.”

“박 소령님 되게 좋아하신다. 이번에 받은 월급, 다 치마랑 원피스로 질러야겠습니다.”

나리가 살포시 웃으면서 회의실 문을 열다가 말고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박주환 소령님.”

“예.”

“제가 회의 시간에, 소령님께 섭섭한 말 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무슨 말인지 지금 말하십시오.”

“저 여기 남으려고요.”

예상했던 말이었다.

“차마 육군 중사가 해군의 주요 병력이신 부함장님께 여기 남아 달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옆에 남아 주신다면 이깟 치마 맨날 입어 드립니다.”

주환이 주먹 쥔 손을 들어서 제 입을 막고 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태껏 들었던 제안 중에 거기에 제일 혹한 거 아십니까?”

“와. 박 소령님이 치맛바람에 넘어오는 남자인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제 옷장 탈탈 털어서 치마는, 육군 정복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내가 몇 벌이든 사 줄게.

하마터면 그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왜, 인지 물어도 됩니까?”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할 질문은 아니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살기 위해 꼭 의존해야 할 존재이지만, 가이드에게 에스퍼는 일감일 뿐이니까.

대개 에스퍼들이 가이드가 속한 곳으로 이동했다. 가이드가 많은 부대일수록 에스퍼 수는 배로 차이가 난다.

A급 가이드 한 명이 담당해야 하는 에스퍼 숫자는 A급 공격대, 그리고 B급/C급 소대. 그 많은 병력을 두고 페어가 될 A급 에스퍼 하나 때문에 육군에 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저 책임감과 사명감 있는 군인이거든요. 죽더라도 10년간 정든 사람들이랑 같이 싸우다 죽지, 나 혼자 편안하게 사무나 볼 성격이 아닙니다.”

“아……. 그때, 제가 했던 말은…….”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성격 나쁜 상관 밑에서 오래 일해서 그런가, 제가 그런 건 쉽게 잘 잊습니다.”

주환은 팔을 뻗어 문을 짚고 나리의 눈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최강 대령님 때문입니까.”

차라리 일한 때문이라고 하면 가이딩 때문이라고 치고 밀어붙였을 텐데. 가이딩에 연연하지 않는 나리를 봤기에 제 앞에서 무심코 내뱉는 핑계는 다 강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작게 툴툴거렸다.

“예? 제가 왜! ……최 대령님 때문에 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나한테 오십쇼.”

“…….”

나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그윽하게 쳐다보고 말한다고 제게 오겠다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태형에게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두 번 차일 걸 알면서도 주환은 나리를 잡았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주환의 향과 심장 소리에 나리는 저절로 화한 가이딩을 떠올렸다.

손끝을 오므리고 힘을 줘서 그에게로 기울어지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여태껏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기만 하던 나리가 몸을 돌려 문에 등을 기대더니, 주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박 소령님…….”

나리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주환이 먼저 말했다.

“페어 없는 에스퍼, 얼마 못 삽니다.”

“알아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알아요.”

“난…… 이나리 중사랑 페어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리가 발끝을 들어 주환의 입술에 제 입을 살짝 맞추고 말했다.

“그러니까, 소령님이 오세요.”

철컥, 등 뒤에 있던 문의 잠금이 풀렸다.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리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쳤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언제 빈 회의실로 이동했던 건지 강이 나리의 등을 받치며 주환을 쏘아보았다. 형형하게 날이 선 눈빛이 주환의 깊은 눈동자에 몇 초, 짧게 맞서다가 평소처럼 서늘하게 돌아섰다.

“앉아.”

강이 앉아 있었던 자리 옆에 일한이 앉아 있었다. 나리는 입술을 꾹 물고 일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

주환은 손끝을 들어 제 입술 위를 스친 감각을 더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 ❖

주환과 나리 페어 등록을 앞두고 둘이 어느 군으로 소속을 옮겨야 하는지, 둘의 입장은 첨예하게 맞부딪혔다.

“최 대령, 말이 되는 소릴 좀 하시죠. 박주환 소령, A급 가이드이기 전에 동백11 전투함 부함장이야. 지금도 나랑 해상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야.”

“이 중사 쉴드, 아무리 크게 펴도 2급 전투함 하나밖에 커버 못 합니다. 크게 펼수록 유지 시간도 짧습니다. 박 소령이 가이딩해도 3분이 채 안 될 거 같은데, 효율 면에서 육군에 남는 게 더 낫습니다.”

태형의 반발에 일한이 논리적인 근거를 제기했다.

“지금 해군에 A급 가이드가 절실하다는 것 압니다. 그러니까 저희 측 제안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해군에 나쁜 조건 아닙니다.”

일한은 주환에게 제안했던 방안을 태형에게 내밀었다.

1년간, A급 가이드 교환.

그동안 박주환 소령의 소속은 그대로 해군으로 유지하며 페어 훈련과 실전 연수차 1년간 육군에 머문다. 해당 비용은 육군에서 지원한다.

육군에서 A급 가이드, 한다희 소령과 그녀의 페어 A급 물질계 에스퍼, 서기준 소령 및 B급 에스퍼 분대가 해군으로 1년간 이동하여 해군의 전력 정비를 돕는다.

“솔직히, 지금 해군에서 박주환 소령 제대로 훈련할 가이드가 누가 있습니까?”

일한이 소민에게 물었다. 소민은 가만히 두 손을 힘주어 쥐었다.

24. 페어(Pair)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유일한 녀석에게 보기 좋게 말려들었다. 태형은 이를 마다할 명분을 댈 수가 없었다. 박주환, 본인이 싫다고 거부해야 하는데, 주환도 싫다고 하기 곤란했다.

강이 태형 가까이 상체를 당겼다.

“공태형 대령. 박주환 소령이 문제 일으켜서 피해 보상 청구한 거, 못 봤습니까? 나야 훈련장 하나 날린 거로 끝났지만, 어설프게 훈련한 쟤가 거기서 문제 일으키면 군함 한 척 수장하는 겁니다.”

“…….”

“해군 측 가이드 중에 쟤 똑바로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해병대 UDT 쪽으로 가는 거나, 육군 특수 부대 쪽으로 가는 거나 훈련 내용은 비슷할 테고.”

해군 측의 가이드 중 A급 이상은 없었다. 해전 특성상 트룹 가이딩을 전문으로 하는 가이드도 없고, 강의 말대로 페어 훈련은 해병대 쪽에서 할 계획이었다.

강은 쐐기를 박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 있으면 데려가 봐. 물론 우리 훈련장은 새로 지어 주고.”

“…….”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주환과 소민을 쳐다보았다. 소민은 두 눈을 제 무릎에 두고 질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똑, 똑, 손가락 끝을 두드리며 생각하던 태형이 주환에게 물었다.

“박주환 소령. 어떻게 할래?”

모두 주환을 주목했다.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의 내내 조용했던 주환이 고개를 들었다.

“남아서, 연수받겠습니다.”

❖ ❖ ❖

“축하드립니다. 박주환 소령님, 이나리 중사님, 두 분 페어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리는 새로 받은 워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외형은 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액정을 톡 건드리면 주환의 위치와 바이털이 표시되었다.

“저, 그러면 숙사는 언제 옮깁니까?”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이용 가능한 숙실이…….”

주환의 물음에 페어 담당 행정관이 부대 내 남은 숙실을 검색했다.

아, 맞다. 정식 등록을 마친 페어니까, 숙실을 같이 써야 하는구나.

헐.

나리는 머리가 띵했다. 주환과 페어로 훈련하면서 나중 일을 생각했었지만, 정말 주환이 여기에 남겠다고 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방 2개인 숙실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로 하실 건가요?”

행정관이 묻자 주환이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리에게 향하고, 나리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두, 두 개? 아니면, 하나?

어어얽…….

나리는 멍하니 정지된 뇌와 사물놀이를 시작한 오장육부 덕에 선뜻 선택을 하지 못했다.

“아, 저어, 그, 그럼…….”

나리가 머리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주환은 픽 웃으면서 행정관에게 물었다.

“방 하나인 숙실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하, 하나?

행정관이 페어 A동 숙사와 B동 숙사의 도면을 띄우고 방 하나짜리 숙실을 보여 주었다.

그런 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리는 얼굴을 붉히면서 주환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자신과 달리 주환은 잔잔하고도 평온한 모습이라 얄밉게 느껴졌다.

“오. 박주환 소령. 흑심이 아주 가득하십니다?”

불쑥 나타난 일한이 싱긋 웃으며 주환과 나리의 사이에 팔을 뻗어 가로막았다. 그가 나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B동 숙사 홀로그램을 가까이 당겼다.

“나리 중사, 방 2개짜리 숙실 있는 B동 숙사가 신축된 지 얼마 안 된 건 아시죠? 여기로 가세요.”

“A동 숙사가 낫겠습니다.”

“어허. 박 소령, 그렇게 하시겠다? 내가 A동으로 숙사 이동 못 할 거 같습니까? 내 숙실에서 바로 보이겠네.”

“유 소령님은 남의 페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서 재수술이나 받으시죠.”

빠드득.

“…….”

“하하. 하…….”

두 남자가 살벌하게 째려보면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리는 사고 회로 과부하로 인해 멍하니 정신 줄을 놓은 상태였다. 방이 두 개든 하나든 어쨌든 같은 숙실에서 얼굴 맞대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콰과가가강!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진동했다. 적의 공격을 알리는 알람이 건물 내에 시끄럽게 울려 댔다.

“……!”

나리가 무조건 반사로 벌떡 일어나서 워치를 확인했다.

페어 A동 5층 폭발, 화재 진화 바람.

엥?

워치의 알람을 확인한 행정관은 한숨을 쉬며 파란색으로 공실을 표시한 A동 숙사를 ‘공사․수리 중’으로 변경했다.

“……B동 410호실 보안 키를 워치에 업데이트해 드리겠습니다.”

일한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리에게 말했다.

“와. 자리 좋다. 내 숙실 바로 맞은편이네요!”

“…….”

최 대령 숙실 바로 맞은편이라고? 그러면, 다 들리는 거 아냐?

나리는 황망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행정관의 손을 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저어, 그냥……. 지금 지내는 숙실 계속 쓰면 안 됩니까?”

행정관은 사무적인 표정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눈으로 나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미 업데이트, 마쳤습니다.”

“하…….”

“끄, 흐으윽!”

새로 페어 등록을 마친 두 사람은 어두운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늘어지게 쉬었다.

“축하드립니다. 나리 중사, 박주환 소령. 집들이, 꼭, 가겠습니다.”

일한이 해맑게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 ❖ ❖

“죄송합니다.”

소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숙였다. 앞서 걷고 있던 태형이 소민을 돌아보았다.

그가 같이 왔던 장교에게 먼저 가 보라고 했다. 장교는 큼, 목을 가다듬으며 소민을 흘겨본 뒤 먼저 자리를 떴다.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엔 항상 무거운 부담감이 얹혀 있었다. 어쩌다 운 좋게 S급 에스퍼와 매칭된 신데렐라. 그를 더 잘 보필할 수 있고 매칭률도 나쁘지 않은 다른 가이드들도 있었다. 정기적으로 상부에서 보내는 가이드 목록, 태형도 받았다.

“소민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최강한테 더 좋은 딜을 뜯어 가는데.”

“제가, 부족해서…….”

“안 부족해. 에스퍼 병력이 더 늘었으니 소민 씨가 나 때문에 앓아누울 일도 적을 거고.”

“……하지만, 이나리 중사가 없으면 약속받았던.”

“1년 후에 받겠다고 해야지. 뭐가 문제야. 어차피 저쪽 분들도 시간 많아. 그러니까 소민 씨 탓으로 안 돌려도 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태형은 소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제 옆에서 걸으라고 잡아당긴 건데, 소민의 발걸음은 그보다 한 박자 늦었다.

소민은 다른 가이드들이 부러웠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있고, 될 수 없는 것이 있다.

C급 가이드의 반은 트룹 가이딩은커녕 제 페어를 따라 실전 투입도 힘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서 제게로 돌아오는 에스퍼를 감당하는 것조차도 소민에게 벅찼다. 10년이 되도록 아무것도 나아진 것 없이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참을 수가 없이 힘들었다.

소민은 발걸음을 멈췄다.

“함장님. 한다희 소령과 매칭 테스트 신청해 놓겠습니다. 예상값 77%였으니, 충분히 통과하실 겁니다. 그리고 전 돌아가서 인수인계 준비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만두겠습니다. 함장님 가이드.”

“뭐?”

태형은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가 소민의 턱을 들어 제 눈을 맞췄다.

“아니, 내가 회의 5분 전에 가이딩해 달라고 해서 그래? 다음부터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

“생각해 보니, 기왕 이렇게 된 것 한 소령까지 잡는 것이, 후에 나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

“그리고 상부에 보고 올릴 때, 제가 미숙한 탓이라 하면 함장님께 해가 가진 않을 겁니다.”

태형은 그만두겠다는 말보다도 아무렇지 않게 그를 올려다보며 술술 말하는 소민이 더 충격적이었다.

소민은 할 말을 마치고 태형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먼저 가 버렸다.

어빌리티를 쓴 것도 아닌데 태형은 들었던 손을 툭 떨어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또 어디서부터 자신이 잘못했던 건지, 대체 소민이 왜 저러는지 곱씹어 봐야 하는데 이미 훌쩍 가 버린 페어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

으득.

태형의 잇새로 싸늘한 숨이 새어 나왔다.

사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부터 찾아서 따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주환이 해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몰매 맞을 뻔했다.

여자 숙사 C동에서는 나리의 퇴소를 축하하는 메시지들이 문과 복도에 붙어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축하해 주고, 나리와 같이 숙실을 썼던 김 중사와 홍 하사는 부러움을 가득 담은 선물까지 나리의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진짜, 사람 맘 싱숭생숭하게 다들 왜 이래…….”

나리는 그들이 남긴 편지를 읽고 선물을 짐 가방 안에 넣었다. 빽빽한 스케줄 때문에 선물을 열어 볼 시간이 없었다.

얼마 없는 짐을 챙겨서 페어 B동 숙사로 향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환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가려고 했는데, 주환의 옆에 최종 보스가 떡하니 서 있었다.

“헉.”

맞다!

아직 남은 사안이 있었지.

“드디어 왔군. 우리 이나리 중사님.”

은근슬쩍 도망치기엔 늦은 듯했다. 예민한 에스퍼 눈과 귀에 이미 걸렸다는 것을 똑똑히 일러 주었으니까.

태형의 말에 주환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리를 찾았다.

하아.

나리는 한숨을 쉬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태형에게 인사했다.

“…….”

태형은 싸늘하게 나리를 쏘아보았다.

가이딩에 넘어오지 않는다는 에스퍼, 까칠한 최강 녀석도 여우 같은 일한도 홀리는 여자였다. 저 목석같은 부하 놈도 상관은 본척만척 저 여자와 페어가 되었다고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걸 보면, 상부에서 그녀를 지목해 지시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지.”

태형의 말에 나리의 눈이 흔들렸다.

“아, 예, 저녁 식사 말입니까.”

“왜. 바쁜가?”

“아닙니다.”

“그럼 안내해.”

지, 지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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