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면담 중입니다
일한은 재수술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진통제만 받고는 수술 날짜를 뒤로 미뤘다.
“…….”
나리는 제 앞에 앉은 일한을 쳐다보았다.
괜찮은 건가?
사흘 치의 업무와 훈련 결과를 보고 있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무표정했다.
“해군 측에서 받은 제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나리 중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꺼림칙한 구석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나리 중사한테는 나쁘지 않죠. 전보다 훨씬 편하게 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육군 측에서는 주요 병력을 잃는다. A급 에스퍼야 몇십 명 더 있었지만, 그 병력이 이나리라는 게 문제였다.
일한은 허공에 떠 있던 문서 창을 옆으로 치우고 나리와 눈을 마주쳤다.
“이 조건, 우리 측에서도 맞출 수 있습니다.”
“…….”
“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나리 중사가 원하는 대로 맞춰 줄 의향도 있어요.”
일한은 해군 측이 제시한 것보다 더 많은 급여와 연금, 2배나 많아진 휴가 일수를 적어서 건넸다.
“…….”
나리는 그 제안을 보고도 입술만 달싹거리며,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꾹 눌렀다.
일한은 나리의 입술만 보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다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나리 중사.”
“네. 중사, 이나리.”
“빨리 대답해 줘야 회의 전에 제가 박주환 소령과도 미팅할 수 있어요. 저 지금, 시간 없습니다.”
“저한테 과분한 제안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
“…….”
나리는 다시 말을 삼키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일한은 펜대를 굴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최강은 원래 성격이 그랬으니 그렇다 쳐. 근데 유일한 밑에서 계속 일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나리가 움찔했다.
“지금 그런 생각 중이죠?”
정답을 맞힌 일한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돈이 얼마씩 오가는 건 잘 모르겠고, 내 생각밖에 안 납니까? 흠, 그것참 큰일이네…….”
“유일한 소령님. 그게 아니라요.”
“아…… 아니었구나. 그럼, 더 분발하겠습니다.”
일한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나리는 말문이 막혔다.
복잡한 머리를 쥐고 끙끙 앓았던 게 며칠, 나리는 제 속을 뒤집어 놓은 뻔뻔한 장본인을 향해 한숨을 지었다.
“하아.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제게 맘이 있으셨던 겁니까?”
“꽤 됐죠. 나리 중사가 이제야 알아차린 게 이상한 겁니다. 내가 언제 나리 중사한테 안 잘해 준 적 있었습니까?”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신을 배로 더 챙겨 준 게 그의 좋은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령님은 최 대령님이 있으시잖아요. 페어를 두고 왜 저한테…… 그러세요…….”
페어는 페어고, 넌 너지.
일한은 나리를 보면서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강도 자신처럼 널 에스퍼고 가이드고 안 따지고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난 되게 티를 낸 건데……. 전부터 널 잡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런데도 날 너무 남의 가이드처럼 대했잖아요. 남자로도 안 봐 주고.”
나리가 고개 숙여 머리를 쥐다가 말고 일한을 쏘아보았다.
네가 언제 나한테 똑바로 고백한 적 있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일한의 눈에 물기가 그득했다.
“나한테 이렇게 상처만 주고 가 버리겠다고 하면, 나 정말…….”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큼큼…… 삼키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나리 중사 마음만 더 괴로울걸? 해군으로 가서 편하게 살아도, 장담컨대 내가 무지막지 보고 싶을 겁니다. 잘생긴 술친구 하나 잃어서 한동안 술도 맛있게 못 마시고……. 안 그렇습니까?”
맞는 말이라 나리도 픽 웃고 말았다.
“여기 남아 주세요. 지금, 나리 중사 가이드가 되고 싶다는 것까지 바라지 않을게요.”
“소령님, 사람 부담스럽게 하지 마세요. 저 아무리 최 대령님께 잘 대들어도, 대령님 가이드 채 갈 만큼 담력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일한은 팔짱을 끼고 짓궂게 따졌다.
“그러게, 그 부담감을 전부터 느꼈어야지. 왜 인제 와서 느끼는 건데요? 나 되게 억울합니다. 최강 때문에 이 나이까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하고……. 이제 좀 해 볼까 했더니, 박주환은 왜 튀어나와?”
큼, 흠흠!
헤프게 웃으면 안 되는 자리인데……. 나리는 자꾸 당겨지는 입매를 가렸다.
좋은 사람이다. 유일한 소령.
그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아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떼를 부려서라도 저런 좋은 상관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고백은…… 제대로 못 했지만, 나중에 프러포즈는 제대로 할게요.”
“예? 프, 프러포즈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일한은 해맑게 웃으면서 자신 있게 덧붙였다.
“박 소령 가이딩하는 거 보니까, 나리 중사 곧 나한테 올 거 같던데요?”
“아…….”
“내 테크닉이 훨씬 더 낫더라고.”
아, 예예…….
그것도 맞는 말이라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의하기도 좀, 그렇다.
나리는 뺨을 긁적거리는 척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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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면담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두 다리를 훤하게 벌린 채 일한을 노려보았다. 어디 한번 뭐라고 하는지 지켜보자, 하는 주환의 태도에도 일한은 전 미팅과 다름없이 문서 창을 띄웠다.
“먼저 읽어 보시고 부족하거나, 맘에 안 드는 사항이 있으면 알려 주시죠.”
“다 부족합니다.”
주환은 읽어 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
“…….”
일한은 펜을 두 동강 낼 것처럼 힘줘 쥐고는 바르르 떨었다.
다리만 안 다쳤으면, 진즉에 놈의 머리채를 잡고 싸웠을 텐데.
“그렇군요. 해군 쪽에서 박 소령에게 잘해 주는 건 아닌가 봅니다. 해군에서 박주환 소령에게 제안한 것과 똑같은 조건이었는데 말이죠.”
“…….”
“나중에 그 말, 그대로 공태형 대령님께 반드시, 제기하겠습니다.”
쳇.
주환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일한은 훈련 영상과 담당 교관의 의견서를 띄웠다.
“박주환 소령, 등급이나 피지컬로 따지면 어느 가이드보다 탐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페어 가이딩도 완벽하지 않고, B급 에스퍼 트룹 가이딩(공격대, 분대, 소대 등의 전체적인 파장을 조율하는 가이딩)은 많이 부족합니다. 이 점은 박 소령도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아야 하고요.”
“…….”
“솔직히, 강과 공 대령님이 훈련 기간을 일주일로 잡은 거, 제가 많이 반대했었습니다. 사관생도나 일반 B급 가이드들도 실전까지 익숙하게 뛰려면 1년은 내리 훈련합니다. 그걸 반년도 아니고 1달도 아니고, 일주일이라니……. 누가 봐도 무리죠. 저도 못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박주환 소령에게 드리고 싶은 제안은, 이겁니다.”
일한은 준비했던 문서 창을 폈다. 주환은 문서 창을 자신 가까이 가져와 읽어 내려갔다. 반쯤 읽어 내려갔을 때, 주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한을 쳐다보았다.
“진심입니까?”
“전 누구랑 달리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 안 넣습니다.”
여태껏 사적인 감정을 솔솔 넣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일한은 뻔뻔하게 근거 없는 말을 해 댔다.
“…….”
그런데도 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혹했다.
다만, 태형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중사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건, 박 소령이 직접 물어보십시오.”
“…….”
“박 소령의 페어, 아닙니까. 왜 여태껏 나리 중사한테 해군으로 따라오라고 말 안 했습니까?”
충분히 말하고도 남았을 텐데. 가이드가 왜 에스퍼한테 자기를 따라오라 꼬시지 않았던 건가.
“이능력자 센터에서 준 에스퍼 리스트에 나리 중사 외에도 많았을 겁니다. 나리 중사가 매칭 테스트 거부 의사를 전달했을 때, 제가 알기로 2순위, 3순위 에스퍼도 A급이었어요. 예상값도 나쁘지 않았고.”
일한은 주환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해군이 왜 쉴드 어빌리티 A급 에스퍼가 필요합니까? 누가 박 소령한테 그리 명령했습니까?”
드르륵, 주환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앉아요. 박주환 소령.”
일한의 날카로운 말에 주환은 어금니를 지르물었다.
“오늘 연구소 갔을 때, 박 소령도 봤을 겁니다. 거기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를.”
미팅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대부분 일한이 주환을 설득하는 말이었다.
“……부디, 나리 중사를 봐서라도 한 번 더 고려하고, 양심적인 선택을 하길 부탁합니다.”
일한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주환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일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를 멈춰 세웠다.
“방금 얘기, 기밀 사항 아닙니까.”
“박 소령. 이능력자 연구소 자체가 통제 제한 지역, 즉 기밀 사항입니다. 그리고 강이 일은……. 상부에서도 몇 사람 모릅니다. 그러니 못 들은 척, 하십시오.”
“…….”
“그럼, 회의 시간에 뵙죠.”
일한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물도 없이 진통제를 하나 더 입에 털어 넣었다.
“하아.”
괜한 것을 들었다.
머리 좋은 녀석이라 그런가. 일한이 어떤 회유책을 쓰더라도 귓등으로 넘겨듣고 무시하려고만 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큰일이네.”
주환은 지금쯤 회의 준비를 하고 있을 태형과 소민이 걱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