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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22)화 (2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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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책임져 드려야지요

이 패닉의 소용돌이 안으로 발을 내디딘 나리는 빈 탄창을 분리해 떨어트리고 새것을 끼웠다.

일한이 최종 보스를 넌지시 일러 줬을 때, 정말 빨리 도망가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속전속결이라더니, 이게 뭐람.

S급 에스퍼랑 이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싸우라고.

나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태형에게 총구를 겨눴다.

“공 대령님, 그 손 놓으십시오.”

후방에서 경호 로봇들을 막고 있던 주환도 태형의 등장에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태형은 나리의 말에 강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가 안경다리를 들쳐 올리고는 씩 입꼬리를 당겼다.

최강이 저리 매달리는 이유가 있겠지.

“어디, 우리 부함장 에스퍼의 실력 좀 볼까?”

태형이 파장을 일으키자 그의 발에서부터 새하얀 냉기가 바닥을 타고 올라오면서 송곳처럼 뾰족한 얼음 결정들이 돋았다. 나리는 쉴드로 태형의 파장을 밀어 내며 움직였다.

쉴드에 쓸린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허공에 일어나더니 폭발하듯 사방에 쏘아졌다.

나리의 어빌리티가 다한 일한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진심으로 여기서 얼어 죽나 보다 했다.

“유 소령님.”

나리가 일한의 앞을 막아서며 그를 불렀다.

“최 대령님 파장 안 잡힙니까? 저 얼마나 버텨야 하죠?”

“…….”

일한은 찢어질 듯한 고통에 다리를 부여잡고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너무 추웠다. 숨 쉬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바늘 같은 한기가 살을 에었다.

“후우.”

잇새로 새는 숨이 하얗게 연기가 되었다. 일한은 덜덜 떨면서 주위를 살폈다. 강이 정신을 잃었으니 저 녀석을 땡 하지 않는 이상 순간 이동 파장을 잡긴 글렀다.

술래가 S급 에스퍼라니, 뭐 이런 하드코어 얼음 땡이 있나.

“제가, 최대한 파장을 흩어 볼……게요.”

해수 몬스터들을 급속 냉각 한다던 태형의 파장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나웠다.

나리는 태형을 주시하면서 저만치 떨어진 주환을 흘긋 쳐다보았다.

제 상관과 싸워야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했는데, 주환은 쉴드를 두른 채 냉기로 언 총의 겉면을 툭툭 털더니 태형을 향해 조준하는 게 아닌가.

휴, 2 대 2는 무리였는데 3 대 1은 손톱만 한 가망이 보였다.

대 괴수용 소총을 지척에서 마주하고도 태형은 여유롭게 웃었다.

타앙!

주환의 총소리와 함께 나리가 발을 박차고 태형에게 뛰어들었다. 쉴드 밖의 바닥은 바삭바삭하고 미끄러운 모래알을 밟는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면서 술래의 다리를 잡아 넘어트렸다.

태형은 가뿐하게 뛰어 나리를 피하더니 성에가 낀 모니터와 측정계를 차서 나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리는 모니터를 주먹으로 지르며 태형을 쫓았다.

두 동강 난 모니터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태형은 발로 차서 강에게 다가가는 일한에게 날렸다.

“윽.”

팔을 들어 막아도 딴딴하게 언 기기에 맞은 곳에 살갗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한기가 일었다.

주먹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 것 같고 입김이 닿은 눈꺼풀은 벌써 허옇다.

철걱철걱, 총이 얼어 버리자 주환은 그냥 홱 던져 버렸다. 내 것도 아니고 무겁기는 엄청 무겁다.

주환이 쓰러진 일한을 부축해서 쉴드 안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막았다. 일한은 손을 움켜쥐고 칼부림처럼 날아드는 태형의 파장을 억제했다. 눈보라는 싸락눈이 되어 팔랑팔랑 먼지처럼 날렸다.

나리가 태형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눈에 담을 새가 없었다.

빠져나가야 한다.

주환은 꽁꽁 언 손으로 강의 스트랩을 풀고, 일한은 제 페어의 가슴에 손을 올려 잔잔하게 감도는 심장 부근에 파장을 일으켰다.

지직. 강의 피부 위로 올라오는 파장이 사물의 형체를 잘게 흔들었다.

“나리 중사!”

일한이 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흐아압!

나리는 발끝까지 남은 기운을 끌어 올려 제 주변에 두꺼운 장막을 세웠다. 내지르던 태형의 주먹은 둔탁한 막에 막혀 나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딜.”

물리적인 공격은 막혀도 파장은 뚫리겠지.

태형이 파장을 일으켜 사방으로 싸늘한 냉기를 쐈다. 바늘같이 선 얼음 조각들이 쉴드에 가시처럼 박혀 밀고 들어왔다. 쩍쩍 얼음장이 되는 바닥이 나리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주환이 일한의 손을 잡은 채로 팔을 뻗어 나리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당겼다.

“켁!”

팟!

공중에 뜬 네 사람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며, 보송보송한 먼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아…….”

“윽, 미친! 박 소령, 내 다리!”

“으…… 으엣취! 콜록콜록.”

깊은 잠에 빠진 강은 비교적 곱게 일한의 침대 위로 정확히 떨어졌지만. 정작 침대 주인인 일한은 주환에게 깔린 다리를 붙잡고 침대 아래 바닥을 뒹굴었다.

“후, 살았다…….”

주환은 숨을 내쉬며 긴장을 놓았다.

정말이지, 끔찍한 특수 임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당을 따로 챙겨 주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공주님을 구하러 몬스터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구하러 제 상관에게 덤벼들 줄이야.

이 하극상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 소령님…….”

진이 빠진 나리가 제 위에서 웃는 주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가 재밌으세요. 아아, 힘들어 죽겠어. 나도 좀 같이 웃게 말해 봐요.”

주환은 하얗게 언 나리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어 냈다. 얼음은 물기가 되어 나리의 머리카락을 짙게 물들이고 동그란 이마를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주환은 엄지로 그녀의 긴 속눈썹에 달린 얼음도 걷어 주었다.

“이 중사랑 같이 있으니, 내가 참 별별 일을 다 겪습니다. 나중에 함장님께 무슨 꾸중을 들을지 감도 안 옵니다.”

“하핫. 그거, 참 재밌는 일이네요. 아하하…….”

“이 중사가 나 책임질 거니까, 뭐…….”

안 그렇습니까?

주환이 씩 웃으며 물었다.

하하핫!

“그, 그렇죠. 채, 책임……져 드려야죠.”

나리는 애써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 감당 못 할 일을 벌였다. 그래도 강을 구했으니, 강이 이번 일은 무마해 주지 않을까? 또 괜한 사고를 쳤다고 뭐라 하려나?

아니, 그보다도.

지금 이건, 가이딩인가?

주환이 빤히 저를 내려다보면서 이마를 쓸고 속눈썹을 훑는다. 꽁꽁 얼었던 몸이 녹아내리며 온몸이 간지러웠다.

왜 아무 말도 없이 임무 끝난 에스퍼를 만지는 거지? 박 소령님, 이럴 분이 아니신데…….

바닥까지 기운을 긁어낸 심장은 지끈거리고 한계선까지 다다랐던 근육들은 고통을 호소해야 하건만 간지럽기만 했다.

나리는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주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춥습니까?”

“……!”

그러고는 팔꿈치를 나리의 머리 위로 밀며 상체를 낮췄다. 나리는 화들짝 움찔거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간지러워요.

“박주환 소려엉…….”

침대 밑에서 일한이 아픈 다리를 붙잡은 채로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었다.

“제가 난방 최고치로 올려서 절대로 추울 리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남의 침대에서 좀 내려오시죠?”

“아, 맞다. 이 중사, 가이딩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됩, 니, 다……. 박 소령, 가이딩도 때와 장소가 있는 겁니다…….”

주환은 흘긋 일한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끅끅 웃었다.

유 소령님 놀리는 것도 재미 들이셨구나.

나리는 제 목덜미에 닿는 주환의 홧홧한 웃음이 위험해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자 주환이 눈을 들어 나리를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뭐, 유 소령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키스했습니까?”

안 그래?

“……!”

주환의 물음에 나리는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고장 난 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게 딱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쪽.

뭔가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를 짓눌렸던 무게감도 울렁이는 매트리스와 함께 횅하니 떠났다.

나리는 감았던 눈을 깜박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몸을 일으킨 주환이 일한을 부축해서 방을 나가고 있었다.

“흐, 하아아아…….”

나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헉헉거렸다.

위, 위험했어. 흐아, 내 콩알만 한 심장이 너무 아팠어! 얘가 너무 과하게 일해서 진짜 죽을 뻔했…….

“윽……!”

심장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려 일으키던 나리는 그제야 바로 옆에서 곤히 잠든 강을 보고 털썩 혼을 놓고 말았다.

박주환 소령님은 참, 대담하신 분이구나. 어, 어떻게 최 대령님 옆에서…….

덜덜덜.

나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어기적어기적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벽에 붙어서 조금씩 조금씩 가장자리로 움직이다 말고 멈춰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덜덜 떨었다.

엄마아…….

저 인간 깨면 날 죽일 거 같은데, 다리 힘 풀려서 못 일어나겠어요.

나리는 손가락 사이로 강의 얼굴을 흘끔거리다가 일한과 주환이 나간 밖을 쳐다보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바, 박 소령님……?”

저도 좀 부축해 주시면 안 됩니까? 페어 다리 풀리게 하고서 혼자 홀랑 가면 어떻게 해요. 나 좀 챙겨 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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