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그 여자, 무슨 마성의 에스퍼야?
연구소 뒤쪽 지하 주차장은 생화학 폐기물과 더불어 중,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까지 취급하는 특수 쓰레기 차량이 오가는 곳이었다. 방호복을 입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연구소 직원 3명, 그리고 2대의 경호 로봇도 구식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보안에 취약했다.
나리는 시신경과 함께 탐지 어빌리티를 끌어 올렸다. 렌즈가 파랗게 빛나며 일한이 표시해 준 보안 카메라의 사각지대가 시야에 겹쳤다.
하아.
특수 임무가 쉬울 리 없지.
“쓰흡…….”
나리는 두 손을 비비며 자세를 낮췄다. 단 한 번의 큰 도약으로 천장에 있는 수도관을 잡아 천장을 타고 폐기물 처리 차량 위에 착지해야 했다.
주환이 제 무릎을 굽혀 높이 뛰어오를 수 있게 준비했다. 망을 보던 일한이 수신호를 보냈다.
3, 2, 1…….
나리가 힘껏 달려서 주환의 허벅지를 밟고 뛰어올랐다. 천장 위에 노출된 수도관을 잡아 반동으로 다리를 천장으로 쳐올렸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손과 발끝에 힘을 줘 앞으로 나아갔다. 경호 로봇이 모깃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나리는 멈추고 바짝 몸을 천장에 붙였다.
가이드가 둘이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모서리를 잡은 채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호 로봇이 지나가자 나리는 다시 영차영차 기어가 폐기물 차량 위에 착지했다.
퉁, 둔탁한 착지음은 폐기물을 옮기는 소리와 겹쳐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리가 뒤를 돌아보자 일한이 엄지를 추켜들며 활짝 웃었다. 나리는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일하기로 했다. 왠지 조별 과제 때가 생각나면서 일은 내가 다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기분 탓인 거로 돌리고.
나리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돌아서는 연구소 직원의 목덜미를 쳤다. 한 사람이 쓰러지고, 그녀를 발견한 연구원이 뭐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나리는 그의 머리를 돌려 찼다.
2명 다운.
그리고 나머지 1명을 제압하기 위해 나리는 차량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어?”
불쑥 제 옆에 탄 낯선 여자를 본 아저씨는 두 눈을 홉뜬 채로, 퍽.
……기절했다. 경호 로봇들이 지하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들이 따듯한 동료애를 느끼며 쉴 수 있도록 방호복을 벗겨 비품 창고에 가지런히 낮잠을 재웠다.
방호복과 보안 키를 얻은 세 사람은 지하 8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까지 카메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주환은 총을 숨긴 쓰레기 수레를 끌면서 아직도 ‘내가 왜…….’라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연구소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 ‘왜’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었다.
왜 순간 이동 에스퍼인 최강이 붙잡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지?
에스퍼와 가이드가 득실득실한 군부대 내에 있는 시설인데 보안은 왜 경호 로봇이 하는 거지?
사람도 없는데 연구소는 왜 이렇게 커?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지하 6층, 관계자 외 통제 구역은 청소 관리인들의 보안 키로도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일한은 방호복을 벗어 던지고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장 위의 카메라를 향해 싱긋 웃으며 총을 쐈다.
타앙! 손톱만큼 작은 과녁이 터지고,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이 비상구를 울렸다. 주환이 철문을 걷어차고 때려 부숴 지하 7층으로 가는 길을 텄다.
웨엥! 웨엥! 웨엥!
빨간 불이 점멸하는 긴 복도는 이미 보안 경보가 시끄럽게 울려 대고 있었다.
나리는 벽 너머로 경호 드론과 로봇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 주차장과 다르게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저 로봇들, 마취제랑 테이저 샷 쏩니다. 다들 쉴드 둘러요.”
일한이 쉴드 어빌리티를 둘러쓰고 뛰었다. 나리와 주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파장을 촘촘히 둘렀다.
“제가 1번, 나리 중사 2번, 박 소령은 테일(tail). 제가 통로 열 테니, 차례로 들어갑니다.”
심장 부근이 뜨거워진다.
자신과 두 가이드에게 파장을 나누는 것도 과한 기운을 소모하는데, 사방에서 몰려드는 경호 로봇을 쏘면서 달리는 것도 일이었다.
“이 중사.”
뒤에서 따라오던 주환이 나리를 불렀다. 나리가 그를 돌아보자 주환은 속력이 떨어지는 나리의 허리를 끌어안아 올리고는 전속력으로 뛰며 일한을 지나쳤다.
“아니, 내가 왜 후방…… 야, 야!”
박주환 소령, 다리 다친 환자는 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버리고 가기 있기, 없기?
❖ ❖ ❖
가이딩은 끝났다.
강은 한 번 더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언제 풀어 줄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곧 풀어 주겠지, 언젠가 풀어 주겠지 하며 기다릴수록 시간관념이 희미해졌다.
입은 마르지 않고 배도 안 고팠다. 일단, 얼마나 자다가 깬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제 혈관으로 들어가는 주사약을 보면서 시간을 재 보았지만,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면 또 주사약은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젠장.”
일한이 자신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려야 했다. 일한도 자신과 다를 게 없는 상태일 경우엔…….
나리는 없겠지.
“하…….”
강은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패닉룸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밝게 빛나는 흰 천장만 보고 있으니 여기서 저기까지의 거리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눈이 어른거렸다.
“냄새는 지하인데.”
저번에 발악했을 때, 지하 35m였다. 그보다 더 아래면 40m에서 50m 그 사이쯤이 아닐까.
아니지, 연구소 놈들의 기함할 상상력은 그를 가이딩하겠다고 우주로 쏘아 띄웠을 때, 한 번 겪었다. 이번엔 해저일지도 모른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스트랩에 묶인 채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퉁.
멀리서 온 둔탁한 파장이 패닉룸을 잘게 진동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파장이 느릿느릿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누가 오는 건가?
강은 성가신 에덴만 아니길 바랐다.
“뭐야. 최강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강은 벽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인상을 구겼다.
패닉룸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환해졌다. 그 짧은 사이, 태형이 패닉룸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패닉룸 정 가운데에 묶여 있는 강을 보고 웃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벌받는 거야? 대단하군. 대단해.”
“네가 왜 여기 있어?”
공태형이 오다니.
이번엔 진짜 동해 밑바닥인가? 아무렇게나 순간 이동 했다가 수장당할 뻔했다.
태형은 강의 옆에 놓인 모니터를 보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애도 아닌데 웬만하면 말 좀 들어. 사람이 두루뭉술하고 쉽게 좀 살아야지. 대령씩이나 되어서.”
“떽떽이 다음엔 잔소리꾼이냐…….”
“유일한 보니까 얼굴도 잘났고 성격도 좋더만. 왜 상부 눈 밖에 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
“맘에 들면 네가 데려가든가.”
“너 관심종자야?”
“…….”
저 자식, 남의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제 말만 해 댄다. 강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태형은 강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연구소에 있었을 때부터 강을 알았지만, 강은 태형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자신이 죽든 말든, 주변 사람들이 저 때문에 고생하든 말든,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절대로 듣는 법이 없었다. 싫더라도 주변 사람을 위해 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어르고 달래고 그것도 안 돼서 싸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아.
태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더니 짜증스레 말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있는 거냐?”
이유야 셀 수 없이 많다. 따져 봤자 고칠 의향이 없는 강은 성가신 태형을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최강, 너 그 에스퍼 좋아해?”
강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태형을 쏘아보았다.
그걸로 답변은 충분했다.
“쯧쯧. 어쩐지……. 네가 왜 직급도 낮은 에스퍼를 나한테 안 보내고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나 했다.”
태형은 혀를 차며 모니터를 톡톡 건드렸다. 그가 무엇을 건드린 건지 강은 알 수 없었다.
태형은 안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숨 더 자라.”
기계음이 들리며 링거 안에 수면제가 섞였다. 약 기운이 퍼지기 전에 강이 태형에게 물었다.
“지금 며칠, 몇 시야?”
태형은 연기를 내뿜으며 말해 줬다. 사흘 정도 지났다는 말에 까마득한 시공간을 떠돌던 정신이 현실에 안착한 기분이었다. 강은 심연으로 끌려가는 중에도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유일한은……?”
“오고 있어. 다리 다쳤다던데 멀쩡하게 걷고 잘 뛰어다니더라.”
그럼 됐다.
강은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 에스퍼가 우리 부함장 두고 유일한한테 어빌리티를 빌려준 거 같던데? 무슨 마성의 에스퍼야? 가이드 에스퍼 안 따지고, 이 남자, 저 남자 다…….”
빠득.
강이 어금니를 물고 나지막이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태형은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가이드랑 네 짝사랑 상대랑 최소 키스는 했다는 얘기?”
“…….”
강의 이성이 툭, 끊겼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패닉룸이 크게 진동했다.
“강아! 얼른 집에 가자! 브레이크 해지해!”
일한이 패닉룸으로 뛰어들어 오며 소리쳤다. 뒤이어 귀청이 떠나갈 거 같은 총소리가 울렸다.
“유일한…… 이 개자식아…….”
“오오냐, 최강, 얼빠진 놈아! 빨리 도망쳐야 하니까, 네 파장 풀라고!”
일한이 강을 옭아맨 스트랩을 풀면서 다그쳤다. 그러나 이미 눈이 돌아간 강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지 원수인지 모를 녀석의 명치를 걷어찼다. 예기치 못한 제 에스퍼의 발길질에 일한은 패닉룸 저만치까지 굴렀다.
“야아악! 너 왜 이래?”
일한이 욱신거리는 배를 잡고 바락 소리쳤다. 강은 정신이 까마득하게 꺼지는 중에도 일한을 노려보며 이를 세웠다.
“죽어 버려…….”
“너 이번엔 무슨 약을 먹은 거냐?”
싸움 중에서 진짜 재미있는 싸움은 막장 치정 싸움이랬지만, 태형은 가만히 싸움 구경하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담뱃불을 짓이겨 끄고는 앞으로 꼬꾸라진 강의 머리를 쥐고 고개를 홱 젖혔다.
“이렇게 보면 귀한 집 도련님같이 생겼는데 왜 이리 험하게 사나 몰라.”
“……!”
일한은 태형을 보고 이를 갈았다.
“공태형 대령님…….”
“이곳에 쳐들어오는 괴한들을 붙잡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지라.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유일한 소령.”
그리고.
“이나리 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