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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9)화 (1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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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이기는 편, 내 편

“유일한, 소령……. 내 앞에서 뭘 하려는 겁니까…….”

주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나리의 파동을 두른 일한을 노려보았다. 일한은 나리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그녀를 그만 달랬다.

“이제, 그만…….”

맘 같아서야 더 하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일한이 애써 웃으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가야죠? 강이 찾아서 싸우러 가려면 시간 없어요.”

나리의 파장이 제게서 얼마나 버틸지 모르니 말이다.

절뚝거리고 휘청대던 일한이 갑자기 말짱하게 걷기 시작했다. 쉴드를 두르자 찌릿한 고통이 사라지고 마치 국부 마취된 것처럼 둔탁한 압력만 느껴졌다.

어색하고 불편할 뿐, 아프진 않았다.

늘, 나리가 괜찮다고 그랬듯이.

나리의 어깨를 감싼 일한이 병실을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더니 주환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뭐 합니까? 박 소령도 가야죠?”

“…….”

“지금 나랑 같이 안 가면, 내가 나리한테 뭔 짓을 할지 나중에 엄청 궁금할 텐데?”

꼭 죽여 버린다.

저 여우 새끼.

주환은 두 주먹을 바르르 떨면서 일한과 나리의 뒤를 따랐다.

❖ ❖ ❖

사전에 아무 언질도 없이 강이 불쑥 증발하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짧게 외출하긴 했어도 일주일씩이나, 그것도 페어인 일한이 위중한 때에 외출이라니.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 유일한 소령 회복할 때까지, 지휘권은 한다희 소령에게 맡긴다.]

한 소령은 새벽에 받았다는 강의 메시지를 부대 내에 공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강의 비서인 행정병이 해란에게 물었다. 해란은 몸을 풀다 말고 태블릿을 꼬옥 껴안고 부대 안을 쏘다니는 한 소령을 흘겨보았다.

“…….”

한 소령의 곁에는 주환과 같이 온 해군 간부와 공태형 대령이 부대 내 시설을 둘러보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육군에 강이라는 칼이 있다면, 해군에는 태형이라는 창이 있었다.

바다 냄새가 물씬 나는 S급 에스퍼의 등장은 육지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이었다. 전에 봤던 김 중령과 주환이 빳빳하고 우락부락한 군인이라 태형도 군인 냄새 물씬 나는 에스퍼일 줄 알았건만.

하늘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높이 묶었고, 새하얀 방부제 피부에 안경을 쓴 학구적인 이미지였다. 하얀 제복을 안 입었으면 하얀 가운을 입었을 사람처럼 보였다.

“공 대령님, 여기가 그 사고 현장입니다.”

한 소령은 이미 태형의 냉랭하고도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반한 것 같았다.

태형은 노란색 통제선을 긴 다리로 훌쩍 넘어 쩍쩍 갈라지고 주저앉아 버린 현장으로 들어갔다.

지난 사흘간, 눈치가 빠삭한 에스퍼들은 유일한 소령이 거미 독에 중상을 입었다는 말에 한다희 소령 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나 참. 유 소령님은 뭐 하시는 거람.”

내 소중한 맥주까지 조공하면서, 바로 밑에 마음과 정성을 다한 메시지를 남겼건만. 혹시 몰라서 낑낑대는 똥강아지에 주환까지 올려 보냈건만!

아아, 나도 이제 줄을 바꿔 탈 때인가?

철저한 계급 사회 속 영민하고 재빠른 행동가인 안해란 중위는 손익을 따지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 아, 안 중위님. 저기.”

행정병이 해란의 어깨를 흔들었다. 해란은 행정병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유일한 소령님, 맞죠? 다리에 거미 독이 퍼져 뼈까지 긁어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마, 말짱하게 걸어 다니시는데요?”

해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공을 좁혔다. 소실점이 확 그녀의 앞으로 당겨지면서 흐릿했던 대상이 선명하게 확대되었다.

하늘색 환자복을 입은 맨발의 환자가, 나리와 주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성큼성큼 화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뒤로 그를 말리려는 군의관과 발을 동동 구르며 휠체어를 가져오는 간호병은 덤이었다.

“어. 그래. 멀쩡하시네.”

우리 부대 내 유일한 천사님께서 흑화한 것만 빼면, 아주 멀쩡해 보인다.

해란은 두 손을 꼬옥 붙잡고 고개를 숙이며 기도했다.

“이기는 편, 내 편. 아멘.”

❖ ❖ ❖

파손된 훈련장을 둘러보고 있던 태형은 주환과 나리가 있던, 폭발의 중앙에 섰다.

“흠.”

집요한 에스퍼의 눈은 그을린 자국과 흙이 쓸린 방향, 깊게 팬 발자국과 검게 흩어진 핏자국을 좇았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저쪽에 하나 있군. 멀쩡한 카메라.”

역시 자신의 촉이 맞았다. 최강 녀석, 일부러 숨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태형은 한 소령에게 물었다.

“한다희 소령님, 저기 저 카메라 녹화본 일주일 치 좀 구할 수 있습니까?”

“아, 군부대 내 훈련 녹화 영상은……. 기밀 사항인데…….”

태형이 가리키는 쪽을 보아도 어디에 카메라가 있다는 건지 가이드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건 보고서에 영상 파일 하나 없이 진술서만 있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래 부서에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 소령은 마른침을 삼키며, 군부대의 보안 부서에 연결했다. 역시나 ‘권한 없음’이 뜬다.

한 소령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던 태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아, 이게 누구신가?

통제선을 걷고 일한이 태형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주환의 감상대로 참 껄끄럽게 잘생겨서 재수가 없었다.

일한은 태형에게 경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알파 대대, 대대장 유일한 소령입니다. 박주환 소령한테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왔습니다.”

애꿎은 보안 부서 직원과 씨름 중이던 한 소령은 흠칫 놀라며 통화를 껐다.

유일한이 여긴 어떻게…….

“부상 중이라 들었는데…….”

태형이 연기를 길게 뿜으며 말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A급 에스퍼는 숫기 없이 뻣뻣했던 첫인상과 달리 묘한 냄새를 내뿜었다.

이런…….

일한과 나리, 주환을 번갈아 보던 태형은 혀를 차며 입꼬리를 당겼다.

“부담스럽게 맨발로 마중 나올 것까지야 있습니까.”

“대령님께서 직접 방문해 주셨는데 당연히 제가 마중 나와야지요. 머무실 숙실은 맘에 드십니까?”

“뭐, 이 산골치고는 그럭저럭?”

일한이 누군가의 파장을 단단하게 두른 것이 눈에 보였다. 단언컨대 강의 것은 아니다.

그럼 제일 유력한 건.

주환의 에스퍼가 될 이나리 중사인데……. 박주환, 저 녀석은 제 에스퍼 안 챙기고 파장 뺏기는 걸 보고만 있었나 보다.

역시, 내가 직접 오길 잘했지.

태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일한을 쏘아보았다.

“박 소령한테 마지막 훈련이 오후 3시라고 들었는데, 참관해도 됩니까?”

“갑작스럽게 이나리 중사한테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훈련은 잠시 뒤로 미뤄야 할 거 같습니다.”

하하하…….

일한의 한마디에 없던 임무가 생겼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강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받은 나리는 애써 침착하게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렸다.

“예. 박주환 소령님도 저와 같이 가실 겁니다.”

그, 그렇죠오?

소령님도 빨리 그렇다고 해요!

나리가 주환의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

주환은 나리의 손을 내려다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태형을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흠.”

태형은 입 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혀로 훑으며 생각했다. 강직한 부하 박주환은 믿을 만한데, 저 곰 같은 초보 가이드 박주환은 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임무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식사나 합시다.”

태형은 알겠다면서 발을 옮겼다.

한 소령이 일한의 눈치를 보다가 재빠르게 태형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일한이 멈춰 세웠다.

“잠시, 얘기 좀 해도 됩니까? 한다희 소령.”

한 소령의 어깨를 움켜잡은 악력이 에스퍼 못지않게 강했다. 한 소령은 멀어지는 태형을 힐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보다시피, 제가 지금 좀 바쁩니다. 나, 나중에…….”

“나중에는 내가 시간이 없을 테고, 강이 돌아와서는 어떻게 하려고? 대책이 탄탄하신가 봅니다?”

그녀는 바들거리는 손끝에 힘을 주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예. 그러니, 유 소령도 허튼짓 말고 몸조리해야 할 때, 몸조리 잘하셔야 할 겁니다.”

“…….”

일한은 웃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한 소령을 차갑게 쏘아보더니, 꾹 말아 쥔 손의 힘을 빼고 한 소령을 밀칠 것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나리는 한 소령을 향해 살짝 묵례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흥.”

한 소령도 차갑게 돌아서서 저만치 멀어진 태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생체 인증 완료.]

[본인 인증키를 제시하세요.]

아아, 이런 스마트한 세상 같으니.

워치가 없으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제 숙실에도 못 들어갈 줄은 몰랐네요.”

일한은 손잡이도 없는 자신의 숙실 문 앞에 서서 신체 강화 어빌리티와 쉴드 어빌리티를 겹겹이 둘렀다.

“잠깐만요. 유 소령님.”

나리가 일한을 막아섰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 그럼 이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방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주환이 나리의 팔을 잡아 제 옆으로 비켜 세웠다.

그러고는 무릎을 세워 올리더니 두꺼운 철문을 쾅, 걷어찼다. 반 이상이 찌그러지면서 단단하고 스마트한 철문이 벌겋게 빛을 내며 경고했다.

[불법 주거 침입은 최대 3개월 치 감봉과 함께 인사 고과 점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주환이 나리의 어빌리티를 써서 한 번 더 문을 찼다.

[특수 주거 침입은 최대 6개월 치 감봉과 함께…….]

쾅!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문을 걷어차자 철문은 새까맣게 꺼지며 그냥 고철이 되었다. 주환은 고철덩이가 되어 버린 문짝을 한 손으로 그러쥐고 뜯어 버렸다. 쿵…… 쿵쿵, 보안 경보가 시끄럽게 복도에 울려 댔다.

“됐습니까?”

“…….”

“…….”

우리 박 소령이 쌓인 게 많았나 보다.

나리는 턱을 떨어트리고 멍하니 주환을 올려다보았고, 일한은 감흥 없는 박수를 치며 주환을 칭찬했다.

“예……. 뭐 대접할 것은 없지만, 일단 들어오세요.”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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