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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4)화 (1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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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나리야, 강이 자꾸 못되게 굴어

샤워실 가득 수증기가 차올랐다. 불쾌하게 들러붙은 핏자국들과 비명들이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다.

강은 벽에 손을 짚고 제 발등을 내려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하아.”

입김에 흘러나오는 기운이 수증기를 흩트리며 퍼져 나갔다. 그가 손안에 쥐었던 일한의 워치를 살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나리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가 제 능력을 사용해서 어떤 짓이든 할 수 있기에 상위 에스퍼와 가이드일수록 군부의 감시와 통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 가이드로 일한을 붙여 준 것도 군부의 명령이었다. 일한은 최고 권력의 군부 출신이자 최상급 가이드 부모의 밑에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다시피 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 형제가 그랬듯 일한은 일찌감치 사관 학교에 진학해 강과 매칭되었다.

감시자. 그리고 통제자.

강에게 가이드란 그런 존재다.

아무리 그의 앞에서 착하게 웃으며 에스퍼에게 꼬리를 살랑거려도 결국 군부의 말에 복종하는.

“그런데 네가 왜.”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한이 군부의 어디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순전히 강의 눈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강은 샤워실에서 나와 타월을 허리에 둘렀다.

허락 없이 들어가 본 적 없는 일한의 방으로 이동했다.

해맑게 웃고 다니는 녀석의 이미지와 다르게 방은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서 낮에도 어두웠다.

달칵, 강은 불을 켜고 일한의 책상을 살폈다.

컴퓨터 보안 해제 입력창에 일한의 워치를 대어 암호를 풀고 일한이 숨긴 파일을 찾고 있을 때쯤.

‘최 대령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를 부르는 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

타월만 두른 채, 바쁘게 제 페어의 방을 수색 중이던 강은 입 안을 짓씹으며 으르르 따졌다.

“개나리. 에스퍼면 에스퍼답게 힘을 써. 나한테는 전력으로 잘 싸우면서 뭘 어떻게 하긴.”

‘으읏, 유 소령님, 이 팔 좀 놓고…….’

“…….”

좌우로 화면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강의 손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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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환의 파일이었다.

1달 전, 이능력자 본부에서 온 파일이 아닌, 해군에서 작성한 것인지 양식이 달랐다.

그리고 그 파일은 주환뿐만 아니라 여러 개였다.

‘유 소령니임. 자꾸 이러시면 저 진짜, 최 대령님한테 맞아 죽습니다? 제대로 좀 누우세요. 아니, 아, 거긴 좀, ……히익!’

“후…….”

으드득.

강은 어금니를 갈면서 일한의 비싼 헤드셋을 꽉 움켜쥐었다.

“유일한……. 이 새끼가!”

강은 반으로 부러트린 헤드셋을 집어 던지고 이동했다.

반쯤 벗겨진 환자복은 일한의 하얀 어깨 밑으로 미끄러져 있었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나리는 일한의 몸무게에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순간 이동 한 강이 잇새로 으르르 짖었다.

“야.”

불길한 기운에 고개를 돌린 나리는 턱을 뚝 떨어트리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기겁했다.

“허읍!”

어, 어우야…….

샤, 샤워하고 계셨구나.

안 그래도 달라붙은 일한 때문에 날뛰던 나리의 심장은 군살 없이 단단하게 짜인 강의 근육을 보고 터지기 직전이 되었다.

나리는 시큰해지는 콧대를 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윽,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제 묫자리인가요? 아아, 내 심장아……. 아직 죽으면 안 돼.

“말로 할 때, 놔라.”

“넵.”

나리는 냉큼 결백을 호소하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이나리, 너 말고.”

“아, 넵.”

나리가 만세 했던 손을 내려서 일한의 어깨에 올리자 강이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서 쇼해?”

“아닙니다!”

나리는 두 눈을 감은 채, 다시 만세를 부르며 속으로 꿍얼댔다.

쇼는 대령님이 하고 계시잖아요. 차마 제 순수한 두 눈으로 못 볼 쇼 아니냐고요! 아니, 가운이라도 걸치고 오시지! 뭐, 얼굴도 잘났고 몸도 건실하셔서 당당하게 자랑할 만하긴 한데…….

일한은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강을 보더니 나리의 품속을 파고들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나리야, 강이가 자꾸 나한테 못되게 굴어…….”

땀에 젖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나리의 귓가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간지러운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어 미칠 지경인데,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드는 따스한 가이딩까지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리는 움찔거리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높게 든 팔꿈치가 부들부들 떨리며 점점 내려가고, 흡 하고 멈췄던 숨이 새어 나왔다.

어, 어떻게 해…….

심장은 어서 이 불쌍하고 착한 가이드를 보듬어 주라고 아우성이었다.

“유 소령님…….”

일한은 꿈에서나 들었던 나리의 애끓는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핥고 쪽 입을 맞췄다.

나리가 흠칫거리며 목을 움츠렸다.

귀여워.

일한이 웅얼거리며 나리의 목과 어깨 사이에 이를 세웠다.

그러고는 눈에 살기를 띠고 다가오는 강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강아, 미안하지만 나리는 내가…….

“이 새끼가…….”

강이 두 사람을 떨어트리려고 일한의 어깨를 잡자마자 나리가 강의 팔을 잡고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타, 타임! 브레이크 타임!

“흐아악!”

그러더니 강을 일한에게 내동댕이치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유, 유 소령님 가이딩은 최 대령님이 받으십셔!”

“……?”

“……!”

나리는 간질간질한 목덜미를 쥔 채로 가쁜 숨을 고르며 벌게진 얼굴을 감췄다.

지, 지금 딱 그림 좋네!

암!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참, 좋은 구도야!

“두 분, 오, 오해 푸시고 화해하시고…… 아, 아, 아무튼 전 이만 빠지겠습니다.”

나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회복실을 나갔다.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린 큰 소리에 놀란 담당 군의관과 간호병들이 회복실의 문을 열었다.

“유 소령님! 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이 발간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일한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재빨리 회복실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지나간 폭풍에 두 남자는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개……나리이……. 저 녀석을…… 확 그냥…….”

강이 시트를 움켜쥐고 으르르 이를 세웠다.

“…….”

강의 아래에 깔려 있던 일한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강을 밀쳤다.

“야!”

“…….”

그런다고 넘어질 리가 없는 에스퍼였지만 일한은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해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너 가이딩해 주나 봐라…….”

“하! 네 녀석 가이딩 필요 없거든? 이 비열한 새끼…….”

“아아, 그러십니까? 벌거벗은 채로 허둥지둥 오셨는데, 누가 누구한테 비열과 공정성을 따지고 있나?”

“너, 아픈 거 죄다 거짓말이지? 오래간만에 푸닥거리해?”

강이 일한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일한도 맞서 강의 손목을 쥐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열감이 강의 혈관을 파고들었다.

“해 봐. 오래간만에 누가 이기나 해 보지.”

가이딩 안 쓴다면서.

유일한, 이 개새끼.

강은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 ❖ ❖

날밤을 꼴딱 새운 나리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움찔 경계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앞에 앉아서 일하고 있던 안해란 중위가 나리를 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이 중사, 또 무슨 사고 쳤습니까?”

나리보다 10살 많은 해란은 큰언니처럼 나리를 잘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나리가 사고 치고 뒷수습을 감당 못 할 때면, 항상 해란에게 상담을 요청하며 잠시 강의 눈을 피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오늘따라 좀 예민해서…….”

“흐음.”

해란은 펜을 든 채로 턱을 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매칭 테스트 통과하고 페어 등록 앞둔 가이드랑 만났다고 들었는데 예민은 무슨.

혈색도 좋고, ‘나 지금 행복해요.’라고 얼굴에 써 붙였구먼.

“얘기 좀 해 보십시오. 그 가이드.”

“예?”

“어허? 이 중사. 부대 내에 소문 쫙 퍼진 것 모릅니까? 개나리 중사의 잘생기고 핫한 해군 장교 가이드. 나만 못 들어서 서운하네.”

“아, 그…….”

나리가 얼굴을 붉힌 채로 시선을 돌리는 게 귀여워서 해란은 풋 하고 웃었다.

좋겠다. 한창때라서.

해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가까이 다가가 짓궂게 속닥거렸다.

“그래서 우리 이 중사, 그분한테 어디까지 가이딩받았습니까? 설레서 첫날 잘 보내셨나 모르겠네.”

“네. 생애 첫 꿀잠 잤습니다.”

나리는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대답했다. 도리어 해란이 얼굴을 붉히며 나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어머. 이 중사, 역시 젊은 피는 화끈하네. 하긴, 쌓인 게 좀 많았어야지!”

나리는 얼빠진 얼굴로 해란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쌓인 거라뇨? 저 그렇게 궁한 사람 아닙니다?”

“응?”

“테스트 후에 잘 부탁드린다고 악수 한 번 하고, 숙사로 돌아가 죽은 듯이 푹 잤습니다.”

“그리고?”

“예?”

“그게 다, 입니까?”

“그렇, 습니다…….”

해란은 팔짱을 끼고 아주 실망한 표정으로 나리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나리는 허공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나리 중사. 지금부터 상관의 눈을 똑바로 보고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을 고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사, 사실인데요.

나리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해란을 올려다보았다. 해란은 나리의 목깃을 슬쩍 내리면서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이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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