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가이드한테 정 주지 마
강은 회복실로 옮겨진 일한의 곁에 있었다. 왼쪽 종아리가 반쯤 뜯겨 나갔다는 것, 뇌진탕, 수술과 치료는 쉬웠으나 인대 손상이 심해서 재활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 문제는 중독이라 회복이 더딜 거라는 의견을 지나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군의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래서 언제 깨어나는 건데?”
“경과는 지켜봐야 합니다. 사흘이 지나도 못 깨어나면…….”
강이 군의관을 째려보았다.
“고, 곧 깨어날 겁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해독제를 직접 주사할 만큼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셨으니 말입니다.”
기가 눌린 군의관은 냉큼 말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강은 일한의 손목에 걸린 깨진 워치를 풀었다. 군인이라면 한시도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 물품 중 하나였다. 아무리 액정이 깨져 있다고 한들 상태 이상 신호가 가는 걸 보아 위치 추적도 돼야 하는데…….
“……?”
깨진 워치 안에서 위치 추적 칩을 발견한 강은 일한의 귀 뒤쪽을 살펴보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는데 아물지 않은 흉터가 있었다.
“너, 뭔 짓을 한 거야.”
페어인 강 몰래 어디를 쏘다녔던 건가. 아니면 어딜 몰래 갈 예정이었던 걸까.
상부에서 알면 중징계감이었다.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놀란 강은 일한의 워치를 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유 소령님…….”
나리가 문을 빼꼼 열었다.
그리고 일한의 옆에 선 강을 발견하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최 대령님, 아직도 계셨습니까?”
“…….”
“염치는 있으시네요.”
이나리,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강은 주머니 속 일한의 워치를 꽉 쥐고 바르르 떨었다.
“유일한 소령님은 좀 어떻습니까?”
“…….”
오면서 들었을 텐데 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는 걸까. 강은 나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시하는 건지, 귀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지 않아서 그런지. 그의 침묵은 여러 가지를 내포했고, 그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아 보였다.
왜 강이 일한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는 건지 몰라도 일한이 걱정되기는 한 모양이다.
돌아갈까, 말까?
나리는 문가에 서서 쭈뼛거리며 강의 눈치만 보았다.
아니면, 뭐라 위로라도 해 줘야 하나.
나리는 조심스럽게 회복실 안으로 들어왔다. 최대한 강의 심기를 안 건드리려고 발뒤꿈치를 들고서.
“……괜찮으세요?”
“괜찮겠지.”
“아니, 대령님요.”
강이 나리를 돌아보았다.
언제 이만큼 가까이 왔는지, 그의 어깨쯤에 올까 말까 한 애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태껏 내 탓 하더니, 왜?”
“그럼요. 이건 다아, 대령님 탓입니다. 유 소령님께 많이 미안해하시고 무릎 꿇고 사죄해야 마땅하죠. 그렇지만 지금 대령님도 엄청 놀라셨고, 걱정하고 계시잖습니까?”
강은 픽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안 해.”
“헐. 매정하다. 매정해……. 인간 맞으십니까? 어떻게 10년 동안 동고동락한 페어한테…….”
“가이드에게 매정한 게 나아.”
강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툭 떨어트렸다.
그 한마디가 가슴속에서 끓어 올라오던 한숨보다도 짙어서 나리는 가볍게 맞받아칠 수가 없었다.
“이나리. 너도 가이드한테 정 주지 마. 나중에 다치는 건 너야.”
강은 나리를 지나쳐 회복실 밖으로 발을 옮겼다.
뭐야, 정말.
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에게 물었다.
“왜요?”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겁니까?
“…….”
강은 잠시 멈춰 서서 나리를 흘긋 돌아볼 뿐, 말이 없었다.
“왜요. 유 소령님 좋은 분이시고, 박 소령님도 괜찮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최 대령님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간섭합니까? 사람이 왜 그렇게 못됐습니까?”
“…….”
“말 좀 하세요. 제가 대령님 말을 잘못 이해한 겁니까?”
“잘 알아들은 거 맞아.”
“……?”
“나, 너한테 간섭하는 거야.”
강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너 제정신 차리라고. 나중에 가이드 때문에 자책하지 말고, 가이드 때문에 죽네 사네 휘둘리지 말고, 가이드 때문에 맞서지 못할 상대한테 개기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여태까지 하던 대로 똑똑하게 처신하라고 쓸데없이 간섭했어.”
……됐어?
강은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되묻더니 나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나리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벙긋거렸다.
하, 뭐래…….
최강이 왜 저러지?
진짜 사람 불안하게…….
나리는 입술을 뜯으며 차근차근 소설의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성격 모난 강이 착한 일한을 거칠게 대하다가 후회하고 자책하고 가슴 아프게 휘둘리는 건 읽어 봤어도 누구한테 개기는 건 읽지 못한 거 같다.
이름답게 그는 이 세계관의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우와, 우리 강이가 많이 사람 됐네…….”
언제 깨어난 건지 일한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일한 소령님!”
나리가 벌떡 일어나 일한에게 다가갔다.
“우와. 이게 웬일이야. 나리도 있고…….”
일한은 저릿저릿한 손을 들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둔한 통증이 이는 머리를 짚었다.
“세상에, 나 열까지 있네? 분명히 해독제 주사했는데? 현실 같은 꿈인가? 부작용에 환각도 있던데, 약이 독하긴 독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다가 추욱 늘어졌다. 발갛게 열이 오른 그의 반듯한 이마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리는 옆에 놓인 수건을 들어 일한의 이마를 닦았다.
“깨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했습니다.”
“으응. 가끔 다쳐야겠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재수 없긴.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저 술 사 주신다면서, 아프다고 내빼시는 거로 들립니다?”
“하하.”
일한이 일한답게 웃자 속에 콱 응어리져 있던 불안과 오만 가지 걱정이 녹아내렸다. 나리도 그를 따라 씩 웃으면서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소령님…….
최 대령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두 분,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왜, 최 대령님은 가이딩을 안 받으십니까? 얼마나 되신 거예요? 그러다 최 대령님 폭주하면…… 어떡해요?
묻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술만 마른다.
오늘 말고 다음에 물어봐야겠지……?
나리가 일한이 깨어났다고 알리려던 순간, 그가 옆으로 돌아누워 나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
열과 약 기운에 취해서 그런가, 일한은 배시시 웃으며 한층 더 풀어진 말투로 웅얼거렸다.
“나 많이 걱정했어? 기특하네. 우리 나리…….”
기특? ‘고맙다’도 아니고?
마치 귀여운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손길에 나리가 어벙한 표정으로 일한을 쳐다보았다. 일한은 나리의 뺨을 쓸고 그녀의 턱 끝을 추켜들더니, 오구오구 우쭈쭈 간지럽혔다.
“예쁜 짓 했으니까, 상 줘야 하는데에…….”
갑자기 일한이 상체를 일으켜 나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헤프게 웃고 있던 일한의 눈꼬리는 고혹적으로 붉었다. 반쯤 감긴 시선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그녀에게 곧바로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누가 울 나리를 가이딩해 줬어?”
훅, 하고 불어온 숨소리. 심장이 뜨끔거리게 섬뜩해서 나리는 움찔했다.
“저, 저기…… 유 소령님.”
“나도 가이드인데……. 내가 더 잘…….”
일한은 나리의 어깨에 기대어 가쁜 숨을 색색 내쉬었다.
“…….”
오 마이 갓.
지금 이 시추에이션, 뭐임?
겪어서는 안 되고 들어서는 안 될 뭔가가 지나간 것 같다. 나리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돌처럼 굳어 버려서, 일한을 제대로 부축해 눕힐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 유유, 유일한…… 소령님?”
주환에게 가이딩받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일한이 뜨거운 숨을 내쉴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세차게 쳐 댔다.
이쯤이면 강이 나타나 ‘남의 가이드’ 운운하면서 흉흉한 살기를 날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조용했다.
제 심장 소리 빼고 너무 조용해서, 마치 폭풍의 눈 속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설마.
최강이 나 때문에 저러는 건가?
일한이 날 조, 좋아해서?
……푸훕!
“에이……. 말도 안 돼. 이나리, 정신 차려.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아무리 본편 다 끝났다 해도, 그게 무슨 김칫국…….”
축 늘어져 있었던 일한이 나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리는 실없이 웃다가 움찔거리며 입술을 꾹 말았다.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나리의 어깨를 움켜쥐고 단단하게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틈 없이 맞댄 가슴으로 그의 심장 고동이 생생히 느껴졌다.
응.
확실히, 김칫국 마신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이 소설이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확실해진 것 같다.
“최강 대령님.”
대령님, 듣고 계시죠?
“최 대령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리는 덜덜 떨면서 울먹였다.
까칠하고 예민한 강이 못 들을 리가 없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