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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12)화 (1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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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맞아.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야

나리는 울 것같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치를 뜯어냈다. 징그러운 거미 알들이 뚝뚝 떨어지고 안에서 거꾸로 매달린 일한의 얼굴이 나왔다.

“윽! 으이란 스령니이임…….”

나리는 눈물을 삼키고 이를 꽉 문 채로 끈적끈적한 실과 점막 범벅이 된 일한을 꺼냈다. 바로 일한의 숨소리와 손목 워치의 바이털을 확인했다.

“콜록! 솔개, A-09 유일한 소령님 구출했습니다!”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강의 파장이 폭발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나리는 재빨리 자신과 일한 주위에 제일 단단한 쉴드를 둘렀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쉴드 밖 거미 둥지는 피바람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최전방 현역 10년 차 군인이면 기도 확보, 상처 지혈, 기본 응급조치쯤은 척척 할 수 있게 된다.

“유일한 소령님, 정신 차리세요.”

나리는 수통을 꺼내 일한의 얼굴을 닦았다. 거미의 진액과 실로 끈적끈적하게 엉망이었던 잘생긴 이목구비가 드러나자 바로 다음 처치를 진행했다.

상의 단추를 풀어 숨통을 트이게 했다. 허벅지에 꽂힌 해독제로 독을 중화할 수 없던 걸까, 온몸에 열감이 돌았다. 나리는 빈 주사기를 뽑고 다리 상처를 살펴보았다.

발목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흉측하게 뜯겨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독이 뼛속까지 들어갔으면, 어떡하지.

“소령님……. 저 술 사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상처 보니까, 유 소령님 내일 술 못 마실 듯합니다.”

나리는 정신 잃은 사람 앞에서 혼자 주절거리며 끈으로 무릎 아래를 묶어 지혈하고 상처 부위도 물로 닦아 냈다.

“유일한 소령님, 진짜 사람 그만 놀리시고 일어나 봐요. 지금 쉴드 밖에 몬스터 피로 떡칠한 최 대령님 있어요. 한 중위님 가이딩도 여기까진 안 닿는단 말이에요. 저 피 냄새 역해서 못 나가요……. 바로 토해 버릴걸요?”

애써 웃으면서 일한의 얼굴 쪽을 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같이 농담할 것 같은데 그의 입술은 창백하기만 했다.

“소령님?”

나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한의 손을 붙잡았다.

햇볕같이 따뜻했던 가이딩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일한 소령님 강한 사람인데. 우리 여태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러게, 다 최 대령님 탓이야……. 최강 대령님이 되게 못돼 먹어서 그래요. 그렇죠?”

일한의 어디가 맘에 안 든다고. 자기 가이드를 홀로 임무에 보내는 에스퍼가 어디 있냐고.

“……그렇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같이 가는 건데…….

고막을 찢는 듯한 바람 소리와 거미들의 비명이 일순 조용히 잦아들었다.

커다란 크레이터 속, 집채만 했던 거미와 수천 개의 알은 흔적도 없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피 웅덩이에 떠다녔다.

강은 검을 검집에 넣고 제 얼굴에 튄 피를 쓱 훔쳐 냈다.

“…….”

저벅저벅, 피 웅덩이에 강의 무거운 발자국이 패었다가 우뚝 멈췄다.

핏방울과 역한 진액들이 헤집어진 거미줄을 타고 뚝뚝 떨어져 반투명하게 쳐진 나리의 쉴드 위로 미끄러졌다. 정신을 잃은 일한을 내려다보는 나리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술을 짓씹었다.

❖ ❖ ❖

언제 복귀하는 걸까.

일분일초가 더디다.

캄캄하던 밤이 푸르스름하게 변할 때쯤 새하얀 빛이 블라인드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가만히 나리가 복귀하기만을 기다리던 주환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대기하고 있던 군의관들과 의무병이 부상자를 빠르게 안으로 실어 날랐다. 붕괴 위험이 있는 거미집에서 지친 싸움을 한 에스퍼들은 다들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물로 입 안을 헹구거나 속을 게워 냈다.

그 한가운데에 새까맣게 피에 젖은 강이 꿋꿋이 서서 상황을 정리하며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제게 다가오는 행정병에게 외투와 장갑을 벗어 던져 버리고는 피에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면서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해상전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나리 중사는?

주환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리는 그 속에 없었다.

에스퍼들은 임무 후에 의무실로 와서 가이딩을 받을 테니 분명 이쪽으로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주환은 병실 밖으로 나와 의무실 가이드가 있는 데스크로 갔다.

“저기, 이나리 중사 왔습니까?”

바쁜 사람들을 잡아 묻고, 길도 모르는 낯선 병동을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수술실 통제 구역 앞에 앉아 있는 나리와 그녀 앞에 서 있는 강을 발견했다.

“너 여기서 뭐 해.”

강이 주환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나리에게 물었다.

나리는 전투 장비에 총을 멘 채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강을 쏘아보았다.

“최 대령님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십니까?”

“…….”

“나한테는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맨날 쪼아 대면서, 최 대령님은 제정신이십니까?”

강에게 바락바락 쏘아 말하는 게 완전 개나리 모드였다.

“어떻게 자기 페어를 혼자 임무에 보내세요? 난, 하아…… 난 또 유일한 소령님이 대령님이랑 같이 가는 줄 알았지……. 아무리 둘이 치고받고 싸우셔도 페어니까, 서로 목숨은 챙겨야 하니까 임무는 같이 갈 줄 알았지. 전처럼 나를 같이 보내든가, 아니면 하루 정도 빠져도 됐을 일이잖아요! 사람이 대체 왜 그래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좀 압시다!”

의무실 복도가 떠나가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나리의 목소리에 모두가 얼어붙었고, 나리에게 다가가던 주환도 우뚝 멈췄다.

평소처럼 앞뒤 위아래 안 가리고 왈왈 짖어 대는 나리에게 언성을 높일 줄 알았건만.

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만성 두통 원인 제공자인 나리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맞아. 요즘 내가 좀 제정신이 아니야.”

누구 때문에 말이지.

그러나 나리가 제대로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아하! 제정신이, 예……?”

또 한 소리 들을 줄 알고 더 쏘아붙이려고 기를 올리고 있던 나리는 바람이 빠진 풍선이 되었다. 자그마치 10년 동안 본 우리 최 대령님은 이럴 분이 아니신데……?

강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지그시 나리를 노려보기만 했다. 나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강의 어두운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불면증에 시달려 다크서클도 짙고, 요즘 성질도 더 더러워진 거 같고, 자꾸 머리 아프다고 하는 게 꼭…….

“최 대령님.”

에이, 설마.

아니겠지…….

“유 소령님한테 가이딩…… 안 받으셨습니까?”

“…….”

대답이 없다.

강이 대답이 없다는 건 ‘어’. 하지만 ‘‘어.’라고 한 글자 말하기도 귀찮아.’ 혹은, ‘어. 하지만 나 자존심 상하니까, 꺼져.’ 둘 중 하나인데.

헐.

“어, 얼마나……요?”

“…….”

또 대답이 없다.

나리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제 입을 가렸다.

자, 작가님?

아무리 본편이 끝났어도 그렇지, 두 주인공이 권태기에 이혼하는 비하인드는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우리 주인공들은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오 마이 갓.”

세기말 소설 곧 멸망할 징조인가. 이거 어떡하지……?

“이나리 중사.”

나리의 등 뒤에서 곰처럼 커다란 가이드가 존재감을 뿜어 대며 나리를 불렀다. 나리가 주환을 돌아보자 강은 거르지 않고 뱉을 뻔한 말을 삼키고 하아, 한숨을 쉬었다.

“괜찮습니까? 복귀했는데도 안 보이길래 찾았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한데…….”

박주환, 이나리의 가이드.

에스퍼가 임무를 끝냈으니 가이딩을 받고 쉬는 건 정해진 절차였다.

하지만 강이 뭐라고 하든 저 남자의 눈빛은 공과 사, 구분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짜증 나게.

강은 눈꼬리를 치켜뜨고 주환을 노려보다가 수술실 앞 벤치에 털썩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 가 봐.”

평소 일한이 바라던 대로 강은 최대한 다정하고 예쁘게 말했다.

“제정신 아닌 사람 신경 긁지 말고.”

“최강 대령님!”

“가죠. 이 중사.”

주환은 발끈하는 나리를 붙잡고 그 자리를 떴다.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리는 한참 동안 멍하니 주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바짝 긴장하고 단단했던 나리의 기운은 심장 소리를 따라 느슨하게 흘러갔다. 이 정도면 가이딩은 끝난 거지만 주환은 먼저 그녀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하얗고 보드랍다. 손가락은 또 가늘고 길었다. 이런 손으로 몬스터와 싸운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리는 주환의 커다란 손안에 꼬옥 잡힌 제 손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박 소령님.”

“예.”

“해군에서도 이런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 말입니까?”

아니, 그,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리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에 가이딩, 감사합니다. 쉬십쇼. 박 소령님.”

“이나리 중사.”

“네.”

“유일한 소령에게 가 보려고 합니까?”

새벽 4시였다.

“예? 아, 네……. 오래간만에 술 사 주겠다는 분이 앓아누우셨으니, 가서 괜찮은가 얼굴이라도 봐야죠.”

수술이 끝난 일한이 걱정되기도 하고 지금 숙실로 돌아가 봤자 곧 기상이니 잠은 못 잘 게 뻔했다.

가이딩이 끝나도 착잡하게 가라앉은 나리 때문에 주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주환도 오늘 아침까지 옆에 있던 이가 허무하게 죽고 다치는 걸 겪었기에 나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 때문에 쉽게 나아지길 바랐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가쁜 설렘과 걱정이 가이딩하면서 전해지길 바랐다.

“…….”

나리가 나가고, 주환은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르구나.”

그의 상관인 공태형 함장도 에스퍼였고, 제 남동생도 에스퍼였다.

저와 가까운 에스퍼들이 제 가이드에게 쩔쩔매는 것만 봐서, 그들이 일주일이라는 기간에 콧방귀를 뀌며 에스퍼는 매칭 테스트를 하자마자 제 가이드에게 끔뻑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해서 나리도 그의 가이딩에 쉽게 허물어질 줄 알았는데. 나리가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가이드는 에스퍼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던 말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주환은 제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쥐었다.

“달라도 많이 다르잖아. 최 대령도 그렇고, 이 중사도 그렇고…….”

끔뻑 넘어간 것은 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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