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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9)화 (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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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내가 너, 자신 있게 벗으라고 했지!

주환이 뭐에 홀린 곰처럼 눈을 끔벅거리고 있을 때, 그의 시야에 통화 창이 떴다.

[공태형 함장님.]

바다에서 온 전화였다.

“하아…….”

주환은 왼손으로 불편하게 자음과 모음을 찍었다.

[함장님, 최 대령 귀가 좋아서 통화 불가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주환이 한숨을 내쉬며 끙끙 메시지를 적는 중에 벼락같이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띵.

[최강 대령이 너 팼다며, 근데 왜 내가 그쪽한테 피해 보상을 해야 하는 건데? 이게 뭔 말이야?]

띵.

[A급 에스퍼는?]

띵.

[설마 아직도 작업 중이야? 유일한 그놈이 그렇게 잘생겼어? 우리 부함장이 얼마나 섹시한데! 내가 너, 자신 있게 벗으라고 했지!]

띵, 띵, 띵…….

“…….”

아, 골치 아파졌다.

❖ ❖ ❖

“쉬어.”

강은 쉬라고 명령하고는 사람 숨도 못 쉬게 옆에서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가도록 꿈쩍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는 척하며 말똥말똥한 눈을 굴리고 있던 나리는 참다못해 벌떡 일어났다.

“대령님, 안 가십니까?”

팔짱 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강이 눈을 떴다.

“안 가.”

“왜요!”

“어차피 가 봤자 못 자.”

“아니, 부대에서 제일 넓고 편안한 숙실이랑 제일 잘생긴 페어가 있는데 왜 못 잡니까!”

“……그럴 일이 있어.”

“유 소령님이랑 싸우셨습니까?”

“…….”

강은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아오! 내가 미쳐!

기운 없는 사람한테 와서 왜 이러냐!

“무슨 일인지 몰라도 유 소령님께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면 해결될 겁니다. 얼른 들어가십쇼.”

“나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엄청 신경 쓰여서 숨도 못 쉬겠습니다. 잠이 안 오시면 다른 데 가시지, 왜 저까지 못 자게 합니까?”

그럼 계속 있어야겠네.

강은 어깨를 으쓱대며 픽 웃었다.

약 올리는 건가?

나리가 지끈지끈한 머리를 쥐고 강을 쳐다봐도 망부석이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나리가 두 발로 서자마자 강이 나리의 발을 걸어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꽉 잡힌 손목이 이리저리 일그러진 시트 속으로 폭 잠겼다.

“누가 가래?”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그의 앞머리를 흩트리고 시리도록 까만 눈동자를 반사했다. 나리가 아무리 손에 힘을 주고 빼내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좀 있어.”

강은 나리를 짓누른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너 엄청 거슬리는데, 가만히 있어 줬잖아.”

이해할 수 없는 억지를 부리고, 말도 안 되는 명령으로 사람 미치게 하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나리는 허, 혀를 차며 강을 쏘아보았다.

강은 천천히 손을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빳빳한 옷감이 의자에 쓸리는 소리와 함께 살을 에는 듯한 위압적인 파장이 실내를 어지럽게 꿈틀거렸다.

나리는 그가 여태껏 공격수인 줄 알았는데 자신 못지않은 방어선을 두른 것처럼 느껴졌다.

“…….”

강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을 어떻게든 누르려고 애쓰면서.

나리는 그를 등지고 홱 뒤돌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에스퍼에게 불면증은 정말 몹쓸 고질병이다.

❖ ❖ ❖

첫 만남부터 사흘간, 주환은 저 남자가 한시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말하건대 그도 자신을 무척 싫어했다.

“박 소령님.”

그런데 왜 저러는 걸까. 주환은 저 여우 같은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팔 아픕니다. 빨리 아 하세요.”

일한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사골 국에 만 밥을 크게 떠서 주환의 입 앞에 댔다.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어허. 팔 다치셨잖습니까. 옆구리도 많이 쑤실 텐데요?”

“…….”

이 남자의 특기는 병 주고 약 주기인가. 배 안이었으면 주환은 그를 진작에 걷어찼을 것이다.

“유 소령님.”

나리는 얼빠진 표정으로 일한과 주환을 쳐다보며 그를 불렀다.

“응? 왜요. 나리 중사.”

“어제, 최 대령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으음?”

다정하고 지고지순한 미인수 캐릭터가 왜 갑자기 바뀌게 된 거지?

기상 점호가 울리자마자 일한이 사골을 끓인 커다란 솥을 의무실로 가져오더니, 강은 본척만척하고 나리와 주환에게만 밥을 먹이는 게 아닌가.

당연하게도 강은 빈정 상한 얼굴로 의무실을 나가 버렸다.

둘이 왜 저런대?

소설에 이런 스토리는 없었는데.

“왜? 어제 강이가 내 얘기 했어요?”

“아, 아닙니다.”

나리는 제 앞에 있는 밥에 집중하기로 했다. 빨간 총각무와 뽀얀 사골 국이라니, 식판이 아닌 예쁜 사기그릇에 곱게 담아 준 반찬까지…… 역시 일한은 너무 착하다.

“맛있습니까?”

“네!”

따뜻한 국물에 기분이 녹은 나리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무조건 강의 잘못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많이 먹어요.”

일한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지 따뜻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기쁘게 먹는 나리와 달리 주환은 아무 말도 못 하게 밥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일한 때문에 체할 것만 같았다.

“유 소령님, 이러지 마시고…… 읍.”

“박 소령님이야말로 이러지 마시죠. 박 소령 빨리 나으라고 제가 밤새 정성껏 끓였단 말입니다!”

일한은 주환의 턱을 잡아 전투적으로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거 먹고 죽어 버리라는 살의가 다분했다. 주환은 성한 왼손을 들어 일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곱상하게 생긴 것치고 힘이 셌다.

“저 혼자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자꾸 이러실 겁니까?”

“예에……. 자꾸 이럴 겁니다……. 이러고 난 뒤엔 박 소령님 벗겨서 뽀득뽀득, 씻겨 드리고 군복도 잘 입혀 드릴 겁니다아…….”

뭐?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주환이 경악하며 일한을 밀어 내려 했지만, 어금니 꽉 깨물고 웃는 일한은 주환의 멱살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어머, 어머어머…….

이거, 최 대령님께 보고해야 하는 건가? 대체 뭔 스토리야? 내가 못 본 번외편이야?

나리만 계 탄 듯이 얼굴 붉히며 좋은 구경 했다.

“똑똑히 들으셨죠? 나리 중사.”

일한은 주환의 단추를 풀다 말고 나리에게 말했다. 침 흘리면서 망상에 빠져 있던 나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한을 쳐다보았다.

“박주환 소령님께서 혼자서도 잘한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잖아요?”

“예…….”

“그렇다고요. 나리 중사는 박 소령 걱정하지 말고 제가 올 때까지 제가 한 음식 잘 챙겨 먹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됩니다.”

“아, 네. 오늘 출격하십니까?”

“예. 일해야죠. 아쉽게도 박 소령님을 코오 재워 드릴 시간은 없네요.”

주환은 일한을 노려보면서 명치까지 풀어진 제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가 바르게 옷 주름을 펴는 동안 일한은 큼, 목을 가다듬더니 뺨을 긁적이며 눈치를 봤다.

“나 이번 작전 갔다 오면, 하루 시간 되는데……. 새로 생긴 맛집 같이 갈래요?”

어머.

나리는 주책맞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광대를 가린 채, 주환의 반응을 기다렸다. 주환도 이게 대체 뭔 상황인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한을 쳐다보았다.

“…….”

“…….”

“……나리 중사?”

“예? 저, 저요?”

나리가 화들짝 놀라 자신을 가리켰다. 일한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럼, 제가 시커먼 박 소령이 뭐가 이쁘다고 밥을 사 줍니까? 저리 다쳐서 술도 못 마실 텐데.”

뭐? 술?

나리한테 밥에 술까지 사 주겠다는 말에 주환의 눈썹 끝이 뾰족하게 들렸다.

“헐.”

나리는 갑작스러운 일한의 데이트 신청에 펄쩍 뛰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좌우를 홱홱 살폈다.

강이 불쑥 튀어나와 깽판 칠 줄 알았는데 10m 반경 내에 꺼림칙한 인기척은 없었다. 나리는 조심스럽게 팔을 내리며 작게 물었다.

“혹시…… 최 대령님도 가십니까?”

“아뇨. 강이는 양고기 못 먹습니다.”

뭐? 야, 양고기?

가이드님께서 양꼬치에 생맥주를 같이 먹어 주겠다고 하면, 에스퍼는 넙죽 가야 하는 법이다. 냄새 때문에 괴로워하며 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 흔쾌히 가겠습니다! 가즈아!”

“하하.”

일한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주환은 못마땅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넵! 유 소령님, 승리하십시오!”

일한이 호출을 확인하며 의무실을 나가자마자 주환이 턱을 괸 채 나리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 중사, 양고기 좋아합니까?”

“고기는 다 좋아합니다. 고기와 술 안 좋아하는 군인이 어디 있습니까?”

“유 소령이 자주 술도 사 주나 봅니다.”

“자주는 아니고, 연대장님이 속 썩이면 가끔 뭉칩니다. 참고로 저희 연대장님 심각한 편식쟁이에 술도 못하세요. 회식하면 분위기 다 망치고, 그래서 유 소령님 상대해 줄 사람으로 흔쾌히 자원해서…….”

고기에 정신 팔린 나리가 주절주절 얘기하다가 입을 꾹 다물고 딴 곳을 보고 있는 주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해서 삐졌나?

나리가 고개를 기울여 주환과 눈을 맞췄다.

“부럽습니까?”

얄궂게 웃는 모습이 너무 환해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주환은 픽 혀를 차면서 상체를 젖혔다.

“네. 되게 부럽습니다.”

저 세 사람이 같이 지낸 시간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부럽고 질투 난다.

“박 소령님 다 나으시면, 제가 같이 술 마셔 드리겠습니다.”

하, 주환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여자가, 날 뭐로 보고 같이 술을 마시겠대?

“이 중사, 그 약속 꼭 지키십시오. 전 술 약속 취소 안 받아 줍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손가락이라도 걸어 드릴까요?”

나리가 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골라 보라고 말하자 주환은 왼손을 뻗었다.

“주절주절 잘 얘기하는 거 보니까, 가이딩해도 될 거 같은데.”

그대로 나리의 왼손을 낚아채 그녀의 검지 한 마디를 깨물었다.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나랑 술 마시려면.”

아…….

살짝 깨물렸는데도 왜 속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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