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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8)화 (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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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누구 맘대로 누굴 따라가?

“왜 해군에서 기물 복구 비용을 지급합니까?”

“박주환 소령 때문에 우리 측 에스퍼가 죽을 뻔했습니다.”

“저희 측 가이드도 최 대령님 때문에 죽을 뻔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쪽 가이드의 과실 때문에 사람을 구해야 했거든.”

“아니, 다 때려 부순 것은 최 대령 본인이면서…….”

“그럼 누가 구합니까? 김성권 중령님께서?”

강이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하얀 해군 제복을 입은 대머리 중령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김 중령은 손수건으로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큼! 최 대령, 군은 체계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이 오면, 지휘부에 먼저 보고하고 피해를 최소로 할 수 있는 정신계 에스퍼와 가이드를 투입해서…… 체계적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저희 측에 미리 보고도 없었던 일을 최 대령 독단으로 처리하고…….”

“그러다 남의 A급 에스퍼 죽인 뒤에 뭐라고 하려고?”

“…….”

강은 0이 아주 많이 붙은 청구서를 김 중령 앞으로 쓱 밀었다. 허공에 뜬 청구서를 본 김 중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둘 다 살려 놓은 건, 나야.”

“…….”

“해군이 아니라.”

강이 살벌한 기운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강 대령!”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김 중령이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강을 불러 세웠다. 강은 김 중령의 말을 듣지 못한 척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최 대령님, 반반씩 합시다! 반반씩!”

문 틈새로 김 중령의 제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강은 손가락으로 제 귓구멍을 막았다. 토끼보다 청력이 좋아서 그런가, 귀를 막아도 김 중령이 씩씩거리며 혀를 차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흥, 반반? 치킨도 아니고. 무슨 반반.”

강은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일한의 좌표로 이동한 강은 의외의 장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쯤 일한이라면 주환을 경계하며 나리 옆에서 간호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한은 캄캄한 방에서 태블릿 영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나리는?”

“…….”

두 무릎을 안고 있던 일한이 벌게진 코끝을 훔치더니 강을 돌아보았다.

“강아.”

“……?”

얜 또 왜 이래?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

강은 다시 자신의 귀를 후볐다. 주환 때문에 요즘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녀석들이 늘었다.

“술 마셨어? 갑자기 왜.”

일한은 불만 가득한 양 뺨을 부풀리고 입꼬리를 내렸다.

“꼭 이유를 들어야 해? 우리 사이에?”

“…….”

저놈도 미쳤나?

강은 일한의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우뚝 멈춰 눈살을 찌푸렸다. 강이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며 썩은 표정을 짓자 일한이 버럭 소리쳤다.

“야! 다른 페어들은 사이좋게 손잡고 오붓하게 껴안고 컨트롤 리밋까지 잘 가는데! 넌 어떻게……. 너랑 나는 옛날 옛적에 테스트 때 빼고 손 한번 제대로 잡은 적이 없냐?”

“뭐래.”

“매칭률 수치 좀 재려고 한다! 왜! 10년 전에 측정하고 제대로 매칭률 재 본 적이 없으니까!”

“하아?”

강은 열을 올리며 화를 내는 일한을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일한이 보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쓱 훑었다.

폭주하듯 컨트롤 리밋을 돌파했던 나리와 주환의 훈련장 녹화본이었다.

“박주환이랑 나리, 매칭률 몇 나왔는데?”

강은 일한의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똑, 땄다.

“98…….”

“뭐?”

입가에 닿을 듯했던 캔이 우뚝 멈췄다.

“98.9라고.”

희고 반듯했던 일한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나리가 박 소령 따라간다고 하면……. 다 너 때문이야…….”

강도 믿지 못하겠는지 일한을 밀치고 태블릿을 뺏어 들었다. 일한은 뜨거워진 두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하아…….”

거짓말 안 하고 저 영상을 수백 번은 돌려 봤다. 볼 때마다 겨우겨우 유지했던 평정심과 자존심이 좌절 속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나, 정말 나리한테 잘해 줬는데……. 너 때문에 부대 나간다는 애 잡으려고……. 진짜, 내가…….”

이능력자 협회에서 정한 페어 등록 기준은 파장 매칭률 75% 이상. 일한이 기억하는 그의 매칭 테스트에서도 가장 높았던 수치가 84% 정도. 쌍둥이 페어에게서 종종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긴 했지만, 90% 이상은 드물었다.

[이나리]

에스퍼 등록 번호 : 4201A001

[박주환]

가이드 등록 번호 : 9983AA055

컨트롤 리밋 도달까지 96초 〈위험〉

Esp 파장 매칭률 : 98.9%

“……이 영상, 빼놨지?”

강이 물었다. 일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벌게진 눈가를 훔쳤다.

“S급이면 뭐 하냐.”

“…….”

“저걸……. 저 수치를 내가 어떻게 깨?”

“…….”

“하아아……. 최강, 나랑 수치 안 잴 거면 나가 줘라.”

강은 책상 위에 태블릿을 놓고 스탠드를 껐다.

방을 나와도 방 안에서 기기들이 웅웅 돌아가는 소리와 일한이 바르르 떨며 내쉬는 습한 한숨 소리가 강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나리가 박 소령 따라간다고 하면……. 다 너 때문이야…….〉

강은 문에 기대어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안 그러면 날카로워진 신경 때문에 뭐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놈의 숫자 따위가 뭐라고.”

강은 낮게 조소하며 캔에 입을 댔다. 시원하고 알싸한 알코올이 텁텁했던 갈증을 씻어 주었다.

“하, 누구 맘대로 누굴 따라가.”

강의 혼잣말이 방 안까지 들렸다.

“…….”

일한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녀석은 에스퍼니까 처음부터 숫자에 연연하지 않았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잘난 S급 가이드라서 그녀의 입술이 닿으면, 발가벗겨 품을 수만 있다면 A급의 파장쯤은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콰직.

강은 어느새 다 마셔 버린 캔 맥주를 구기고 퉁, 쓰레기통에 던졌다.

“궁상떨지 말고 자라.”

강은 자리를 떴다. 그 딴에는 최고로 상냥하게 위로해 준 거였다.

스르륵, 일한은 머리를 기울이고 태블릿 위를 톡톡 두드렸다.

〈classified security file #1099923, 삭제하시겠습니까?〉 y/n

“…….”

……톡.

❖ ❖ ❖

의무실 간호병과 가이드가 인제 그만 가 봐도 된다고 했지만, 주환은 밤늦도록 나리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

“이 중사.”

“예.”

나리가 아직도 안 잔다.

“제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합니까?”

수액이 똑, 또옥 떨어지는 것만 멍하니 보고 있던 나리는 주환의 등을 돌아보았다. 먼지투성이가 된 상의가 그의 넓은 어깨에 걸쳐 있었고, 옆구리로 튀어나온 팔꿈치에 파란색 깁스가 비쳤다.

“이 중사 자라고 있었는데, 불편하면 가겠습니다.”

주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쪽으로 쏠려 있던 침대 끝이 들렸다.

“안 불편합니다. 좀 생각할 게 많아서 안 자고 있었습니다.”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주환이 돌아서서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와…….”

나리가 힘없이 웃는다.

“박 소령님 다시 뒤돌아 앉아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예?”

주환은 제 모습을 훑어보다가 다시 나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나라 해군은 배에서 뭘 먹고 지내길래 무슨 몸을 그렇게 무섭게 키웁니까? 아, 심장 아픈 환자한테 해롭게.”

아아.

죄책감에 내내 어두워져 있던 주환에게서 픽, 김새는 소리가 터졌다.

“저희 연대장님 무섭죠?”

“뭐…….”

주환은 얼버무리며 뻐근한 목덜미를 쓸었다.

“성격이 뭐 같아서 맞추기가 힘든 거지, 아주 나쁜 분은 아니십니다.”

뭐야.

몸 좋다는 칭찬에 붕 떴던 주환의 기분이 푹 꺼졌다. 갈빗대가 3대나 나가도록 맞았는데 나리가 강의 편을 드는 것같이 들려서 말이다.

“왜 최강 대령 얘기를 합니까?”

그러게.

왜 자꾸 쓸데없이 강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최 대령님 원망하지 마시라고요. 저야 쉴드 능력자니까 툭하면 최 대령님께 개기고 구박받아도 멀쩡하지만, 박 소령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박 소령님 몸 보십시오. 손해가 너무 막대하잖습니까?”

훈련 첫날부터 저 단단해 보이는 팔뚝과 훌륭한 복근 속에 숨은 갈빗대를 3개나 부러뜨려 놨으니 당분간 페어 훈련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수는 에스퍼가 하겠습니다. 가이드님은 점잖게 지켜보시면 됩니다.”

나도 가만히 있는 성격은 아닌데.

강을 도발할 때부터 이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여태 안 자고 복수할 생각 한 겁니까?”

그런 건 같이 좀 하자고 주환이 말하려고 했는데 나리가 먼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최 대령님께 복수할 능력은 안 되고요. 어떻게 잘 따져 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복수라…….

의무실 근처를 서성이던 강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 나중엔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이 중사, 다 들린다.”

시시덕 웃고 있던 나리의 표정이 뚝 굳었다.

‘나한테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따진다고?’

“아, 제길…….”

이 망할 입.

수화를 배우든가 해야지.

주환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리는 조용히 하라고 검지를 입술에 대더니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강의 부대 안에서 강의 뒷담화를 하는 건, 대마왕을 소환하는 마법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을 직접 대면할 용감한 군인이 아니라면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똑똑.

강은 친절하게 문을 노크했다.

“이 중사.”

그러고는 일한이 앉아 있던 의자를 바짝 끌어와 떡하니 다리 꼬고 앉아 나리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자는 척하지 마라.”

쿠울…….

“성격 뭐 같고 아주 나쁘지 않은 상관한테 따진다면서. 뭐라고 따질 건데? 따져 봐. 들어 줄 테니까.”

드르렁, 드르렁.

“…….”

주환은 갑자기 훅, 하고 나타나 살기를 뿜어 대는 강 때문에 움찔했다. 팔짱 끼고 나리를 쏘아보던 강이 시선을 돌려 주환을 모로 쳐다보았다.

“박 소령도 나한테 따질 거 있으면, 말해.”

“아닙니다.”

“없으면 가.”

“예.”

어? 뭔 일이 있던 거지?

왜, 내가 밖에…….

주환은 멍하니 의무실 밖 복도에 서서 방금 뭔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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