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가드 올리십시오
맑고 청명해 세상이 다 반짝반짝해 보이는 아침이었다. 꿀잠 잔 나리는 낯빛부터 달랐다.
주환을 만나면 꿀잠 자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지.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훈련장에 도착했건만.
“…….”
에스퍼-가이드 페어 훈련 교관으로 알고 있던 곽 상사는 어디로 가고 강과 일한이 훈련장에 있는 건지, 나리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리는 옆에 서 있는 김 상병에게 물었다.
“김 상병, 곽 교관님은?”
“교관님, 갑자기 연락 두절이랍니다.”
“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유 소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는 김 상병은 울기 직전이었다.
“페어 훈련 교관 곽준우 상사는 급성 충수염 때문에 병가입니다. 멀리서 온 가이드도 있으니 오늘은 연대장님과 제가 시범 삼아 임시 교관을 해 보려고 합니다.”
일한은 밝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뭐 하나.
천사님 뒤에 시베리아에서 온 듯한 염라대왕이 서 있는데.
아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어제까지 멀쩡하던 곽 상사가 갑자기 병가라니, 누가 곽 상사 맹장을 일부러 터트리기라도 한 건가?
“세계 특등급 페어가 하는 특훈이니까 잘 보고 배웁시다. 아셨죠?”
마치 햇살 유치원 병아리 반 어린이들을 다루는 듯한 말투에 ‘네, 선생님.’하고 대답할 뻔했다.
“페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이드입니다.”
일한은 강의 어깨를 잡고 뒤에 섰다.
“C급 가이드는 C급 에스퍼 서너 명의 파동을 읽고 제어할 수 있죠. 혼자서 공격대(2명에서 5명) 정도는 가이딩할 수 있어야 하고. B급 가이드는 같은 등급의 서너 명, 혹은 낮은 등급의 분대(대략 10명) 하나. A급 가이드는 같은 등급의 서너 명, 혹은 낮은 등급의 소대(20명에서 55명) 하나. 그리고 저와 같은 S급은.”
일한이 강의 파동에 집중하자 순식간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연대(2,000명에서 5,000명) 하나.”
강의 그림자에 가려진 일한의 눈빛이 매섭게 한 곳을 노려봤다.
“그건 페어 없는 가이드들도 할 수 있는 거고. 페어가 있는 가이드들은 자신의 에스퍼 파장을 안정하는 데에도 총 사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결국, 실전에서 지휘 체계는 가이드의 역량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일한이 주환을 보며 생긋 웃었다.
“여기까진 이해하셨죠? 박주환 소령님.”
저, 여우 같은…….
주환은 입 안을 깨물고 ‘욱’을 삼켰다. 오늘은 여기 있는 병사들과 다를 게 없는 신병 가이드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챕터로 가겠습니다. 이나리 중사 앞으로!”
“네. 중사, 이나리.”
나리는 대열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여기서 최강 연대장님과 시범 대련 할 수 있는 에스퍼가 나리 중사밖에 없어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나리 중사가 좀 고생해야 할 거예요.”
뭐, 이……!
이런 게 어디 있습니꽈아아! 유일한 소령니임!
나리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한을 향해 빌다시피 따졌다.
“연대장님의 어빌리티는 SS급 순간 이동, 공간 제어, 신체 강화 등등이 있어요. 그리고 나리 중사 어빌리티는 A급 쉴드, 신체 강화, 그리고 약간의 염동력도 있고 탐지 능력. 크! 우리 이나리 중사 탐지력, 반사 신경 기가 막힙니다.”
일한은 쌍 엄지를 내밀고 나리를 한껏 추켜세웠다.
그러면 뭐 해.
“자아, 대련 준비!”
신나게 얻어맞을 게 분명했다.
나리는 두 팔을 들어 가드했다. 순간 이동 능력자인 강에게 그녀의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빙의하고 10년간의 경험으로 깨우친 최강을 상대할 방법은 단 하나.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잘’ 막으면 된다.
“…….”
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천천히 나리에게 다가왔다.
이러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리는 눈에 힘을 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볍게 쥐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핏줄이 돋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단단해지며 그녀의 주위에 겹겹이 쌓였다.
지잉거리는 이명이 주환의 머리를 관통한다. 주환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강과 일한을 주시했다. 어디서도 못 볼, 두 사람의 페어플레이(Pair-play)였다.
일한은 저 멀리에서 뒷짐 진 채 싱글벙글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었고, 강은 예민하고 까칠한 눈빛 그대로였다.
터벅터벅, 일곱, 여섯, 다섯…… 그리고 세 발짝 앞까지,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도 나리는 낮은 자세로 가드를 세울 뿐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강이 물었다.
“상대가 이렇게 빈틈을 보여 주는데도 안 움직일 건가?”
“…….”
“그러면 가드를 더 올리든지.”
이걸로 충분하겠냐는 뜻이었다.
머리를 감싼 두 팔 사이로 비치는 나리의 눈은 강의 숨소리까지 감지하고 있었다.
강은 제 기운을 폭발적으로 끌어 올렸다. 일한은 강의 파장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일순간, 강이 사라졌다.
나리는 재빨리 내달렸다. 주환의 눈에는 높이 묶은 나리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굽이쳐 흔들리는 것만 보였다.
‘쾅!’ 하고 충격파가 터졌다.
뿌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가 주환의 눈앞을 가렸다. 주환이 찌푸렸던 눈을 떴을 때, 나리의 등이 보였다.
수증기와 모래 먼지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리고 또, 콰광! 폭발음과 함께 두 번째 충격파가 파도처럼 덮쳤다.
주환은 뒤로 밀렸다. 나리의 앞에 희뿌연 쉴드가 보였다가 투명해진다.
“괜찮으십니까?”
나리가 주환에게 물었다.
“예. 괜찮…….”
“가드 올리십시오. 소령님.”
“……?”
강과 나리의 시범 대련 아니었나?
“지상 몬스터들은 해상 쪽보다 약아서 에스퍼보다 가이드를 노려야 하는 걸 압니다.”
“……!”
“그리고 여기 ‘훈련’은 ‘실전’처럼 합니다.”
그 말과 함께 모래 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일한이 주환의 머리를 차올렸다. 주환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일한의 발차기를 막으면서도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분명, 일한은 저 멀리 단상 위에 있었는데.
“윽!”
오른쪽에서 막았는데 왼쪽에서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일한은 주환의 팔을 잡아 등 뒤로 꺾어 돌리더니 주환의 무릎 안쪽을 걷어차 바닥에 꿇렸다.
“박주환 소령님.”
귓가에 일한의 가벼운 웃음이 닿았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파동을 조절하고 제어합니다. 그리고 페어의 어빌리티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빠드득…….
꺾인 팔꿈치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게, 실전에서 뛰는 가이드의 역할입니다.”
‘잘’ 아시겠죠?
일한이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했다. 아무도 일한의 화사한 미소를 보고 살랑거리는 봄바람 같다고 느낄 수 없었다.
뼛속까지 사무치게 소름 끼쳤다.
정적 속 바람이 불었다.
모래 먼지가 비켜 지나가자 주환을 제압한 일한의 등 뒤로 손날을 찌르는 나리가 있었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는 강이 드러났다.
“뭐가 문젠지, 알겠어?”
“네…….”
“풀어. 네 페어 잘 가르쳐.”
강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리는 손을 내렸다. 제 목을 쥔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숨이 막혀서 나리는 마른기침을 해 댔다.
일한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 띤 얼굴로 주환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래도 박 소령님 체격이랑 기본 체력이 받쳐 주시니 금방 따라오시겠네요.”
“…….”
“자! 다들 잘 보셨죠? 페어는 이렇게 싸우면 됩니다.”
참, 쉽죠?
“…….”
“…….”
뭐 눈에 뵈는 게 있어야 보고 배우지.
훈련장에 모인 병사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과 일한을 보려고 했지만, 시범 대련은 훅 지나가 버렸다. 쾅쾅 두 번 터지고 세 번째 파격음이 들리기도 전에 일한이 주환을 제압하고 일한을 막으려는 나리가 강에게 붙잡히며 끝난 것이 다였으니까.
주환은 욱신거리는 팔꿈치를 잡고 일한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이게, 가이드…….’
마치 강이 두 명 있는 것 같았다.
“팔, 괜찮으십니까?”
나리가 주환에게 다가왔다. 주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나리에게 되물었다.
“이 중사는 괜찮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전 맨날 처맞거든요. 저 어제보단 되게 잘한 겁니다.”
“…….”
“2 대 1이 2 대 2가 돼서 빨리 끝났잖습니까?”
나리는 뿌듯하게 웃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벨 차이가 까마득한데도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가, 어제보다 낙관적인 것 같았다.
후. 저 사람에게 내가 짐이 되면 안 되겠다.
주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가 주환이 그러쥔 팔을 두 손으로 잡아 비틀더니 뼈를 맞췄다.
“저도 왼쪽 팔, 자주 빠집니다.”
나리의 왼쪽 팔꿈치에 보호대가 끼워져 있었다. 주환은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이제 막 가이드가 된 사람이 지금 10년 넘게 페어로 실전을 뛴 상관한테 1대 맞았다고 분한 건가?
나리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박 소령님, 지금도 충분히 잘하신 겁니다. 저분들 개사기 능력자들이라 당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있습니다.”
“예?”
“연습해 봐야겠지만.”
주환은 한결 나아진 팔을 툭툭 흔들었다. 그리고 나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가이딩, 해도 됩니까?”
“실전 중에 매번 물어보실 겁니까?”
당연하다는 나리의 말에 주환이 풋, 웃으며 혼잣말을 툭 떨어트렸다.
“그러네.”
“……?”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훈련은 실전처럼.
오늘부터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나리를 가이딩할 걸 아니까, 저 두 사람이 직접 나와서 일주일간 저를 지켜보려는 속셈인 것이다.
하! 유치하긴!
볼 테면 보라지.
아주, 잘, 똑똑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