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왜요. 저 재워 주시게요?
띠, 띠이이, 띠!
통제실 안 화면의 수치는 그래프가 정한 상한선을 넘자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강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서 그를 말려야 할 사람은 어깨를 떨면서 끅끅 웃고만 있었다.
“유 소령님.”
“아, 배 아파. 정말 미치겠다…….”
일한은 숙실에 돌아가 강을 놀릴 거리가 생긴 게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다.
녹화해 놓을걸.
“어쩌냐, 최강. 라이벌이 또 생겨서.”
1달 전, 나리와 매칭된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강은 기분이 좋다가 싫다가를 반복하며 조마조마했었다.
주환이 속한 해군에서는 로또 맞은 거처럼 뚝 떨어진 A급 가이드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는지 에스퍼를 그쪽으로 보내라고 따졌지.
강은 이능력자 본부에 말이 되는 소리냐고 따졌고.
일한은 일이 이렇게 된 김에 자신이 나리 가이딩을 맡겠다고 옆에서 강의 성질을 긁었다.
최강의 스트레스가 하늘로 치솟던 1달이었다.
일한은 턱을 괸 채로 앉아 테스트실의 나리와 주환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불쌍한 박 소령.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주환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강과 자신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지기 직전이라, 쿨하고 좋은 상사는 못 될 것 같다.
일한은 주환과 같이 온 해군 측 장교와 훈련 일정을 정리하고 숙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캄캄하게 꺼진 숙실 불을 켜고 강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파장을 읽으면 거기 있는 것을 다 아는데 대답이 없었다.
“역대급이다. 최강, 아주 역대급 꼰대 짓이었어. 허락받고 썸 타라니. 정말, 내 인생의 최고 명대사였다.”
“씻고 자라.”
“난 훈련 기간 1달 주려고 했는데, 일주일은 너무 짧고 강렬하지 않냐? 우리도 파릇파릇하던 시절에 반년 걸린 건데 썸 타기도 전에 불이 화르륵 일겠어.”
“씻고 자라고.”
“예예, 연대장님. 가이딩 필요하시면 언제든 제 방으로 오십쇼.”
일한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강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문 안쪽에서 쾅 하고 베개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났다.
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제 가이드를 상대로 주먹다짐을 해도 제 손해일 테니 말이다.
일한은 강의 문 앞에 서서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파장이 방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천천히 순환시켰다.
강을 상대로 이 정도만 해도 일단 불난 집의 불길은 잡아 둔 격이다. 오늘 밤도 강이 제대로 못 잘 것을 알면서 일한은 제 페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잘 자. 강아.”
❖ ❖ ❖
주환이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썸은 모르겠고, 잘 부탁합니다.”
나리는 잠시 주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이고, 내 목.
나리도 여자치고 작은 키가 아닌데, 주환은 저어기 어나더 레벨의 윗공기를 마시는 부류였다.
“박 소령님, 지금 악수만 하는 거 맞습니까?”
“아.”
에스퍼와 가이드는 신체 접촉 시, 가이드가 가이딩인지 아닌지 미리 말해야 한다.
교육받을 때 몇 번이고 들었던 내용이었다. 좀 전에 있던 일을 깜박한 건지, 주환이 황급히 손을 거뒀다.
이제 자신은 일반인이 아닌데.
“깜박했습니다.”
나리는 그가 내밀었던 쪽 손을 내밀며, 씩 미소 지었다.
“지금 다른 에스퍼였으면, 얼씨구나 좋다고 냉큼 손잡아서 박 소령님 가이딩을 쏙쏙 빼 갔을 겁니다.”
“…….”
“악수한 거로 치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 얼굴이 동그래서 그런가, 나리가 입매를 당겨 웃으니 눈꼬리까지 동그랗게 휘었다.
주환은 여기 오기 전에 나리의 사진과 영상을 봤었는데, 그런 것보다, 나리는 사근사근하게 웃는 실물이 더 예쁜 것 같았다.
그래서 일한과 강이 그에게 질투한다고 느끼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 중사.”
주환은 숙사로 돌아가는 나리를 멈춰 세웠다.
“예. 중사, 이나리.”
“신병 때 생각나니까, 나한테는 그냥 짧게 대답하시죠. 그…….”
“네. 알겠습니다.”
주환은 더 할 말이 있는지 말을 끌었다.
“잠은 잘 잡니까? 페어 없는 에스퍼는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들었습니다.”
“잘, 못 잡니다……?”
주환의 질문에 나리는 고개를 들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어봤다.
왜요. 저 재워 주시게요?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리의 눈빛에, 주환은 여기까지 오게 된 여정을 떠올렸다.
지난 1달은 주환에게 혼란스럽고도 설레는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과 매칭된 에스퍼가 있는 곳까지 오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코드 레드가 떴다. 해서 그는 곧바로 그녀가 있다는 의무실로 뛰었다.
피가 뚝뚝 떨어진 복도를 지나 의무실 문을 열었을 때, 두 콧구멍에 피로 젖은 휴지를 잔뜩 쑤셔 넣은 채로 꼴까닥 늘어진 나리를 보았고. 자신은 처음으로 가이딩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냥 거기 서 있는 게 다였는데 말이다.
〈나리 중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드 레드를 받은 또 다른 가이드가 나타났다.
〈어?〉
〈…….〉
주환이 첫눈에 봐도 의무실 안에 있는 가이드와 결이 다른 가이드였다.
너무 잘생겼다.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군 홍보용 모델로 종종 나왔던 유일한이 저 사람이구나’ 하는 거였다. 육군 최고의 아이돌이자, SS급 에스퍼와 페어를 이루며 실전에서 가이딩을 뛴다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상급 가이드였다.
〈나리 중사, 코드 레드 뜨지 않았어요?〉
〈……그랬습니다.〉
〈누구, 십니까?〉
왜 군복이 다른 사람이 제 부대의 의무실에 있는 건지, 일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해군 동백함 부함장, 박주환 소령입니다. 이나리 중사와 매칭 테스트 받으러 왔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곱상한 일한의 얼굴이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반갑습니다. 알파81 특공연대 작전과장, 유일한 소령입니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일한은 나리 옆에 붙어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 후에 강이 해군 장교와 함께 의무실로 들어왔다. 간단한 관등 성명과 사무적인 대화가 오갔지만 일한은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강아, 나리 중사 깨면 내가 잘 말해 줄 테니까 가서 일 봐.〉
〈어. 그래.〉
그 남자…… 고단수였다.
연대장님께 친구처럼 상냥하게 반말하는 데도 사나워 보이는 강이 군소리 없이 의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도 실환가 싶었다.
나리가 깨어나자마자 일한은 주환이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아, 유 소령이 이 중사 가이딩해 주면서 둘이 뭐가 있었구나.’ 싶었는데.
〈유일한 소령님께 감정 없는 에스퍼가 어디 있어요?〉
잠자코 참으면서 자기소개할 타이밍만 보던 주환은 정말 그 말에 뛰쳐나갈 뻔했다. 멀리 동해에서 차출된 커플 훼방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전 그냥 오래오래 살고 싶을 뿐이에요.〉
감정이 상한 주환은 나리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일한은 착잡하고 안쓰러운 얼굴이 되었다.
〈박 소령, 나리 중사가 괜찮다고 하면 무조건 안 괜찮다고 들으세요. 특히, 웃으면 얘 진짜 엄청 아프구나, 하세요. 이 사람, 쉴드 능력자라서 자기 몸 아픈 줄 몰라요.〉
주환은 일한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가이딩을 해 주면 불면증이 괜찮아집니까?”
나리는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
“…….”
받아 본 적이 없구나.
유일한 소령한테서도…….
주환은 다시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이딩해 보겠습니다.”
“에, 예?”
저랑 오늘부터 같은 숙실을 쓰시겠다고요?
이렇게? 갑자기?
아까는 제 손 꼬옥 붙잡고 뺨 비비던 에스퍼가 토끼 눈이 되어서 굳어 버리자 주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악수 말입니다. 그냥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아, 예에. 악수…….”
얼음 땡, 한 것처럼 나리는 뻣뻣하게 세운 몸을 풀고 굽신거리며 주환의 손끝을 잡았다.
에고, 미천한 에스퍼에게 악수를 허락해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가이드님.
“자알 부탁드립니다. 박주환 소령님. 우리 열심히 해서 최강 연대장님 코를 납작하게 해 봅시다.”
나리는 주환의 손끝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주환은 나리의 손을 제대로 고쳐 잡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항상 귓가에 맴돌던 기계 소리, 풀벌레 소리, 잡담 소리, 누군가 몰래 부스럭부스럭 과자 봉지를 까서 먹는 소리, 이 시간이면 항상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하던 라면 냄새, 담배 냄새까지 점점 증발했다.
“아…….”
주파수 맞는 가이드의 가이딩은 이렇게 다르구나. 단단하고 무딘 그의 손만 잡았을 뿐인데 나리는 홧홧하고도 답답했던 속이 뚫린 것처럼 개운해졌다.
소설 속에서는 그랬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강이 일한을 만나고 나서야 어떤 소음이나 냄새의 방해 없이 평온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그래서 저절로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고.
“고맙습니다. 박 소령님.”
나리는 그의 맘을 알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나타나 주셔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강의 대사를 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