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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광공은 필요없어 (4)화 (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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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너네, 내 허락받고 썸 타라고

나리는 슬쩍 주환을 돌아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머리인데도 이목구비가 짙고 강렬해서 그런가, 눈에 띄는데도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는 딱딱한 인상이었다.

“왜 계속 손잡고 있으라는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첫 테스트인데.”

“아……. 보통은 3분 내로 끝나거든요.”

“…….”

“아, 알파고가 잘못되었나? 역시, 컴퓨터로 계산해서 매칭한다고 해 봤자 뭐 막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닌가 봐요.”

“그래서 사람을 보기도 전에 싫다 했습니까?”

“매칭 테스트를 10년간 수백 번 하고 계속 낙방해 보십쇼. 다들 저처럼 됩니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잡고 있던 손아귀가 살짝 풀렸다.

턱을 괸 채로 반대편을 보고 있던 주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생기고 관심 없던 종교에 매달리기도 하고, 나중에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다니까요.”

“…….”

“아니, 저렇게 성격 이상한 최 대령님도 페어가 있는데 내가 왜?”

“풉.”

주환이 픽 웃었다.

박하 향처럼 화하고 상쾌한 기운이 잡고 있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손에 땀 난 것만 신경 쓰이던 중에 확연하게 이질감이 느껴지자 나리는 흠칫 어깨를 떨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나리와 주환의 파장 수치를 보고 있던 강의 표정이 굳었다.

매칭 예상값 87%라는 높은 수치가 오류였던 건지, 60%를 오가고 있었다. 아무리 특이 케이스라고 해도 이렇게 편차가 심할 리 없었다.

몸을 심하게 움직이는 임무 중에는 수치가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매칭률의 절반 정도가 실전에 효과 있다고 칠 때, 60%는 최전방에 서기에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

강은 초조한 마음에 나리와 주환에게 손을 더 꽉 잡아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파장 매칭 수치가 50% 이하로 내려갔다.

“최 대령님, 아무래도 예상 수치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테스트는 여기서 종료하는 게 낫겠습니다.”

“기다려.”

그렇게 더 기다려 보자고 한 게 벌써 다섯 번째. 이 정도면 거의 억지였다.

“강아, 그만하자. 벌써 30분째야.”

“10분만.”

“최강.”

“쟤 페어 없으면 안 돼. 죽는다고! 10년을 기다려서 나온 특이 발현자인데, 10분을 더 못 기다려?”

일한은 알았다며 입을 다물었다.

강의 목줄을 쥔 일한이 말려도 소용없자, 연구원들은 화면에서 눈을 돌린 채 오류 원인을 분석하기 바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마이크 버튼에 손가락을 올리고 초조하게 시간을 재던 때, 답답한 폐부를 훑는 바람이 느껴졌다. 강은 눈을 들어 주환과 나리를 쳐다보았다.

서로 다른 굴곡으로 엇갈리던 파장과 가이딩이 갑자기 비슷하게 흘러간다.

에스퍼 등록 번호 4012A001

가이드 등록 번호 9983AA055

Esp파장 매칭률 87.3%

정면의 모니터 화면에 새로 계산된 매칭률이 떠올랐다. 하지만 굳이 화면을 보지 않아도 강은 주환의 가이딩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것들이 진짜.”

아니, 일반인보다 청각이 예민한 강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내 욕 하니까 파장이 맞는다고?

박주환, 쟤도 개나리 과야?

이러다간 골치 아픈 부하 놈이 하나 더 늘게 생겼다.

“전역? 부대 이동 신청? 어디 백번 해 봐라. 받아 주는 데 있나. 꿋꿋이 개기는 녀석을 받아 주고 있는 은혜도 모르고 뭐?”

강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씩씩대자, 갑작스러운 수치 변화에 놀란 연구원들은 지직거리며 점멸하는 시스템에 두 번 놀랐다.

일한이 서둘러 강의 팔을 붙잡았다.

깜박거리던 전등과 화면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숨을 내쉰 일한은 강을 뒤로 물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최종 매칭률 88.9%, 테스트 종료합니다. 수고했어요. 나리 중사, 박주환 소령. 내일 훈련 시간에 봅시다.”

테스트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가 테스트실에 울렸지만 나리는 꿈쩍할 수가 없었다.

“테스트 끝났는데.”

주환은 테스트가 끝났다는데도 멍하니 제 손을 잡은 나리를 흔들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나리는 전보다 발갛게 생기가 도는 얼굴로 주환을 올려다보았다.

“박 소령님,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겁니까?”

“뭐 말입니까?”

주환이 무슨 말이냐며 멀뚱멀뚱 나리를 내려다보았다.

“되게 시원했습니다.”

“……?”

뭐가 시원하다는 거지?

여기 약간 더운데.

“박 소령님 가이딩…….”

나리는 두 손으로 주환의 커다란 손을 꼭 잡고 활짝 웃었다.

“꼭, 물파스 바른 거 같아요.”

물파스……?

옛날 영화에서 모기 물렸을 때, 할머니가 ‘욘석아! 이게 직빵이여!’ 하고 퉁퉁 부은 부위에 발라 주던 그 구시대적 유물 말하는 건가?

“세상에. 박 소령님께서 마사지해 주시면 엄청 시원하겠다! 와아, 대박!”

여태껏 안 만나 주겠다고 우기던 에스퍼가 맞긴 한 건지. 나리는 신상 안마기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침을 흘렸다.

나리가 주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주환은 얼른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신체 능력이 월등한 전투형 에스퍼의 악력은 생각보다 셌고, 그녀 주위를 맴도는 파장이 묘하게 그를 간지럽혔다.

“저, 저기. 이 중사?”

목석같던 주환은 크게 당황했다.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다 보니 벽까지 밀렸다. 주환은 나리의 머리를 잡고 끙끙 버티며 통제실 쪽을 향해 외쳤다.

“유 소령님, 이 중사 눈이 풀린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은 겁니까?”

삑.

마이크가 켜지고, 가이드 선배의 상냥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정상입니다.]

이, 이게 정상이라고??

“최강 대령님께서도 이러셨습니까?”

“뭐? 누가, 어째?”

두꺼운 철로 된 테스트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었는데 어디선가 강이 불쑥 나타났다. 심기 불편한 표정과 펄펄 끓는 흉흉한 기운에 눌려 주환은 숨이 턱 막혔다.

“이 중사.”

강은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서서 나리를 불렀다. 나리는 나사 빠진 듯이 헤헤거리며 주환의 손등에 뺨을 비비고 있다가 움찔거렸다.

그런데 떨어지기는커녕 짐승처럼 이를 세우고 강을 째려보는 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개나리를 처음 본 주환의 얼굴이 더 허옇게 질렸다.

나리는 소리도 없이 구시렁구시렁 입을 뻥긋거렸다. 분명, 상욕이었다.

“이나리, 이리 와.”

남자가 들어도 혹할 만한 중저음.

계급도 안 붙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주환은 나리와 강 사이에 뭔가 있나 싶었다.

“…….”

나리는 싫은 투를 풀풀 풍기면서 주환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강 앞에 섰다.

강은 지친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너 저기 구석에 가서 머리 박고 제정신 좀 차려.”

“…….”

“대답.”

“네…….”

으음, 아닌가.

나리가 테스트실 구석에 머리를 박고 침통하게 서 있는 동안, 강은 주환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이었다. 육군 최고 SS급의 에스퍼를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것은.

벽에 짓눌린 듯이 서 있던 주환은 자세를 똑바로 잡는 것도 잊은 채 강을 마주 보았다.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눈빛과 달리 뜨겁고 흉포하게 일렁이는 파장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강은 주환의 멱살을 홱 잡아 올렸다.

“박주환 소령, 가이딩 컨트롤 똑바로 안 해?”

“네?”

“나 덮쳐 달라는 듯이 가이딩을 뿌리고 있는데, 이 중사가 손만 잡는 게 용한 거다.”

“…….”

“발현하고 1달 동안 뭐 한 거야. 교육 안 들었어?”

“……들었습니다.”

주환은 시선 둘 곳을 모르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직 자신의 가이딩을 잘 느끼지도 못해서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었다.

모두의 가슴을 스미는 듯한 청량한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강은 주환의 옷깃을 놓고 눈꼬리를 치켜떴다.

“이 중사, 임무 빼 줄 수 있는 건 일주일이야. 이 중사 빠지면 우리 부대에 피해가 커. 그러니 일주일 안에 실전 투입 가능하게 해 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중사.”

강은 손을 허리에 올리고 나리를 돌아보았다.

테스트실 구석 꼭짓점에서 머리 박고 있던 나리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엣, 중사 이, 나, 리!”

“박 소령, 직급만 소령이지, 막 군대 들어온 가이드 취급 해. 알았어? 네 짬밥이 더 많잖아. 정신 제대로 차려라.”

“네, 알겠습니다!”

최강의 살벌한 명령에 나리의 심장 근처를 간지럽게 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주일.

주환과 나리는 갓 군대 들어온 이등병처럼 바짝 긴장한 채로 서로를 흘긋 쳐다봤다.

그 틈새를 비집고 강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미리 일러두겠는데.”

일한이 없는 SS급은 감히 기어오르기 힘든 벅찬 산이었다.

“사내 연애 하다가 전장에서 많이 죽었다.”

“…….”

“…….”

“그러니까, 너희 일 똑바로 안 하고 함부로 썸 타면 전장 나가기 전에 내 손에 죽는 줄 알아. 내 허락받고 썸 타라고.”

허?

강의 어이없는 명령을 듣는 순간, 주환은 확신했다.

강은 자신을 질투 중이거나, 아니면 나리가 말한 대로 정말 최악의 상사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가이드고 뭐고 동해 해상에 있는 군함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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