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치 (1)
벚나무에 흐드러지게 핀 봄.
새하얀 벚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삼십 일도 채우지 못하고 떨어질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벚나무에 얽힌 함의는 서문세가의 기풍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큰 경고가 되었다.
번영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찾아올 영락을 경계하라.’
경고를 되새긴 서문경은 벚나무 사이를 지났다.
걸음을 딛는 보폭이 의식하지 않아도 일정하다. 다행인 일이었다.
어려진 신체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뜻이니.
저벅, 저벅.
일정한 걸음이 길게 이어졌다.
벚나무가 어느덧 보이지 않을 때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도련님.”
주백경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서문세가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
명가의 일공자가 아니라 평범한 소년으로 위장할 때였다.
서문경은 행장에서 미리 챙긴 옷을 꺼냈다.
“삼베냐?”
“안쪽에 부드러운 천을 덧댔다고 합니다.”
“다행이네. 오래 걸을 때 쓸릴 일은 없겠어.”
삼베옷으로 재빨리 갈아입곤 머리털을 어지럽혔다.
효과는 확실했다.
어디 귀한 집 자식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짓궂은 아이로 변했으니까.
반면에 주백경은 어색했다.
“으흠, 흠.”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매무새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서문경이 손가락으로 흙을 문대고는.
“으헉!”
주백경의 뺨에 길게 그었다.
까무러치듯 놀란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그제야 서문경은 흐뭇한 미소를 빼물었다.
“이제 좀 다른 사람 같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잖아. 나 이런 거 입을 사람 아닌데, 같은 모습도 그렇고…… 흠. 호칭도 정리할까? 형?”
“……이것 참.”
주백경이 고개를 털었다.
뺨에 그인 낙서를 당장 닦아 내지 못하는 것이 통탄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듯.
“도련님.”
“형.”
“……동생아, 왜 도보를 고집하는 거냐? 마차를 타도 될 것이고…… 명가의 자제로서 품위를 지킬 생각도 없는 거냐?”
주백경의 눈빛에 의문이 한가득 담겼다.
동생으로 부르는 거야 이해가 된다.
천무학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체를 숨길 수 있을 테니까.
‘근데 걸어서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서문경은 주백경의 속내를 손쉽게 꿰뚫었다.
안 물어봤다면 섭섭하게 여길 정도로, 처음부터 의도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손쉽게 대답했다.
“경험을 쌓으려고.”
“경험이라니?”
“형도 강호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고…… 나도 마찬가지잖아? 천하를 둘러보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아이다운 생각과 웅심(雄心)이 뒤섞인 한마디.
주백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이긴 했구나, 하는 내심이 훤히 보였다.
물론 본의는 달랐다.
‘호위의 견문도 쌓을 겸, 무공사전을 써먹을 시간이 필요해.’
열네 살.
천금과 같은 나이이자 시간이다.
나무 기둥을 쌓느냐와 쇠기둥을 쌓느냐가 갈렸다.
천무학관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거기서 뭘 하느냐지.’
사교의 잡스러운 계략을 막고 누구와 연을 맺느냐가 달렸다.
급하게 도착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천금을 날리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지금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한계를 가늠해야 했다.
가늠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지평(地平)을 열고 넓혀서 기둥을 세우고 정경을 가꾸어야 한다.
갈구하는 자만이 많은 것을 쟁취하기 마련.
‘천무학관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겠지.’
그동안 무공사전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주백경이 들으면 아연실색할 이야기였다.
마주치는 무인마다 시비를 걸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의지는 명확했다. 목표 또한 있었다.
-서문검법은 노납이 본 검술 중에서 가장 직선적이고 패도적이요. 가꾼다면 천마에게 대적할 신공이 되거나 맹탕이 될 것이오.
무명신승(無名神僧).
멸문한 소림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승의 조언이다.
비록 천마와의 승부결에서 전사했지만, 그가 남긴 말은 오롯이 남겨졌다.
따라서 서문경은 가전 무공을 신공으로 만들기로 했다.
“서문검법 말이야.”
“예…… 아니, 응.”
“여섯 초식을 두 배로 늘리면 어떨까?”
“……뭐?”
예상한 반응이다.
주백경의 시선이 따가웠다.
호북성까지 걸어가는 것과 아예 다른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서문경은 진지했다.
“군문의 검세(劍勢)는 극히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어서, 개인을 상대하는 무림의 검공과는 달라. 긴밀하게 모여 있는 적을 빨리 처리하고 군진을 파헤치는 검의가 요체지.”
“…….”
“우리가 무림인과 싸우게 된다면 이게 발목을 잡을 거야. 작약을 터트리는 것 같은 힘과 속도를 가지고 있지만, 고수에겐 통하지 않을 거고.”
경험담이었다.
적어도 전생에선 그랬다.
관존으로 불렸음에도 동격의 고수가 갖춘 무학에 도달하진 못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과 내공, 육체로 갈대를 붙잡아서 꺾었을 뿐이다.
지금의 고찰로 새삼 깨닫는다.
‘아쉬워하고 있었구나.’
무림의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했지만 부족함을 알았다.
다만 상황이 급해서, 언제 천마가 올 줄 몰라서 덧붙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비밀 창고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상승의 무학이 담긴 비급들로 갈증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후회를 없애겠다는 일념.
그건 열네 살로 회귀한 지금도 여전했다.
“무림의 것을 배워서 채울 건데, 형은 어떻게 생각해?”
“……허.”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열네 살이 할 말이 아니다.
납치당한 직후에 내용물이 뒤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을 잘 알았다.
보은의 마음이 호기심을 덮었다.
“무림인과 직접 싸운 적은 없지만, 눈을 희롱하고 어지럽히는데 일가견이 있었지. 전장에선 잡기에 불과해도 저들이 선호하는 일대일의 생사투에선 다를 것이다. 네 말이 맞아.”
“검 말고 경공이나 신법, 보법은 어떨까?”
“……검법을 고친다면 몸을 움직이는 방법도 고쳐야지. 서문의 검은 승마술에 어울리는 감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겠지.”
서문경은 턱을 매만졌다.
고칠 것이 많았다.
검법 말고도 무예십팔반을 다듬을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천마는 그랬다.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이 기이한 열기를 낳았다.
‘그놈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서문경의 시선이 신비한 무공사전을 향했다.
머릿속으론 서문검법을 떠올리고서 왼손으로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겼다.
[서문검법]
[여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군문의 검법이다. 전장에서 태어나 살기가 짙고 지극히 실전적이다.]
-일초 비검절우(飛劍絶雨)
-이초 일검적심(一劍赤心)
-삼초 서풍광아(西風狂牙)
-사초 청운적하(靑雲赤霞)
-오초 번검유회(繁劍遊回)
-육초 검견불퇴(劍見不退)
백지에 검붉은색 글씨가 나타났다.
혹시 몰라서 주백경의 눈치를 살폈는데, 글씨가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이미 익힌 건 직접 익히거나 책장을 찢어서 즉시 펼칠 수 있다는 글귀가 없네.’
서문경은 한 가지를 짐작했다.
만일, 자신이 무언가를 익혔을 때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익혔다면…… 무공사전이 알려 주리란 예상.
안심되는 것과 동시에 짜증이 차올랐다.
“서문검법을 완벽하게 익혀도 이길 수 없는 놈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하…… 동생도 참! 그런 놈이 있었다면 북적한테 어찌 연전했겠어!”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주백경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걱정을 풀어 주려는 배려가 담겼으나 서문경은 웃을 수 없었다.
이미 겪은 일이다.
‘지금의 서문검법으론 대성해도…… 천마를 이기지 못해.’
그렇다면 무명신승이 조언한 대로 신공을 추구할 뿐이다.
사락, 사락.
서문경은 신비한 무공사전을 쥐고서 자신이 아는 가전 무공을 전부 기록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참았다.
근기(根氣)는 어렸을 때부터 타고나서 버티는 데 무리가 없었다.
‘전생에 겪은 한계를 모두 기록했으니, 이제는 지평을 넓혀야 할 때야.’
홍화연에게 이겨서 홍가권을 얻었듯.
천무학관으로 가는 여정을 천금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형.”
“……으응?”
“가는 길 다 조사해 왔지?”
“나한테 맡겨.”
주백경이 자신 있게 말했다.
지역마다 존재하는 강자.
그들과 절대 마주치지 않고 천무학관까지 안전히 데려다주겠다는 신념이 돋보였다.
문제는 사고를 치는 게 막기보다 쉽다는 점이다.
서문경은 이러한 속내를 숨기고서 물었다.
“서문세가 근처엔 뭐 없지? 설마 군문 근처인데.”
“애석하지만 있습…… 아니, 있어.”
주백경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의 호위로 있기 전에 다른 업무를 봤을 테니 한 번쯤 부딪쳤을 법했다.
스윽.
괜히 왼손에 든 무공사전을 매만졌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고수와 부딪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안전을 도모해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서문경의 목소리에 의구심이 담겼다.
“누군데?”
“검치(劍痴)라는 별호의 고수야. 자기 말곤 자격이 없다고 검을 부수는데, 살인은 꺼리는지라 선을 넘진 않아.”
“오호.”
살인을 꺼리는 검의 고수라.
그야말로 무림행의 첫 상대로 제격인 인물이 아닌가?
서문경이 탄성을 흘리자, 주백경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으, 그. 설마 부딪칠 생각은 아니지? 가늠조차 안 되는 고수라고.”
“그래?”
서문경은 입맛을 쩝 다셨다. 아쉬움이 컸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고수가 있는데 주백경이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 안 되나?”
“굳이 이상한 사람을 봐야겠어?”
아이 앞이라고 비속어를 참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냥 대놓고 말했다.
“그만큼 미친놈이야?”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주변 산책 좀 하다 보면 하나둘씩 들리더라고.”
“허.”
주백경이 나지막이 흘린 탄식에 서문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탄식할 일은 아니지. 유약한 애 챙기면서 다니긴 싫잖아?”
“아니…… 그래. 됐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건지, 주백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이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서 뭐 어쩌려고?”
“무림의 선배한테 조언 좀 구하고. 검 좀 잠깐 배우고. 그 정도?”
이왕 말하는 거 뻔뻔하게 했다.
자신의 미소를 본 주백경이 잠시 먼 산을 봤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눈빛이었다.
“어쩌다 이런 주인님을 모시게 됐는지.”
“허락해 줄 거지?”
“정 안 되면 몰래 갈 거잖아?”
“……흐흐.”
서문경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그럴 작정이었다.
‘살인을 즐긴다면 도망쳐야겠지만, 꺼리는 고수라면 손 좀 섞을 수도 있지 않나?’
하물며 언젠가는 천마를 주축으로 한 사교 집단과 싸워야 할 운명이다.
그때를 위해 인연을 쌓아야 한다면 온건한 성향의 고수가 낫다.
서문경은 눈을 찡긋거렸다.
“형, 이왕 정해졌으니까 곧바로 갈까?”
“……어휴, 휴.”
주백경의 한숨이 늘었다.
그에 반해 서문경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하기만 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