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무공사전 (3)
서문세가.
무림에 속하지 않은 군문세가이나,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사천성의 명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세작을 심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 친구야! 그걸 따질 수나 있겠나? 관무불가침을 먼저 건드리면 명분이 없어질 걸세.”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
하지만 배분이 높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다.
서문세가는 늘 무림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알아도 따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힘이지.”
“근데 대체 어떤 미친놈이 서문세가의 소가주를 건드렸단 말인가?”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서문세가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걸세.”
그 서문세가가 나섰다.
사천성에 벌어진 납치 사건은 열흘 안에 해결되리라고, 수많은 무림인이 예상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믿기질 않는군. 소가주가 그런 무위를 숨기고 있었다고?”
“예. 이인 일조의 군진을 주도하여 적을 몰살하셨습니다.”
“소가주가 다 컸구나.”
호위가 아니라, 작은 소가주가 크게 활약하였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안 가주.
철인(鐵人) 서문이현이 일 년 만에 웃음을 보였다는 것을.
* * *
쏴르르…….
연못을 새 물로 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곡물을 찌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사소하지만 그리운 온기.
서문경은 정신이 들었음에도 한동안 눈을 감았다.
한낮이라 그런지 햇볕이 얼굴을 뜨겁게 달궜다.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맺혔다.
“고요하네.”
평화로웠다.
천마에게서 되찾고자 한 일상이 고개를 돌리면 있었다.
무엇보다, 전생에선 이러지 못했다.
어리고 겁 많았던 자신은 한밤에 서문세가에 도착했었다.
‘주백경을 사지에 두고서, 그를 구하는 것조차 무인들에게 맡기고 도망쳤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주백경과 함께 아이들을 구했다.
한밤의 냉기가 아니라, 한낮의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하.”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근육통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지난 싸움에서 있었던 혹사였다.
‘그나저나 여긴 내 방인가?’
한동안 햇볕을 쬐다가 문득 상반신을 일으켰다.
소년의 방답지 않게 아기자기한 장난감 하나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공간.
아버지 서문이현의 손길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러다 침구 옆 책상에서 작은 함과 편지를 발견했다.
“……인장?”
서문세가의 가주가 썼다는 것을 알리는 인장.
그것이 편지가 접힌 부분에 찍혀 있었다.
기절한 사이에 아버지가 들르신 듯했다.
“그냥 말로 하시지 뭘 귀찮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소가 짙어졌다.
힘 있고 똑바르게 쓴 필체.
누가 서문세가의 가주 아니랄까봐 무뚝뚝하기가 글씨부터 뚝뚝 묻어나왔다.
그 내용도 아들이 아니라 군관에게 전하듯 사무적이었다.
-이번 사건에 소가주 서문경의 공이 적지 않으므로 영약 하나를 수여한다.
-가주, 서문이현.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편지.
하지만 오랫동안 서문이현을 본 서문경은 알았다.
저 안에 담긴 애정을, 소가주로 삼은 것을 뿌듯해하는 마음을.
‘솔직하지 못한 건 젊을 때도 마찬가지셨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편지에서 작은 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 서문이현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공을 치하하거나 영약을 수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자기가 수집하는 영약이라면 더더욱.
“냄새 좋네.”
경험상 자소단(紫霄丹)이다.
서문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함을 열었다.
“역시.”
화산파의 도사가 몇 년에 걸쳐서 연단하는 영약.
하나를 취하면 십 년에서 삼십 년의 공력을 증진할 수 있다.
내공이 심후한 내가고수가 도우면 엄청난 힘이 될 터.
마침 자신에겐 가까운 내가고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도와주면 최고인데, 공짜로 해 주진 않겠지?’
문제는 서문이현이 가족한테도 상벌을 들먹일 정도로 쩨쩨하단 것이다.
영약을 줬으면 알아서 소화하라고, 그것도 소가주에게 주는 숙제라고 말할 무신경한 사람.
‘뭐. 나중에 주백경한테 부탁하면 되려나.’
서문경은 일으켰던 상반신을 다시 뒤로 뉘었다.
몸을 쉬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냥 막연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평화롭던 어린 시절.
소중함을 모르고 그냥 흐르게 둬 버린 시간이었다.
“아, 좋다.”
꽃이 피고 나비가 넘노는 날.
따스한 온기가 흐드러지게 넘치는 봄.
평생 후회하던 사건을 해결했다는 만족과 행복이 천마와 싸우며 공허해졌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전생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지금이 꿈이 아니라면?’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뭘 해야 할까?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하나 믿고 싶었다. 이어 가고 싶었다.
십수 년 동안 품고 살았던 후회를 풀고서 첫걸음을 새로 떼었으니까.
그 걸음의 끝에 누가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천마.”
무예십팔반.
검, 도, 창을 비롯해 강호에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며.
그걸 소림사를 주먹만으로 멸문시켜서 증명한 괴물이자.
전인미답의 경지인 신화경에 다다른 유일한 마인.
‘그놈을 어찌 꺾는다?’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서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천마에게 날렸던 마지막 일 초식이었다.
어쩌면 신화경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격.
그 감촉이 손끝에서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천마 그 새끼가 했는데 자신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즐거운 방법은 따로 있었다.
‘남한테 깽판을 치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지.’
전생에서 정의맹이 패배한 것은 무림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마교가 강호를 공격하기 전에 했었던 사전 공작.
서문경은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서문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걸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천천히 계획을 짜 맞춰 가던 순간.
“소가주님, 가주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주백경의 목소리.
서문경은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갑자기 떠오른 잔꾀가 계획을 밀어낸 것이다.
끼이익……!
자소단이 든 함을 곧바로 열어젖혔다.
꿀꺽.
서문경은 자소단을 날름 삼키고 가부좌를 취했다.
‘도와주시겠지.’
알아채도 뭐, 설마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기라도 하겠나?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겐 자소단을 무리하게 먹은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이제 여기서 기침 한 번 해 주고.’
“크흑!”
“소가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열게.”
당장 문짝을 부술 듯한 주백경과는 다르게 무덤덤한 아버지의 목소리.
서문경은 심법을 운용했다.
잠깐 사이에 자소단의 양기가 기경팔맥을 두드리면서 몸부림을 쳐 댔다.
‘위태롭게, 살짝만 붙잡아 두고…….’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보면 아버지도 만사를 제쳐 두고 도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네 아비다. 네 속을 모를 것 같으냐?”
“무슨 말씀입니까? 소가주님이 위험하신데요!”
“주 무사는 경이가 얼마나 영악한지 모르는가? 분명 내가 도와주리라 생각해서 먹었을 걸세.”
무덤덤한 목소리에 얹어진 약간의 노기.
아버지, 서문이현을 화나게 해 버렸는데…… 놀랍게도 웃음이 나왔다.
‘꿈이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군말 없이 도왔겠지.’
지금, 이곳이 현실이라는 증거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자신의 미소를 본 서문이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
“가주님 노여움을 푸시지요.”
“내가 왜 화를 내겠나? 소가주가 주 무사와 함께 많은 아이를 구하는 공을 세웠는데.”
“……그, 그러면은.”
“그냥 해 본 말일세. 너무 오냐오냐하면 소가주의 버릇이 나빠질 테니까.”
스윽.
등 뒤에 서문이현이 앉았다.
먹물 냄새가 밴 손이 등에 대어졌다.
단지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고통스러워도 참아라. 네가 벌인 짓이다.”
“…….”
서문경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통은 없었다.
시간은 제법 걸렸다.
자소단의 기운을 단전에 자연스럽게 녹이기 위해 서문이현이 모든 심력을 쏟은 것이다.
그 결과는…….
주륵, 주르륵.
세맥에 쌓여 있던 노폐물을 배출하고 삼십 년의 내공을 단전에 쌓았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어린 나이에 열린 내가고수의 길.
서문경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앞으로 이틀은 정무(政務)를 보지 못하고 쉬어야 할 터.
자신의 등에서 손을 뗀 서문이현이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잔꾀를 부려서 이 지경이 되었다. 이유가 무어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크게 혼날 판이다.
서문경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답을 말했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약하면 어느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요.”
“네가?”
“……예?”
“주 무사에게 들었다. 네가 주도한 군진으로 아이들을 납치한 무인을 죽였다고 말이다. 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냐?”
어쩐지 등이 따가웠다.
미리 준비한 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날카로운 시선.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서문이현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사실, 힘이 부족하단 건 구실이고……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주가 아니라 아버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서문이현이 주백경에게 말했다.
“주 무사,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게.”
“예.”
끼익…… 탁.
주백경이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서문경은 머릿속에 짜 맞춰 가던 계획의 첫 단계를 입에 올렸다.
“저는 소가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서문이현은 눈을 크게 떴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소가주가 되어서 기뻐하던 서문경이 입에 올릴 말이 아니었다.
파격이 아니라 천지개벽.
바둑판 자체를 엎어 버릴 줄은 몰랐기에 생각이 수습되질 않았다.
바로 그때, 서문경이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한 가문의 소가주답지 않게 자칫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를 도박을 벌였습니다.”
“…….”
“부족한 배움을 채우고자 천무학관으로 가고 싶습니다.”
서문이현이 침음을 삼켰다.
천무학관.
호북성에 위치한 무림맹 직속 학관이다.
사천성인 서문세가와 거리도 멀뿐더러 서문경이 갈 곳도 아니었다.
“천무학관이라면 무림의 영역이다. 서문세가의 적자인 네가 갈 곳이 아니야.”
칼같이 거절당했지만,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서문경은 다시 한 수를 두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다른 뜻을 품게 되었습니다.”
“무림의 학관 말고 홍 장군께 몸을 의탁하여 배우거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변하지 않습니다.”
“……으음.”
서문이현이 침음을 흘렸다.
언젠가 뒤를 이으리라 생각한 서문경이 무림으로 향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비로서 아들의 웅심을 억죌 수 없는 법.
이번 일로 서문경의 무재(武才)를 보았다.
그렇다면 등을 밀어주는 것이 전부다.
‘……라고 생각하겠지?’
서문경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당장 전생에서 동생이 무림에 뜻이 있다고 했을 때, 서문이현은 말리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을 뿐.
“네 약혼자는 어찌할 것이냐?”
“……예?”
“설마 까먹은 것이냐? 홍가의 여식과 한 약혼 말이다.”
“아, 그거.”
전생에선 호위를 버리고 도망친 남자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파혼당했는데.
지금은 주백경과 함께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았나?
‘이를 어쩌지.’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서문경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안 된다.”
서문이현이 서문경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