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악의 (1)
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마기가 서문세가를 뒤흔들었다.
적마가 내뿜은 힘은 가히 혈신(血神)!
서문경이 은둔한 사이에 적마는 적혈마공을 대성한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허어…….”
저런 엄청난 힘을 내뿜고도 서문패에겐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불가능한 짓이지 않나.’
망치로 판자를 때리는데 정중앙만 타격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적마가 펼친 무위는 이것과 비슷했다.
실제로 서문세가가 불타는 와중에 정중앙의 서문패만 멀쩡했으니까.
‘일단은 멀어져야 한다!’
서문패는 발로 바닥을 긁으며 적마에게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적마가 그걸 좌시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서문패의 도주를 적마가 천천히 뒤따라갔다.
마기가 번뜩이고, 불꽃이 튄다.
적마의 등 뒤로 시뻘건 혈화가 만개하며 서문세가가 불길로 집어삼키려고 했다.
이대로라면 서문세가는 끝이다.
서문패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강한 분노를 담아 외쳤다.
“천마는 죽고, 칠로두와 마교는 패했다. 네놈이 이제 와서 무얼할 수 있겠느냐!”
“…….”
적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파즈즉!
서문패의 머리맡에 벽력이 내리꽂혔다.
머리카락이 그을리며 생긴 불쾌한 냄새가 콧등을 비벼 댔다.
서문패는 공포를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삭였다.
“패배자가 감히!”
서문패의 목소리에 복잡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적의가 적마에게 향했다.
“오냐, 여기서 결판을 짓자꾸나!”
“…….”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과 같이 손가락을 튕기려던 적마가 돌연 손등을 거칠게 털었다.
꽈과광!
적혈마공의 마기가 하늘을 찌그러뜨렸다.
자신을 급습하려던 서문패, 그리고 진무신검과 성하민에게 깊은 내상을 입혔다.
염열천충(炎熱天充).
마기로 이루어진 파동이 단번에 세 명의 전신을 때렸다.
의념으로 펼쳐졌기에 일반적인 무학으로는 받아칠 수조차 없었다.
대항하려면 오로지 의념.
마음만으로 기를 움직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서문패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적은 양의 마기가 한순간 흩어졌다.
“무얼 원하느냐!”
“데려와야지.”
적마의 목소리는 마기로 인해 쇳소리가 심했지만 분명했다.
“서문경 그놈을.”
“미, 미친놈!”
서문패는 죽기로 마음먹고, 검을 꺼내 들었다.
하나 그의 행동은 무척 부질없는 것이었다.
파직!
적마의 손가락에서 쏘아진 한줄기 마기가 검을 관통했다.
“……커헉!”
서문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기도를 바싹 불태우고, 기혈을 마비시켰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고수일지라도 치명상이다.
최소한 몇 달은 정양해야 하리라.
‘과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게 문제지만.’
적마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서문패의 전의가 완전히 꺾인 듯하자, 적마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죽여도 상관없다만, 그때는 서문세가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
“내가 그걸 허할 것 같으냐!”
서문패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칠로두 중 가장 약체로 여겼던 적마가 이렇게 강해지다니!
서문패의 기색을 읽은 적마가 피식 웃었다.
“청마와 흑향 그놈들처럼 날 너무 무시하는군. 날 너무 우습게 봤어.”
“네놈은…… 청마에게 휘둘리던 버러지가 아닌가?”
서문패가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자 적마는 짧게 일축했다.
“약점을 잡혔을 뿐이지.”
“……!”
서문패는 할 말을 잃은 채 기운을 신중히 갈무리했다.
진무신검과 성하민을 비롯해 다른 고수가 서문세가에 있었으니 합격할 요량으로!
하나 서문패의 바람은 그저 바람에 불과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라. 서문세가 말고도 다른 오대세가도 뒤따를 테니까.”
적마의 말에 서문패는 억하심정을 담아 외쳤다.
“이미 이 소식을 들었을 거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나?”
저길 보지, 친절한 웃음을 보인 적마는 손가락으로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무림맹으로 날아가려는 전서구가 화살에 의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 하나뿐이랴.
인편(人便)으로 고용했던 무인이 담벼락에서 풀썩 쓰러졌다.
적마가 서문세가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끝이다…!’
서문패의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떨렸다.
“하하, 하하…….”
서문패가 실없는 미소를 흘리자 적마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자네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그게 무슨?”
“혹시 가주실에 비밀 통로나 그런 게 있다면, 자네가 열어 줘야 하지 않겠나?”
적마의 말에 서문패는 반사적으로 외치려고 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내가 미쳤냐고.
파직!
그 말은 적마의 손가락에 나타난 마기에 의해 재가 되었다.
“하기 싫어도 해 줄 수밖에 없을 걸세.”
“윽, 으으윽……!”
“너무 슬퍼하진 말게. 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처음은 아니지만, 두어 번 정도거든.”
상황이 급박한 이상 행패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적마의 변명과도 같은 설명에 서문패는 검을 뽑았다.
“역시 반쯤 죽여 놔야 기를 꺾을 수 있겠군.”
적마가 적혈마공을 운용했다.
* * *
“무슨 일 있었습니까?”
서문휘는 붉은 얼룩이 생긴 무림맹주실을 보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자 남천웅은 어색한 웃음을 드러냈다.
“서문 가주 말대로 나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었네. 설마 적마가 살아 있었다니! 도움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걸세.”
“그렇군요.”
“그것보다 말을 편하게 하게. 평시라면 모를까, 지금 전권을 지닌 건 자네이지 않나?”
남천웅의 말에 서문휘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명목상 구심점은 무림맹이긴 하나, 현 전쟁을 결정짓는 건 서문세가의 전술이었다.
당초 지원군으로 세우려던 오걸과 십대고수는 무림으로 펼쳐 두었다.
그 덕택에 무림맹주의 암살과 오대세가의 변절을 방비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명은 일부러 지원군으로 두었지만.’
서문휘는 자연스레 한 명의 행방을 찾았다.
“위문엽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자는…….”
남천웅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한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있네.”
“…….”
서문휘는 순간 청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의 기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열양지기를 느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무인의 내력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게 특히 신공의 극에 이른 위문엽이라면.
서문휘의 목소리가 저절로 차가워졌다.
“저번에는 격전이 바빠 제대로 이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걸로 압니다.”
“……알고 있네.”
쿵!
위문엽은 제자리에 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걸 본 남천웅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위문엽이?’
십대고수에서 오걸의 자리에 오른 이후, 서문경을 제외하고 절대자라고 불리는 그였다.
그런 위문엽이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일단 무릎부터 꿇다니?
“이보게 위문엽!”
남천웅의 만류에 위문엽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건 무림맹주일지라도 끼어들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야!”
감정이 격해지자 어투도 난폭해졌다.
서문경에게 은혜를 받았으나 제대로 갚질 못했으니 어찌 무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문엽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두 나 때문이네! 내가 서문세가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아니, 괜찮습니다.”
위문엽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서문휘와 시선을 마주쳤다.
“본가가 기습을 당한 건 오만과 방만이었지요. 우린 형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본가를 되찾고 수복할 겁니다.”
“…….”
위문엽이 조용히 경청하는 듯하자 서문휘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함께 적마를 사냥합시다.”
“잘 알고 있군.”
위문엽의 눈가에 청명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대로 출발하면 되겠나?”
“아니요.”
고개를 내저은 서문휘가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적어도 적마가 천마에 준하는 수준에 올랐다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지요.”
“누굴?”
위문엽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서문패와 진무신검, 성하민이 동시에 당했다는데 어느 누가 나서 줄까?”
“……있습니다, 그런 사람.”
“말해 주게!”
“천무학관.”
“……뭐라?”
“천무학관에서 형님과 함께 공부하고 수련한 친우들 말입니다.”
서문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웃었다.
“그들이라면 본가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고작 의리 따위로 도와줄까?”
위문엽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강호라는 세파에 너무 닳아서, 이제 의를 믿기 어려운 거겠지.
하지만 서문휘는 여유로웠다.
서문경이란 무인이 얼마나 깊은 인연을 쌓았는지, 동생인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가 있어서 칠로두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도 안다.
서문경의 말에 황금 백 관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안다.
“저만 믿고 갑시다.”
서문휘는 곧바로 전서구를 날렸다.
* * *
“제기랄!”
무림맹에 도착한 연준호는 평소답지 않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줄 알았더니, 적마 그놈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맙소사.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어서 출발하자.”
양무연이 한숨을 내쉰 그때.
“잠깐!”
창가에서 둔걸과 청겸이 몸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를 두고 갈 셈이었냐!”
청겸이 강하게 다그치자 양무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또다시 위험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 솔직히 경이의 행방이 불분명하잖아?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말릴 거라면 하지 마.”
청겸이 어깃장을 놓자 양무연이 잠시 단어를 골라냈다.
“내가 알아보기론, 적마가 무림의 일소를 원한다고 말했어, 그치?”
“전서구에 적힌 걸론 그래.”
“그 일에 신창양가도 도울게.”
그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남천웅이 깜짝 놀랐다.
‘반쯤 경쟁 상대나 마찬가지인 신창양가가 서문세가의 일을 돕는다면……!’
서문세가처럼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군문이 아니던가?
어쩌면 더욱 강한 아군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걸 서문이현에게 배워서 알고 있던 서문휘는 미간을 좁혔다.
“진심이오?”
“예. 그것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솔직히 신창양가는 내부 싸움이 더 많았으니까. 서문이 싸움의 해결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양무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신창양가가 케케묵은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몰라.’
양무연이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서문휘는 대답을 미루기로 결정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때 대답하겠습니다. 형과 아버지의 뜻이 필요하니.”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