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41화 (239/250)

천의 (2)

각오는 그렇게 다졌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머리를 방망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제대로 된 생각을 품는 것도 조금씩 어려워졌다.

그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반드시…… 네놈을 이기고 말겠다.

-천하를 정(正)하게 밝혀다오.

전생에 천마와의 싸움을 천명한 기억과 수많이 죽어 나간 사람의 유언.

그 모든 집착이 서문경의 정신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래서 부서지지 않았다. 포기하거나 낙관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숙적으로 생각한 천마가 있었기에 강해질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라.

천주 위에서 싸웠던 수많은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다, 압니다, 알아요.”

평안한 여생을 사는 것도 좋다.

좋은 이야기였다.

평생 무림제일고수로서 대접받고, 어린 무관들과 대화하며, 조금씩 가르치면서 살아가면 행복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누구나 바랄 인생이겠지만, 서문경에겐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천수는 됐어.”

서문경은 두 번 모두 무관으로 살아갔다.

대명의 시대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덜어 냈다. 성하민의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천마를 없앤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도 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무관은 품어서는 안 된다.

일말의 불안감.

그마저도 유심히 지켜보고서 대처해야 한다. 그렇기에 서문경의 칼날은 무뎌지지 않았다.

“천마를 이기게끔 도와준 천의, 당신의 저의가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도전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그저 범접하는 것만으로 이 모양이다.

내력이 온전하였더라도 멀쩡한 행색으로 마주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

천의는 싸워서 쟁취할 상대였지, 무릎을 꿇고서 충성할 하늘은 아니었다.

서문경의 하늘은 대명의 황제였다.

“나는 군관이라서, 쉬이 물러나지 못해. 그러니까, 생떼 좀 부리자고.”

쿨럭.

피가 입가에서 토해졌다.

속에 있는 핏물을 모두 게워 내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고통이었다.

“쉽게는 안 된다 이거지?”

서문경은 억지로 피를 삼키며 위로 향했다.

좋게 말해서 치기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함이었다.

무인이 억지를 부리면서 금강석에 머리를 부딪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문경이었다.

“내가, 군관이 될 때 맹세한 게 있거든.”

대명의 칼이 되어 천하를 수호하리라.

누군가는 잊고,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의무.

그것이 서문경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싸움밖에 모르던 서문경을 군관으로 만들었다. 전장의 장수로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천마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의지의 원천은 책임감이었다.

“천마도 해치워 줬잖아? 그러니 이제 얼굴 좀 보자고.”

서문경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비틀어졌다.

“내 마음대로, 직성이 풀릴 때까지 이곳에 있겠어. 당신의 의중을 모두 풀어서 말해 줄 때까지 말이야.”

한낮 군관의 의지가 하늘에 닿는 순간.

저벅, 저벅.

서문경은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천주는 비로소 금강(金剛)으로 빚어졌다.

바로 그때.

-내 뜻을 밝히라는 것은…… 지엄한 율법을 거스르려는 것과 마찬가지. 어찌 천하의 미물이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하느냐?

하늘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뇌명(雷鳴)이 울렸다.

서문경은 조금 전까지 느끼던 통증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격이 오르고도 알지 못함은 어리석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존재가 앞에 있다. 대화를 청하려거든 먼저 입을 열어라.

목소리엔 그 어떤 온정도 없었다. 오만하고 불손했다.

도사들이 왜 하늘은 무정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문경은 그제야 표정을 다잡았다. 어깨를 똑바로 펴고 섰다.

저놈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하려는 것은 천기를 알려고 하는 억지였고, 천마 이상의 혼란을 빚을 수도 있는 짓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부끄러운 짓이라는 건 알지만, 죄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서문경은 품고 있던 본의(本意)를 내뱉었다.

“네 뜻을 이뤄 주기 위해 되살아난 군관의 넋이고, 혼이다. 나에게 작은 온정 하나 베풀어 주기조차 어렵단 말이냐? 그저 천수나 누리며 평안하게 살라고?”

-…….

하늘의 번개가 한순간 멎었다.

서문경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사소한 선물 하나에도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예법이다. 네가 모든 사람이 숭앙하는 하늘이라면…… 적어도 빚을 져선 안 되지 않으냐?”

절규와 같은 목소리가 검해 전체에 메아리쳤다.

서문경은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 내며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작게 흘렀지만, 닦지는 않았다.

그 눈물이 의지를 더더욱 부풀렸다.

“받아 가겠다. 네가 빚을 갚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멱살을 잡아서라도 받아 가겠다!”

-그러한가?

하늘은 여전히, 지독하게도 무정했다.

-나는 율법을 지키겠다. 너는 네가 하려는 것을 하라.

“하, 그렇게 나와야지.”

서문경은 검을 꽉 쥐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격전을 이어 가면서, 마음속에서 불굴(不屈)을 되새겼다.

* * *

“편지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지셨다고.”

서문휘는 서문경이 있었던 처소의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참, 형님다운 방이구나.”

어딜 봐도 자질구레한 것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비급을 쓰다가 흘렸는지 지필묵 자국도 남아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명가의 자제답지 않다.

그에 반해서 도학이 적힌 서적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도사들한테 그대로 줘도 되겠어. 도학은 아예 펴 보지도 않으신 건가.”

참으로 우스웠다.

분명 자기가 이제부터라도 도학을 좀 살펴보겠다고 하였는데.

결국 펴 보는 게 너무나도 귀찮았던 모양이다.

서문경다운 구석이 방 하나하나에 묻어 있어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서문휘의 눈길이 이곳저곳에 닿았다.

그러다가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

자질구레하고, 더러운 방.

둘러보는 것조차 어지러운 공간에서 오직 한 곳만이 깨끗했다.

“형.”

서문휘가 두 무릎을 꿇고서 한 비급을 붙잡았다.

[서문검법 총결론]

서문검법 총결론 옆에 구겨진 종이가 수북했다.

그러나 비급과는 뒤섞이지 않게끔 거리가 꽤 있었다.

‘이걸 쓰기 위해서 몇 번이고 생각을 정리한 건가.’

수십 개의 쌍욕이 쓰여 있질 않나, 대충 쓰면 심상이 알아서 도와주던 게 참 편했다고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사담(私談).

그마저도 서문경다웠다.

서문휘는 비급을 양손으로 잡고서 한 쪽씩 넘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보기 좋게 정리된 묘리.

어느 것도 허투루 흘리면 안 된다는 정신론.

심지어 즐겨 쓰던 파생 초식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지저분한 방과는 달리 아주 깨끗하게 적힌 비급이었다.

분명 심혈을 기울여서 썼을 것이다.

“……이런 걸 쓰고 있다면 진즉 말해 주지.”

헛웃음이 나왔다.

서문휘는 비급을 가장 깨끗한 곳에 내려놓고서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서 서문경이 남겼다는 편지를 폈다.

[서문세가의 첫째아들, 무림제일고수, 천무검왕, 소가주의 형으로서 남긴다.

금방 돌아오마.]

“형님.”

서문휘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데, 그러기가 싫었다.

그렇게 하면 서문경이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유약하던 소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디로 간 건지는 남기고 가야지, 이게 대체 뭐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서 편지를 구길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서문휘는 편지를 비급에 곱게 두고서 방 중앙에 앉았다.

한 시진, 두 시진.

가벼운 요기조차 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서문경이 간다는 곳이 어딜지 고민해 봤다.

하지만 쉽게 떠오르진 않았다.

‘형님이 가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설마 등선이 아닐까? 구파일방의 무공을 그토록 심후하게 배웠다고 하니…….

그 가능성을 점치던 서문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건 아닐 거야.’

하물며 서문경이 먼저 등선한 신선의 바둑판을 닦는 광경이 상상되지 않았다.

서문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 사라지신 건가……?”

개방과 황실에 알리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서문휘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꽈과광!!

거대한 폭음이 처소 밖에서 터졌다.

깜짝 놀란 서문휘는 검을 붙잡고서 문을 박찼다.

감히 누군지는 모르나, 서문경의 처소를 부수게 둘 순 없었다.

그곳엔 처음 보는 무인이 살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그놈이 진짜 기어이!”

그가 영문 모를 소릴 중얼거리기에 서문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뉘시오!”

“서문휘 그놈은 어딨느냐?”

“말하지 않으면 베겠소!”

“그놈이 가지고 있는 서적을 회수하러 왔다고 전해라.”

신비한 무공사전의 이전 주인.

척사광은 살기를 더욱 크게 드러냈다.

다만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바가 있었으니…….

설마 서문경이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천의에게 도전할 격을 갖추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 * *

“쿨럭!”

서문경은 천의에게 수없이 도전하고 깨지길 반복했다.

심상에서 처음 싸운 창왕이 떠올랐다.

도저히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격.

아차 하는 순간에 날아오는 바람은 이겨 낼 수가 없다. 상념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목숨이 달아나고 만다.

아니, 정확하게는 의지를 깎아 내고 있는 것이라.

“포기하지 않아.”

서문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네가 말하는 천하의 한낮 사람 한 명. 그놈이 네가 인도한 길에 따라 여기까지 왔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네 눈이 별 볼 일 없었다는 뜻.”

-용도를 다하지 않았나.

“천명? 그놈의 천명(天命)이니, 천의(天意)는…… 다하면 끝이라는 거냐?”

-무엇을 더 바라느냐. 너 또한 천마나 마교처럼 섭리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냐?

“나의 뜻을 단순하게 뭉뚱그려서 이분(二分)하지 마라. 내가 바라는 것은…….”

군관 서문경.

항상 대명의 검과 방패로서 살아온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

“희롱 당하지 않는 것이다.”

-……?

“나 다음으로, 그리고 이전에도, 누군가가 있었겠지.”

-…….

하늘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서문경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렀다.

“앞으로, 더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서 또 이런 일이 나타나고…… 섭리가 어지러워지면 너는 사람 하나를 징용해서 제 뜻을 이루겠지.”

-그것이 나쁘느냐?

하늘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천하가 도탄에 빠져, 하늘이 마지막까지 돌보지 않아 자멸하길 바라느냐? 그것이 너의 뜻이라면…….

“또, 또, 나의 뜻을 제멋대로 갈음하는군.”

서문경은 웃고 말았다.

저 오만한 존재는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떳떳이 검을 들고 말했다.

“자멸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야. 내가 너를 꺾어서 새로운 하늘이 되는 것 따위, 바라지도 않아. 단지.”

서문경의 심상.

천주가 검에 깃들었다.

“네 뜻이 아니더라도 우린, 나은 길을 걸어갈 것이야.”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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