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4)
‘언젠가 이런 경험이 있었지.’
밤이 다 되어 가는 시각, 서문세가의 수련장.
그때 서문경에게 비무를 청했었다.
상황이나 심기에 따라 싸우는 걸 주저해서야 무인으로 거듭날 수 없다고 말했었다.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유쾌하진 않았다.
압박감으로 흉부가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다.
연준호는 자세를 꼿꼿이 잡고서 암반의 밑면을 노려보았다.
마기가 침습하여 검게 물든 밑바닥.
한두 조각씩 떨어지는 돌멩이에 불길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저걸 맞아도 문제지만, 저게 떨어지면 서문경이나 침투조한테도 거슬릴 게 분명했다.
‘단번에 부순다.’
암반을 통째로 부수고, 먼 곳으로 밀어 버린다.
연준호의 상단전이 크게 열렸다.
줄곧 답답하게 막혀 있던 심상이 희끄무레한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준호가 이루고자 하는 극치.
극치에 오르고서 행하려는 업.
그 모든 것이 단번에 꿰뚫리는 감각이었다.
열린 상단전을 한껏 펼치고자 눈을 열었다.
‘내가 펼쳤던 무학의 한계가 어디까지였지?’
자하신공, 그리고 매화검법.
경력을 삼보와 매화보로 극대화해서 펼쳤던 일격.
……그걸로는 부족했다. 암반을 쪼개는 것은커녕 반도 쪼개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더욱더 여는 수밖에 없었다.
‘찢어져도, 부서져도 좋아.’
한계를 넘은 행공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혈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고 정신이 몽롱했다.
그마저도 천주의 파편이 조금씩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하의 기운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 더…….’
자하신공, 매화검법, 삼보, 매화보…….
연준호란 무인이 아는 모든 무학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한데 그 방식이 서문경의 천주와는 달랐다.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쳐서 물어뜯는 형국이었다. 언제든 상단전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궁리였고 무리한 운용이었다.
그러나 연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코앞으로 낙하하고 있는 암반을 두고서 냉정을 잃지 않았다.
자기(自己)를 걸고서, 적공한 무학으로 이루려는 업을 위해서.
연준호의 의지가 인간이란 껍데기를 부수는 순간.
“……아.”
탈각이 찾아왔다.
수없이 백열하는 시야 속에서 연준호는 손안의 감각만을 믿었다.
“검, 오직 검이다.”
두 손으로 쥔 검에 공력을 때려 박았다.
단 한 초식에 정신을 담고, 업을 담고, 무학 전체를 담았다.
뿌드득.
손목이 시큰거리고 팔뚝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감히 이런 걸 휘둘러도 되겠냐는 걱정도 순간 떠올랐다.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았다.
탈각이 찾아온 순간을 붙잡고서 휘둘렀다.
그 찰나에 생각한 무학의 이름은…….
“검천경(劍天經).”
쩌적- 쿠콰콰쾅!
암반이 여섯 조각으로 쪼개지고는 먼 곳으로 밀려 나갔다.
“됐구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연준호가 전신의 힘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침투조가 서둘러 연준호의 몸을 받아 내기 위해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청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 * *
“보이냐? 네가 자신하던 권능이니 뭐니 하는 게 사라졌구나, 부하와 함께 말이야.”
서문경은 피식 웃으며 천마를 도발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되는 일이다. 대계에 변함은 없다.”
“네가 말하는 대계가 무엇이냐?”
“……등천(登天), 멸세(滅世).”
하늘에 올라 세상을 멸망시킨다.
어린 꼬마가 하면 아직 덜 여물었다고 웃어넘기겠지만, 천마가 말하니 달랐다.
그는 실제로 이루어 내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가능할지도 모를 강함이 있었다.
서문경은 혀를 차며 검을 쥐었다.
“역시 너 같은 놈은 천하에 존재해선 안 돼.”
천주로 펼친 균천관일과 호천풍연을 얻어맞았음에도 천마의 사지는 멀쩡했다.
오히려 주변에 널브러진 바위나 나무 따위가 무성했다.
그러나 서문경은 한 가지를 직감하고 있었다.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다.’
처음 마주할 때만 해도 피부가 찢어질 정도였던 마기가 조금씩 약해져 간다.
힘이 무한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천마가 오래 살았다고 한들 마인의 껍데기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서문경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다.”
“……뭐라?”
“운명과 싸우기 전에 좋은 연습 상대가 되어 주고 있으니까.”
“……!”
천마의 표정이 구겨졌다.
서문경은 이미 자기를 이겼다고 여기면서, 천의와 맞서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천마에겐 그것이 몹시 역겹게 느껴졌다.
“우연과 기적 덕택에 목숨을 연명하였으면서…… 하늘과 싸우겠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래, 네가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겠지.”
천마가 말하는 바를 서문경도 알았다.
저깟 놈이 자기를 가로막는 꼴이 몹시 화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이 자길 살려 준 하늘과 싸우겠단다.
천마가 생각하기에 어처구니가 없을 터였다.
서문경은 피식 웃고서 말했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대화가 돼먹질 않는군.”
천마가 마기를 사방으로 퍼뜨리자, 서문경도 기수식을 취했다.
‘사연을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피차 길어질 뿐이다.
서문경은 천주를 모두 퍼냈다.
‘설령 이번 초식을 마지막으로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 몸이 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고난은 이미 숱하게 겪어 보지 않았던가?
‘두려워할 것은 없어.’
천주와 신비한 무공사전을 통해 익힌 모든 무학을 단번에 뒤섞어서 펼친다.
서문경은 검의 상태를 살폈다.
도철이 봐준 것도 무색하게도, 천마와 여러 차례 부딪치다 보니 이곳저곳에 금이 갔다.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른다.’
검의 한계를 알아차린 서문경이 보신경을 펼쳤다.
“자, 오너라.”
그걸 본 천마가 쌍마멸천장과 천마군림보를 동시에 펼쳤다.
꽈과광!
모산이 크게 뒤흔들렸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진동이었다.
서문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먼저 하산해라!”
“하지만…….”
위문엽이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어서!”
“……알겠소!”
등 뒤에서 연준호를 부축하고서 자리를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문경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군.”
침투조까지 휘말릴까 봐 펼치지 못했던 마지막 초식.
천주가 천마의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 크기를 부풀렸다.
콰르르르……!
‘뭐, 그래도 거창한 이름은 필요 없지.’
종결식(終結式).
천마와 얽혀 있던 굴레를 끊는 데 이만한 이름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서문경은 숨을 크게 머금었다.
가공할 만한 마기 때문에 어두운 장막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지만,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너를 넘고서 하늘에 도전하겠다.”
“……너를 죽이고, 하늘을 찢어 버리리라!”
서문경과 천마가 부딪치는 순간.
쿠르르르……!
모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갖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세상이 어둡게 물들었다.
시각, 촉각, 육감까지도 무의미한 찰나의 연속.
심적권청의 순간에 서문경과 천마는 무수한 합을 나눴다.
힘과 기교.
마인과 무인의 싸움이 무한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건 서로 알았다.
“……크윽.”
“큭!”
천마의 상반신에 긴 검상이 그어지면, 서문경은 한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그 싸움에서 서문경이 우위에 있었다.
“종결식.”
“……!”
천주가 별안간 일곱 갈래로 갈라지며 수많은 무학을 드러냈다.
그건 서문경이 한때 익혔던 무학이기도 했고, 찰나의 번뜩임으로 만든 기예이기도 했다.
그 심상이 검의 끝에서 그윽하게 펼쳐졌다.
“너를 죽일 초식의 이름이다.”
파스스…….
마침내 검이 수백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천주와 수많은 무학으로 이루어진 조각이 천마의 전신을 찢었다.
하지만 서문경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신비한 무공사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물에 의존하여 여기까지 온 이때야말로, 가장 큰 값을 치러야 할 순간일 테니까.
“……역시나.”
서문경은 하늘을 보았다.
진무신검을 포함한 오걸과 십대고수가 천마의 죽음을 기뻐하는 이 와중에도 하늘의 어둠이 걷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 *
한 달 뒤.
서문경은 집으로 돌아갔다.
따뜻한 공기가 만연한 봄이다.
다시 돌아온 산에는 꽃 향이 어우러져 있었다.
“뭐 이렇게 늦었습니까?”
그렇게 투정을 부리는 주백경에게 서문경은 천천히 다가가 웃었다.
“……하늘과 싸우기 전에 잠시 천하를 돌아보고 왔지.”
“공자님이 무슨 하늘과 싸워요? 그런 말씀 말고, 대답을 확실하게 해 주셔야죠!”
얼핏 보았을 때 토라진 것 같아도, 주백경은 불그스름한 낯으로 서문경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 온기.
미소와 훈훈함이 서문경에게 잦아들었다.
‘따뜻하다.’
온기가 느껴지는 서문세가.
그 안에서 서문경은 자신의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가벼워지면서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누워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멈춰있지 않았다.
“주 무사.”
“……예?”
“오랜만에 말이지. 대련이라도 할까?”
그 말에 주백경은 질색했다.
“이제 몇몇 살아남은 칠로두의 목만 치면 공자님이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까?”
“뭐야, 외적을 처리하려면 아직 군관으로서 일이 남아 있거늘.”
“군관은 뭐 쉬는 날도 없답니까?”
“없지. 그래서 대명의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거야.”
이래서야 이야기가 끝나질 않는다.
주백경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검을 들었다.
주변에서 시선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지만, 서문경과의 대련은 늘 이런 식이었다.
싸움이라는 것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선공은 양보하지.”
서문경의 말에 주백경이 피식 웃었다.
모산에서 천마와 싸워 이겼다더니, 이제는 선공을 여유롭게 양보하는 도량을 갖추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거짓말.
촤르륵!
서문경의 검강이 순식간에 주백경을 압박했다.
“뭡니까?”
“적의 말을 너무 쉽게 믿으면 안 되지.”
서문경은 가볍게 웃으며 주백경과 수차례 대련했다.
천마를 죽였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긴장감.
아직 풀리지 않은,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신비한 무공사전에 얽힌 문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서라면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소회
* * *
“뭐야, 지금까지 애들이랑 놀아 준다고 두문불출했던 게냐?”
서문패의 괜한 타박에 서문경은 건네려던 술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서문패가 식겁하여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흠, 자세히 보니 애들의 실력이 아주 늘었어. 제대로 배우긴 했구만!”
“그렇죠?”
서문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잉, 쯧! 못 봐주겠구만.”
그 말에 술을 등 뒤로 숨기니, 상도덕이니 뭐니 하며 서문패가 열변을 토했다.
서문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잘 안 들리는데요?”
“네가 별의별 사람을 다 불러서 그러지!”
저 말대로.
서문경은 강호를 주유하면서 그동안에 만난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부터 시작하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까지 서문세가를 왕래했다.
개중에는 가면을 쓴 자까지 있어 신비감이 더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게 다가서질 못했다. 신분을 묻는 일조차 없었다. 마인일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불과 열흘 전 일이다.
가면을 쓴 황제가 찾아온 것은.
“……싸구려군.”
툭.
잔을 내려놓은 황제는 열의 금의위를 대동한 채 축하연을 감상했다.
가면을 쓴 탓에 조금 갑갑하긴 했으나, 세속에서 신분을 밝힐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서문세가의 잔치에 황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면 또 다른 불만을 야기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황제의 집요한 시선이 서문경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서문경이 황제에게 다가섰다.
“술은…… 당연히 마음에 안 드시겠지요?”
“본인이 만족할 술이 있었다면, 술도가를 내 집으로 불렀을 거다.”
입에서 찔끔찔끔 나오려는 본 좌니 천자니 하는 단어를 막으니 자연스레 말이 짧아졌다.
전쟁 이후로 황권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어법(語法)을 교정했더니 일상 대화를 잘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심 씁쓸해진 황제는 서문경에게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지.”
“제가 직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말이 끝나고 서문경은 입을 닫았다.
분명 과거에는 황제에게 많은 걸 따지고 싶었던 것 같은데.
막상 그런 상황이 되니 말을 꺼내기가 궁벽했다.
여기서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인은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네.”
“……?”
“악의적인 건 아니고,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사교들과 맞서려는지. 본인에게 힘을 빌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홀짝.
황제의 잔이 비워지고, 그 옆에 있던 금의위가 잔을 다시 채웠다.
“자네는 어떠한가? 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저는.”
서문경은 솔직하게 품었던 생각을 토로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사교를 저렇게 방치하나 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가…… 뭐 그런 생각도 했고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위에 있던 금의위가 매섭게 노려봤다.
그걸 앎에도 서문경은 하던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걸 경험하고, 전보다 많은 사람을 만남에 따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황제가 흥미로운 눈으로 경청하자 서문경은 서문세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돌아보았다.
때때로는 미안함에 젖었고, 웃기도 하였으며, 슬퍼했다.
“언젠가는 모든 게 천의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
“뭔가 일이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도철을 보내 준 게 최선의 방법이었겠지만, 뭐 어쨌든 천자께서도 저한테 빚진 것 아니겠습니까.”
서문경은 자신의 뜻을 밝히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황제에게 고언을 들려주어야 앞으로의 세상이 더 평안해질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앞으로 평안한 천하를 잘 다스려 주십시오. 그것만 잘해도 빚은 갚은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서문경의 시선이 서문세가의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
서문경은 자신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 시선을 눈치챈 황제가 은근슬쩍 농을 던졌다.
“서문세가가 무림의 왕이나 마찬가지인데, 국교가 될 생각은 없는가?”
“새삼 느낀 건데 욕심쟁이십니다.”
황제의 가면 밖으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어, 당신만 한 고수는 이제 없거든. 기왕이면 중화의 미래를 위해 합류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서문경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오히려 황제가 서문세가에게 베풀고 싶은 입장이었다.
“이제 공사도 끝났으니, 더 필요한 건 없나?”
“필요라.”
서문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넌지시 저었다.
필요란 곧 목적, 효율을 간접적으로 의미하는 단어였다.
더 이상 서문경은 스스로를 피곤한 환경에 던지고 싶지 않았다.
당장 옆에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줘야 하는 법이었다.
황제도 그 뜻을 용케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본인도 그 때문에 황도에서 안 나가고 있거든. 당신과 본인은 어느 정도 상통하는 바가 있군.”
“규모가 다르지만요.”
그 말에 황제가 푸핫, 하고 웃었다.
황실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던 웃음인지라 금의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흔들린 가면을 정리했다.
너무나 크게 웃은 탓에 광대가 인피면구를 미묘하게 틀어진 탓이었다.
“당신은 여기서 살아갈 생각인가?”
“글쎄, 잠시 떠나 있을 생각이기도 한데. 하늘한테 좀 따질 일이 있어서.”
언뜻 선문답같이 들리는 말에 금의위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황제는 즉시 이해했다.
“……어쩐지, 부럽군. 당신처럼 강인한 무인은 그런 것도 할 수 있나?”
황제가 다소 침울해하자 서문경은 그의 등을 탁 두드렸다.
금의위가 기겁하는 와중에 서문경이 웃었다.
“축하연인데 어찌 축 늘어지나. 웃으라고.”
“그건 명령인가?”
“그렇지, 여기선 내가 황제거든.”
서문경은 서문세가를 보았다.
“여기서는 짐을 내려놓고 즐겨.”
“그러면 확실하게 책임지게.”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자작하던 것을 멈추고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금의위가 당황하며 그를 쫓아갔다.
‘잠깐만 쉬고 찾아가겠소.’
서문경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의를 이뤘으니, 그 대가는 받아 갈 작정이오.’
* * *
이날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났다.
“오셨어요?”
밝은 웃음이 서문경을 맞이했다.
휘익, 탁.
수많은 청년과 소년이 각자의 실력에 따라 비무하고 있었다.
제대로 초식을 펼치는 것보다 엉거주춤한 움직임이 더 많다. 어쩌다 맞아도 운에 의한 것이 대다수였다.
“요 녀석들.”
서문경은 빙긋 웃으며 아이들을 한차례 지켜보다가, 과거에 새 병사로 들인 청하에게 다가갔다.
“그래, 지낼 만은 하고?”
“지낼 만하다니요? 요즘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그 말에 서문경은 청하의 신색을 쓱 훑어보았다.
자신감 없는 고아였던 아이는 세월의 시류에 묻혀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청하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서문세가의 일원으로 자리했다.
본래 뛰어났던 눈썰미만큼이나 검의 재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무공을 직접 가르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뭐, 제대로 보여 줄 수가 있어야지.’
천마와의 싸움.
그 끝에서 서문경은 모든 심력을 소모했다.
그러나 앞으로 싸울 것이 있다면, 신비한 무공사전에 관련된 무언가.
서문경은 아직도 그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거야.’
금분세수 같은 거창한 행사를 열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서문경은 청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요. 동생들이 많아졌다는 느낌뿐입니다. 가끔 찬장에 숨겨 두었던 찬거리가 사라지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말한 청하가 피식 웃었다.
한 아이의 정수리를 째릿 쳐다보는 걸로 보아 누군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가끔은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이런, 당과라도 사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몇 개를 가져오시든 한 식경이면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겁니다.”
“……요즘 애들은 먹성이 좋구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서문경은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이 뜨였다.
서문경의 발걸음이 구석에서 마보세를 연습하고 있는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야.”
“……예?!”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탓에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서문경은 아이의 무릎이 살짝 굽혀진 것을 보고, 낯빛을 굳혔다.
임전(臨戰)에 가까운 모양새다.
서문경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어, 음.”
대답하길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부쩍 시무룩해했다.
“구(求)씨요. 본적은 연경(燕京)이고요.”
서문경은 아이가 어느 가문의 자식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구횡 장군의 자제로구나.”
“……힝.”
투욱.
힘없이 검을 내려놓은 아이를 보며 서문경은 아직 이름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미안하구나. 이름도 아직 듣지 못했는데 말이다.”
“구상천(求霜天)이요.”
“그래, 상천아.”
실망하는 기색이 만연한 구상천의 모습에, 서문경은 제자리에 앉았다.
“내 이름은 서문경이라고 한단다.”
“서, 서문경! 설마…….”
쉿.
더 말이 나오지 않게 입을 막은 서문경이 빙긋 웃었다.
“내가 유명하긴 하지.”
“그, 그렇다면 아저씨가…… 천마를 죽인 천무검왕이라는 거죠?”
아저씨라는 말에 일순간 서문경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저씨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은지라, 서문경은 구상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저씨라고 하니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에, 예, 형님.”
“그래서, 장군의 자제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와서 검술을 배우려 했느냐?”
그 말에 구상천은 머리를 쓰다듬는 서문경의 손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많은 역경과 고전으로 인해 새겨진 상처.
고대의 마인, 천마를 쓰러트린 손이 바로 저 손이었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지라.
구상천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들을 떠올렸다.
“그, 그거야 당연히 저도 장군이 되고 싶어서죠.”
“왜?”
“제가 막내거든요.”
아,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명가의 여식이나 막내아들은 유력 가문과의 친교를 맺기 위해 혼처를 잡아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구상천도 그런 올가미에 묶여 있었던 것인가.
서문경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직접 배우면서 자기 뜻을 관철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네?”
“여기 있어 봐야 너는 가문 내에서 바깥에서 배운 아이로 취급받을 것이다. 이건 내가 서문세가의 일원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구상천의 눈이 한차례 깜빡였다.
“아닌데요.”
“……?”
“형님께서 아직 모르시는 게, 황실 사이에서…….”
줄줄이 이어진 구상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황실과 군문에서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별하여 서문세가로 보내고 있다.
이를 들은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있었다 보니 사문을 너무 평가절하 하고 있다.
재능만으로는 다른 형제들보다 자기가 더 위일 거라고, 구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치고는 민첩하긴 했지.’
그것도 어린아이가 가질 만한 귀여운 오만이리라. 서문경은 빙긋 웃고는 지나쳤다.
한데, 조금은 의외였다.
‘아직도 욕심을 못 버린 건가.’
그 축하연이 지나고 나서 한차례 토하고 자리를 빠져나갔던 황제가 여태껏 관심을 보이고 있다니.
서문경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