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 (2)
타닥, 타다닥.
한편 서문경 일행은 등산로를 빠르게 주파하고 있었다.
소음을 최대한 죽이고서 빨리 돌파하는 게 답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제갈후의 판단과 침투조의 확신이 있었다.
“거기 누……!”
스걱!
초소의 마인이 반응하기도 전에 처리할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스스로 가진 무공에 대한 확신.
서문경은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휘둘러 떨쳐 냈다.
달밤조차 미치지 않는 암실이었지만, 검이 빚어낸 예기는 어둠마저 가를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때 초소 후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흐으윽.”
울음소리에 담긴 억울함과 분노, 슬픔은 침투조의 낯빛을 굳히게 하는 데 충분했다.
불현듯 한 생각이 손 속을 주저하게 만든 탓이었다.
‘설마 어쩌다가 휘말린 산꾼인가?’
‘마인 대신 평범한 사람을 세워 뒀다면…….’
기감은 아지랑이에 막혀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일 그가 양민이라면 자신들이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요, 갑작스레 만난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도리를 지키기 위해 우를 범한다는 건 도가나 불가를 불문하고 심마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마음은 서문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성하민이 해 준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협의지사란, 모순을 이겨 내야 하는 법이다.
죽이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고, 가진 무공과 권력으로 일을 무마한다면 그것만으로 또 다른 악으로 불릴 수 있노라고.
서문경은 성하민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하던 걸 기억했다.
그건 단순히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먼저 성하민이 경험하였고, 번뇌하였기에 토해 낸 후회였다.
스릉!
서문경이 검을 휘두르자 쾌한 소리가 일 장을 울렸다.
그의 무공이라면 초소와 함께 흐느끼고 있는 마인을 단숨에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그걸 본 나머지 침투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너무도 촉박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그들을 억죄고 있었다.
하나 서문경의 행동은 달랐다.
투둑.
초소를 베어 낸 서문경은 단숨에 마인의 견정혈을 점혈했다. 점혈에 신경을 제법 쓴 만큼, 일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청마가 죽으면 제정신을 차릴지 모르니까.”
팽사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실로 영웅이군.’
팽사환은 저도 모르게 영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에는 그저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다급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급박하기 그지없던 성정은 온데간데없고, 침착함이 남았다.
그때 서문경이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앞으로.
간단한 수신호와 함께 서문경은 신법을 펼쳤다.
간혹 튀어나오는 함정은 검으로 즉각 베어 내거나 옆에 있던 진무신검이 처리했다.
또, 그런 상황을 한번 맞이해서일까.
서문경은 일 보 더 앞으로 걸어, 마인과 술법에 잠식된 무인을 가늠해 냈다.
전자는 가차 없이 베었지만 후자는 마혈이나 훈혈을 제압하는 것으로 그쳤다.
서문경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술법에 잠식된 무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충족감으로 인해 일그러진 환희로 가득했다.
“네 살배기 아이를 배어 본 적이 있나?”
“…….”
그 말에 서문경은 무인이 도의에서 벗어났음을 직감했다.
아이를 죽이고도 저리 뻔뻔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손등에 두드러진 핏줄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맥동했다.
손 속은 그만큼 신속하게 행해졌다.
빠득!
서문경의 왼손이 한순간 길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뱀처럼 무인의 목을 휘감았다.
한번 펼쳐지면 무조건 상대의 목을 꺾는다는 교룡수의 일 초가 무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뚜둑.
목이 부러진 무인은 바닥에 쓰러지고도 짧은 시간 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맥을 부수고, 신체의 생로를 터트렸음에도.
서문경은 마교의 술법이 아는 것보다 훨씬 흉악한 마공임을 깨달았다. 턱 끝에 깊은 주름이 아로새겨졌다.
[아무래도 진짜 적수는 저 앞으로 가면 나오겠지.]
‘…….’
[도망치기가 불가능할 만큼, 안쪽으로 끌어와서 싸우겠다는 거야.]
서문경은 땀에 젖은 얼굴로 침투조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무인이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상승 고수 이상이니만큼, 마교가 얼마나 흉한 술법을 가졌는지 깨달았을 터였다.
게다가 안에는 월현이 만든 마인들이 있을 터였다.
어찌 보면 마도 고수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셈이었다. 목숨을 버리는 행위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걸 알기에, 서문경은 모산의 심처로 향하는 길목에서 멈춰 선 채 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뒤로 무를 사람은 가도 좋다.]
그 전음에 위문엽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을 앞으로 향했다.
“호들갑은.”
“……!”
스윽.
복면을 거침없이 벗어 던진 위문엽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 냈다.
죽음을 각오한 이상, 물러섬은 없다는 의지가 눈동자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팽사환이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더 물어볼 필요가 있나?]
[그건.]
서문경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노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마공이 강호에 횡행하게 되면 지옥도로 변하겠지.]
척준환은 서문경을 지나쳐 가며 검을 부여잡았다.
[선배가 무슨 마음으로 물었는지 이해가 가나, 나나 다른 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게요. 설령 바깥으로 나간다고 한들 싸움에서 도망칠 순 없는 법이오.]
[……그건 맞지.]
서문경의 말에 척준환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거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 순리대로 흐르지 않겠소, 선배?]
그 말에 서문경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아아아! 키에에엑!
그곳에는 월현이 만들어 낸 온갖 마수와 시체가 가득했다.
바로 그때.
서문경의 몸이 한순간 휘청거리다가, 끝내 허물어졌다.
* * *
여긴 어딜까?
서문경은 새하얀 세상을 보았다. 무애하고, 무애했다.
너무나도 멀고 기이한 세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북쪽의 설원도 이러지는 않다.
“……선배?”
무의식적으로, 조금씩 의지하고 있던 성하민을 불렀다.
청마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서 충천해 있던 사기가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처하고 만 불가해한 상황.
“일, 이, 삼, 사…….”
서문경은 자신이 아는 숫자와 몇 가지 무학과 묘리를 뇌까렸다.
“정신이 나간 건 아니고.”
스르릉……!
오른손에 거머쥔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한데 태청신공의 기운이 전신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각종 신단으로 얻은 영기나 선기 또한.
서문경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흠, 이건 심각한데. 지금껏 축기했던 모든 게 없어지다니.”
마교가 꾸민 짓이다.
서문경은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고서 이와 유사한 술법이나 환영진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었다.
“……음.”
제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나 정신은 명정했고, 불굴했다.
만일 새하얀 세상이 아니라 불지옥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이건 무명한테 감사해야 하나. 천중수로 이루어진 폭포에 처맞아 봤으니까, 이런 일도 조금 적응이 되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이었다면 별 호들갑을 다 떨면서, 어버버 했을 자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서문경은 달랐다.
또렷한 정신으로 세상을 보았고, 흉수를 파악하려고 들었다.
내공이나 영기, 선기가 느껴지지 않아도……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 보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주술.
청마와 월현이 장기로 삼은 사특한 술법.
‘그놈들이 나를 노렸구나.’
얼마나 갇혀 있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허탈한 표정을 짓게 될지도.
하지만 서문경은 절망하지 않았다.
“나만 이곳에 있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 줄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롭게 웃었다.
평소에 자중하고 있던 헛소리도 뻔뻔스럽게 했다.
“평소에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이제 선배나 사형도 나를 위해서 뭔가 해 줘야지.”
지금쯤이면 침투조는 완전히 혼비백산하고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서문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는 않겠지.”
그곳에 있는 무인은 마교와 대적하기 위해서 각오를 수없이 다지고, 싸워 왔을 상승 고수들이다.
설령 서문경이 아예 사라졌다고 한들 멈춰 서지 않을 것이다.
“허, 그리 생각하니까 여유로워도 되는 거였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였어. 어차피 나를 구하러 선배들이 뭐라도 할 거고, 내가 없어도 움직여 줄 고수들만 모았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시간을 낭비할 순 없는 노릇.
서문경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검을 여러 차례 휘둘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무림맹에서 얻은 심득을 다시 정리할 작정이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면 뭐, 그것도 좋지.”
청마와 월현은 자신을 붙잡아 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서문경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서 무학을 정립하고, 검해를 완성한다.”
이 어쭙잖은 봉인이 풀리는 순간.
서문의 검왕이 마물마저 베어 버릴 칼이 되어서 돌아갈 테니까.
“그나저나 나를 부르는 암구호가 뭐였더라? 음…… 나중에 그걸 잊으면 안 되는데.”
서문경은 조용히 한 단어를 뇌까렸다.
* * *
“서문도래(西門到來)!”
팽사환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사라진 서문경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상정한 모든 작전과 가능성이 무너진다.
“이대로라면…….”
“누가 청마를 상대한단 말이냐?”
화산의 양대호법이 긴장감 어린 기색으로 모산 정상을 노려보았다.
한때 그와 대적했었기에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서서히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서광(曙光)이 있는 법.
연준호는 사라진 서문경을 대신하여 화산의 검을 들었다.
“두려워들 마시오. 그 녀석은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서문경을 따라 하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속으로는 조금 우습기도 했다.
‘아주 예전엔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어쩌다 십대고수들 사이에서 이런 기개를 보이게 되었을까?
떨리려는 내심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을 뿐이건만.
연준호는 자신이 기억하는 서문경의 외피를 뒤집어썼다.
“두려우면 여기서 멈추든가, 떠나십시오. 명색이 침투조인데 가만히 있으면 잠복조란 말이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큭.”
“흐흐, 말 다 했느냐?”
헛웃음을 터트린 팽사환과 위문엽이 연준호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인정을 보낸 셈이었다.
뒤이어 다른 십대고수들과 양대호법이 제정신을 차리고서 자기 뺨을 때리거나, 검을 붙잡았다.
연준호는 그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면서 기다리다가 말했다.
“갑시다. 그 양반이 돌아오기 전에, 아주 끝내 버립시다.”
“그래 보죠!”
양무연도 예전처럼 겁을 집어먹지 않고, 불굴한 정신으로 아지랑이를 노려보았다.
* * *
“하하.”
서문경은 크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든 걸 잊고서 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적을 코앞에 두고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느 때보다도 안심이 되었다.
‘내가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강호에 빛을 밝힐 것이다.
나의 뜻에 동조하는 고수가 무려 여덟이나 있었으니까.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