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 (1)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당금의 무림은 많은 오해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교와의 전쟁이니, 무림맹 또한 사교가 만들어 낸 악행의 결과이지요.”
“…….”
“그걸 알고도 계속 두고 본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계속 두었다가는 선(善)의 방향이 틀어지고 말 겁니다.”
악행이 선행이 되고, 자신의 자식을 바쳐 재산을 부여받는 게 미덕이 되는 세상.
특히 월현은 술법사이기보다 주술사이기에 인신공양에 능했다.
어쩌면 자기 입맛에 맞는 마수를 새로이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고.
서문경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천리(天理)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진무신검은 담담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 갔다.
“호법님들께서 품으신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가 멸문지화로 돌아오는 시대라 두려우시겠지요.”
“…….”
“하지만 인연을 믿습니다.”
진무신검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깊게 파였다.
“화산파는 마교에게 많은 것을 잃었고 그로 인해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이름과 멸시였지요. 그러나 서문경이 진무월 사조의 무공을 우리에게 베풀었습니다. 전 여기서 인연을 느낍니다.”
“……치기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안 해 봤나?”
정중산은 잘려 나간 자신의 오른팔을 앞쪽으로 보이며 깊은 후회를 드러냈다.
“나는 지금껏 불매향을 기치로 삼아, 마교의 잔당과 수없이 싸워 왔다 여겼네. 그런데 사실 마교는 이번 싸움에 관련도 없었다지?”
“하나…… 사백!”
“사실이 그렇게 밝혀진 이상 나는 화산파를 쇠락으로 이끈 천치밖에 되지 않네. 만에 하나라도, 다시 화산파가 쇠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그것만은, 내 대에선 용납할 수 없네.”
정중산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너무도 고독하고, 슬퍼 보여 진무신검은 함부로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때의 혈기는 사라진 지 오래야. 나는 화산파의 정기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네.”
“옳았던 일입니다.”
진무신검은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아무리 마교가 허상이었다고 한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려던 마교였습니다. 한데 어째서 천치란 말입니까?”
“…….”
그 말에 정중산은 침묵했다. 반면 정파로는 입술은 무겁게 닫혀 있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무기력함이 남아 있었다.
“근래 무림에서 도리(道理)라는 말을 꺼내면 바보가 아니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강호의 도리가 웃음거리가 되었는가.
진무신검의 목소리가 자못 무거워졌다.
“화산파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화산은 정(正)의 길을 걷습니다. 설령 그 길로 인해 참담해지고, 고통받는다 한들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동빈 이래로 남겨진 우리, 도맥의 숙제 아니겠습니까……!”
정도(正道), 도리(道理).
그 길을 걷는데 눈치를 봐서야 어찌 도맥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진무신검의 혼이 실린 울부짖음에 정파로는 흐렸던 눈이 맑아지는 듯했다.
정중산 또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웃음 지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기에 화산인가.”
우뚝.
긴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던 양대호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대로 저들이 오도록 그냥 둘 순 없어.”
청마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처음 위기를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차서 축축해질 정도였다.
그 긴장과 막연한 두려움은 월현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말대로…… 저대로 두었다간 강림에 성공하더라도 우리 의도를 전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네.”
마물에게 의사를 전달할 주술을 준비했고, 매개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하지 못한다면?
제단을 통해 마물의 봉인을 풀었을지언정, 의도대로 흐르지 않게 되면 무슨 소용인가?
“모두 죽고 말 테지. 숙원으로 삼았던 주인님께, 신으로 모셨던 무언가에게 말이야. 마교다운 결말도 나쁘지 않지.”
청마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광신을 말했다.
월현으로선 질색인 말이었다.
애초에 속한 교의 성향이 달랐다.
가면을 통해 신에게 의지하여 힘을 빌리고, 나중엔 몸마저 내주는 마교.
여러 주술과 실험을 통해 마수와 마인을 하수인으로 삼는 천마신교와의 차이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선 안 되겠군.’
월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은 청마에게 언짢은 언사 하나 던질 수 없었다.
제단의 주술을 완성하는 순간,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다만 한 가지 뜻은 같았다.
“서문경, 그놈을 다시 노리자.”
“무슨 수로?”
“무계봉신술. 잊진 않았겠지?”
“……아하.”
청마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맺혔다.
한때 천마의 부활을 반대한 칠로두를 가둬 놓고서 정신적인 죽음에 몰아넣었던 술법.
그걸 서문경에게 펼친다면,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억류당할 터였다.
그동안 마물을 부활시키고 뜻을 이루면 그만이다.
월현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모산 중턱 위로 올라왔을 때,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을 때…… 완전히 승기를 잡는다.”
“그거 좋군.”
크큭, 흘흘흘…….
두 마인의 웃음소리가 불길하게 휘감겼다.
그들 뒤로 검붉게 물든 제단이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 * *
“이제 모두 모였군.”
서문경은 여덟 명의 복면인을 보았다.
네 명의 십대고수, 천무학관에서 함께 공부한 친우들, 무림에서 멀어져 있던 화산파의 양대호법.
강호를 쥐어짜도 이번이 아니면 이런 전력은 나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마교를 일소하기 위한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간단했다.
“다른 고수들이 모산 초입에서 불을 놓고 시선을 끄는 동안 우리는 정상으로 향한다. 경로는 제갈후가 만든 지도를 토대로…….”
“잠깐.”
양대호법, 정중산이 서문경의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이 연준호와 양무연에게 향해 있었다.
“우리야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지만, 두 청년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저 아이들도 각오를 다지고 왔소.”
“하나…….”
정중산의 표정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걸 본 서문경은 진무신검에게 들었던 양대호법의 성격을 떠올렸다.
정파로는 괴팍하고, 정중산은 대협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의 성향상 후기지수들은 이번 침투조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나이가 어린 양무연이 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후웅!
장중하게 휘둘러지는 일 창.
그 일 검에 담긴 무게를 보고서 정중산은 잠시 침음했다.
“허어, 저 나이에 저리도 무겁고,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한 번의 창법 안에 변화의 묘리가 있었다.
더더욱 신비한 것은 아주 오래전에 강호를 활보했던 십대고수의 향취가 있었다.
정파로가 걸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신창양가…… 양전의 자식인가?”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지만, 그렇습니다.”
양무연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음,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구만. 내가 아는 그놈은 자기 딸한테 무정하게 굴 놈은 아니었는데.”
정파로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별안간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근데 어린놈이…….”
“여기까지.”
서문경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청량한 기운이 청운으로 유형화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언뜻 보면 불쾌할 만한 방식이었으나 진기에 담긴 진득한 현기는 감정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서문경이 하려던 말을 꺼냈다.
“침투하되, 각자 방향이나 길은 조금씩 다르니…… 숙지하고 갈 수 있도록 하지요.”
“예!”
“……흠.”
서문경은 지도를 펴고서 침투조로 합류한 고수들과 눈을 하나하나 맞췄다.
팽사환, 위문엽, 진무신검, 척준환, 양무연, 양대호법과 연준호.
죽고 다시 살아나서 구축한 인연들.
‘물론 양대호법은 진무신검이 데려왔을 뿐이지만…….’
청마와 월현, 제단에서 부활할지도 모르는 천마까지.
그들과 대적하러 왔다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서문경은 양대호법을 향해 간단한 예를 보였다.
“반갑습니다, 서문세가의 천무검왕입니다.”
“……우릴 기억하지 못하나?”
정중산이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고, 정파로가 입술을 비틀며 무언가를 투덜거렸다.
이에 서문경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중산과 만나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네가 과거에 패기라도 한 건 아냐?]
‘선배…… 지금은 그럴 자리가.’
성하민의 농담에 정색하려는 와중에 정중산이 진실을 말했다.
“농담일세, 이제 그만 올라가지. 가장 중요한 곳이니까.”
그 말에 서문경은 모산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선배의 말이 옳습니다.”
천애의 협로.
상승 경지를 넘어선 이후 처음으로 든 예감. 아니, 거의 예지나 다름없었다.
그 끝이 죽음인지, 새로운 도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았다.
“저 불길한 아지랑이 때문인가, 날이 어둡구나.”
보통 이런 날이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가 끝나고, 어두컴컴한 구름이 화창하게 개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새로운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법이다.
한 시진 뒤.
“이놈들, 다 덤벼라!”
“오대세가의 용맹을 마교 놈들에게 증명해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수들이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다.
제갈후가 표시한 초소에 불을 놓고, 파사의 공력을 운용하여 마인을 끌어내는 등 전력을 다했다.
서문경을 비롯한 침투조가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 * *
그렇게 서문경이 천마의 부활을 막으려고 한 그날.
“황실을 어지럽힌 죄, 목숨으로 갚아라.”
서문이현은 흑향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어린 황제를 돕기 위하여.
칠로두의 한 축을 분쇄하기 위한 도박수였다.
‘경이가 외적을 치러간 이때, 내가 내부의 적을 쓰러뜨려야 함이 옳다.’
이른바 성동격서.
서문이현의 눈이 매서워졌다.
“모두 출진하라.”
“예!”
서문세가의 군인들이 힘차게 외쳤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