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특한 술수 (4)
제갈후에게 지도를 다시 건네받은 뒤.
서문경은 복면을 올려 썼다.
‘일은 잘 풀리고 있어.’
청마와 월현이 꾸민 흉계가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마교의 무서움을 깨닫고는 스스로 고개를 숙여 주었다.
술법의 수준이 저러한데 마공은 얼마나 흉악할지 예상이 가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십대고수 수준이 아니고서야 그들과 검도 맞대 보지 못할 테지요.”
다른 이들을 대표하여 해남파의 장문인, 통천옹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가 제일 늙었으니 뻔뻔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통천옹의 말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수들은 난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가 도사리고 있는 모산.
그곳을 앞에 두고 후방으로 물러서겠다는 것이 몹시 미안했던 터였다.
한편으로는 서문경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
-이래서 초소를 두고서 도망치는 마인까지 일소하자고 먼저 말을 꺼냈구나.
-처음에는 우릴 놀리려고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체면을 세워 주는 일이었어.
마교와 대적할 수 없다고 아예 떠나 버린다면 이번 전쟁을 피해 버린 도망자가 되고 만다.
그건 무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서 서문경이 적절한 절충안을 내놓았으니 체면을 중시하는 고수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겉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
통천옹 옆에서 목허도장이 목을 한차례 풀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오…… 몸이 허락하는 한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었소만.”
“괭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낫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지요.”
큰 반발 없이 따라 주는 것만으로 기쁜 일이다.
서문경도 목허도장과 마찬가지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사이에 선 통천옹이 허허롭게 웃다가 농담을 던졌다.
“그나저나 복면이 꽤 어울리지 않습니까? 제법 써 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
서문경은 속으로 뜨끔했다.
호광성이나 곤륜산에서도 복면을 썼던 적이 있었다.
[도적이랑 다를 게 없네?]
성하민이 뒤이어서 농담을 툭 던지니, 서문경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강하게 나왔다.
“어찌 군인에게 복면을 어울린단 농을!”
“……음, 긴장을 풀려고 한 말인데, 불쾌하셨다면 사죄하겠네.”
“아니야, 내가 오해했네.”
서문경은 여느 날처럼 성하민의 놀림을 한 귀로 흘렸다.
대신 한두 마디 해 놓는 건 잊지 않았다.
‘너 때문에 괜한 화를 냈잖아? 이번 일이 끝나면 대련이야.’
[아니, 갑자기 왜 나한테 화풀이…….]
서문경은 성하민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서 통천옹과 일별했다.
이 일별이 마지막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흘낏 쳐다보는 눈에서 진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보게!”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서문경이 고개를 돌렸다.
종남의 목허도장이 자존심을 억누르고서 자신의 힘을 북돋으려는 표정이 보였다.
“종남의 무학이 어느 문파보다 더 우월하네! 그 정점에 있는 무공을 배운 자네라면, 마교를 무찌를 수 있을 걸세!”
“……예.”
서문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습긴 하지만, 목허도장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일 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서문세가와 교류를 하지요.”
“……좋네!”
목허도장이 극진한 예를 취하고 떠났다.
서문경은 홀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연준호와 양무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분주했다.
“이거 어떻게 고정해요?”
“잘 보고 따라 하라고 했잖느냐……!”
복면을 쓰는 것조차 난항처럼 보였다.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서 가벼운 건량과 검을 패용하고, 복면을 쓰느라 바쁜 모습.
십대고수조차 긴장을 느끼고 있는데, 저 둘만 불안을 잊은 듯했다.
“커흠.”
서문경이 크게 헛기침하자 둘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 경아!”
“왔으면 말을 하지……!”
“나 정도 경지에 오르면 발소리는 자연스럽게 묻히는 법이야.”
허세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진기를 한가득 운용해서 밟는 게 아니라면 걸음 소리 따윈 바람 소리보다도 가벼웠으니까.
그러나 양무연에게는 믿기지 않은 듯했다.
“꼭 그렇게 우리를 놀려고…….”
“복면을 못 써서 날 찾는 건 좀 우습더라.”
저희가 아니라 너.
서문경이 콕 집어서 놀리자 양무연이 몸을 부르르 떨고, 연준호가 껄껄 웃었다.
그러다 한 가지를 툭 던지듯 물었다.
“너희는 어때?”
“뭐가요?”
“곧 모산에 오를 텐데, 무섭지는 않아?”
그 물음에 양무연이 자세를 달리했다.
“……무림맹에서 출발할 땐 그랬지. 달리면서 숨이 모자랄 땐, 청마와 싸우고 있다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달렸어.”
“…….”
“근데 여기까지 오니까 긴장이 없어지더라. 아마 선배들이 긴장되고 그러는 건 힘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겠지, 하하.”
“하하.”
서문경은 가볍게 마주 웃고는 두 친우에게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렸다.
저벅, 저벅.
걸음을 걷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진기가 만든 삼보.
그것이 바닥을 때리고, 태청한 기류가 위로 솟구쳤다.
그 과정을 본 연준호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매화보의 환보구나.”
“그래도 뭐, 매화보처럼 화려하지는 않잖아.”
“두 무공에는 없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아직 매화보의 진정한 묘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래. 허공에 발을 내디디면서…….”
“……그런 방도가!”
시시껄렁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무학을 열심히 논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것처럼, 다시는 기회가 없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묻고 대답했다.
그 옆에서 양무연은 조용히 경청했다.
‘지금 이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
모산을 코앞에 두고서 무인의 감각은 매 순간이 지날수록 첨예하게 날카로워졌다.
그러다 문득, 서문경은 두 친우를 바라보았다.
젊어도 너무 젊기에 나올지도 모를 문제를 짚고 가기로 했다.
“망설이지 마.”
“……예?”
“검을 휘두르고,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데 망설임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실수하게 된다. 준호가 제일 큰 문제겠지만, 무연이 너도 마찬가지야.”
연준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마인과 몇 차례 싸웠고, 목을 베어 봤으니까.
그러나 서문경이 보기엔 아직 강호에 발을 내디딘 지 얼마 안 되는 어린애 같기만 했다.
“마교는 어떤 방식으로 싸워도 이상하지 않아. 목숨을 구걸하거나 네가 아는 사람으로 위장해 올지도 모른다. 주변을 어둡게 하고서 성한이로 위장할지도 모르지.”
“그건…….”
“그래서 암구호를 정하고 갈 거다. 나를 부르기 위한 특정한 암구호도 마찬가지로 말이야.”
청마가 나타나는 곳에 서문경이 있어야 한다.
이번 침투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청마에게 많은 고수가 희생돼서는 안 됐다.
서문경은 두 가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고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약해져선 안 돼. 의심을 멈추지 마라. 상대는 마교라는 것을 말이야.”
“……예.”
연준호와 양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시 굳혔다.
마교를 상대하면서 어떤 정(情)도 떠올리지 않기를.
오직 싸워서 살아남는 데 집중하기를…….
* * *
한편, 같은 시각.
다수의 고수가 입산로에서 소란을 피우면, 서문경을 비롯한 정예가 모산으로 침투하여 청마를 제거하고 제단을 부순다.
말이야 쉽지 모산 앞이 워낙 훤한지라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모산의 입산로 자체가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진입하는 순간 들킨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예는 모산의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무림맹의 일군사가 모산으로 향할 길을 모색한다고 했으니까 조금은 기다리겠지만, 아무래도 그곳을 지킬 마인이나 무인이 한둘이 아닐 거요.”
“무인?”
“마교의 술법이 있으니까.”
“…….”
마교의 술법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청마의 노예로 만든다.
문제는 그게 겉으로 태가 나질 않으니, 정찰하려는 무인의 운신이 위험했다.
‘그나마 미리 조사해서 다행이지.’
만일 그런 재주가 없었다면 침투한다는 계획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리라.
진무신검은 복잡한 심경을 유지한 채 천막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열린 천막 사이로, 화산의 양대호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장문인이 신경 써 준 덕에 늙은 몸이나마 잘 지내고 있었지.”
양대호법의 말엔 어딘가 불만이 엉겨 있었고, 딱딱했다.
모산의 침투를 도와 달라고 부탁할 때부터 이 묘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득은 했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진무신검에게 양대호법은 여태까지 숨겨 온 화산파의 칼이자,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양대호법 중 형인 정파로에 의해 침묵이 깨졌다.
“이번에는 모산으로 침입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화산파의 기둥을 완전히 잘라 버릴 생각이냐? 너와 우리가 만일 그곳에서 죽는다면 화산파는 어찌하란 것이냐?”
정파로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지만, 후폭풍이 어찌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생긴 고집이었다.
진무신검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이해했다. 이해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지금까지 쌓아 온 화산파는 허리부터 꺾이게 되니까.
그리되면 화산파는 구파일방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전진칠자의 후계자 같은 전통은 다른 문파로 넘어가게 될 테고, 진무월이 그토록 노력했던 과거조차 퇴색될 터였다.
“화산파의 전철을 다시 밟으라는 게냐?”
정파로의 물음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건 자신이나 양대호법 같은 늙은이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모든 걸 다 바쳐 이룬 것이 날아간다. 잊힌다…….’
생각만 해도 추위가 엄습했다.
머릿속이 꽉 막히는 듯한 착각이 일고, 어금니가 꽉 맞물렸다.
‘하지만 설득할 자신은 있다. 할 수 있어.’
진무신검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으로 양대호법을 바라보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