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 (2)
“이제 목숨을 걸 사람만 남았군.”
서문경은 무림맹에 남은 무인들을 보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
십대고수와 그에 준하는 상승 고수들.
그러나 마교와 직접 대적하고 제단을 부수기엔 불안했다.
“개인적으로 더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전서구을 보내 주게. 모이는 곳은 모산과 가까운 마을이 될 거야. 기왕이면 다 늙어 가는 호법도 괜찮겠군.”
“왜입니까?”
“지금 떠난 무인들은 아직 성장할 시간이 남은 사람이지만, 문파에서 가만히 은거하고 있는 사람은 완성되어 있지 않나? 손이 있으면 더 불러서 써야지.”
서문경의 말엔 거침이 없었다.
“어차피 마물이 부활하면 누구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해. 하물며 칠로두가 도주한다면? 그들이 만들어 낸 마수가 각지로 흩어진다면 또 어떨까?”
그 마수들이 영성이 깃든 대지에 터를 잡게 되는 가능성.
그것까지 고려하면 마교의 잔재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선 더 많은 고수가 필요했다.
기왕 하는 것, 완전히 뿌리 뽑을 필요가 있었다.
서문경은 어제 비무했던 십대고수에게 말했다.
“어제, 나를 눕힌 적이 있던가?”
“……없었소.”
“서로 전력을 다했을 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나?”
그 말에 위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나머지 십대고수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한들, 서문경이 의도적으로 보인 약점일 것이 뻔했다.
이에 위문엽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무인이라는 것들이 기개가 좁쌀만 해서는…… 그냥 가능하다고 해야지.”
“그걸 멍청하다고 하는 것이다.”
남천웅이 가볍게 받아치고 진무신검이 중간에 끼어들려는 찰나.
서문경이 입을 열었다.
“그만한 고수가 바로 칠로두다. 청마에 준하는 위협을 준비하고 있을 테지. 전에 제갈준과 위문엽을 습격했던 월현처럼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제갈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가 그만한 고수를 암살자로 키웠다면, 다른 가능성도 재고해 봐야 하오. 가장 무서운 것은 각 지역을 노리고서 마인들을 양성하여 동시에 치는 짓이겠지.”
“그래서 관로 같은 고수를 동행시키지 않고 나가게 한 거야.”
서문경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사실은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갖다 붙이니 말이 제법 그럴듯했다.
“음…….”
“그런 뜻이.”
무인 몇몇이 서문경의 말에 감탄했다.
하지만 서문세가에서 함께 지낸 경험이 있던 위문엽만은 쉬이 믿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연준호와 성하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냥 지금…….”
“쉿, 위신이 서야지.”
서문경은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체하며 모산으로 향하는 기로에 섰다.
그곳엔 만금상단의 상인, 조윤과 정우백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소?”
“무림맹주의 서신을 받고 어제쯤 도착했습니다. 호광성이라 그런지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 왔지요.”
송우현, 우상벽과 안면이 있는 상인들.
그들은 진무신검의 전서구를 통해서 서문경을 만나러 온 상태였다.
속으로는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나 기상천외한 부탁을 해 왔기에 이번에도 만금상단의 인력을 총동원해야 할 상황을 만들 것 같았다.
그러나 서문경의 용건은 매우 뜻밖이었다.
“도와주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만금상단에 돈 많잖소. 그걸로 마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고, 우리가 모산에 도착하기 전에 하루 정도 쉬고 갈 천막과 음식을 준비해 주시오.”
“……!”
조윤은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서문경이 수그리는 모습을 보았고, 민초를 위해서 만금상단의 돈을 투자하란 소리가 신선했다.
옆에 있던 정우백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하, 하지만 전자는 상단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거절하겠다면 서문세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고, 지금까지 받은 지원을 나중에 갚겠다고 하시오.”
서문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조윤과 정우백의 표정이 무너지는 듯했다.
앞으로 이어갈 인연을 이렇게 정리당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는 고금제일고수라고 불리는 서문경이 아닌가!
만일 이번 모산의 전쟁이 승리로 돌아가면 서문세가는 강호제일군문이 되고도 남는다.
셈을 마친 조윤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제 사재(私財)를 털어서라도 돕겠습니다. 만금상단의 재산에 손을 대는 건 상단주님의 허락이 필요하니 이해해 주십시오.”
“과연 조 선생이군.”
서문경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서 빙긋 웃었다.
그 행동만으로 조윤은 서문세가의 우방인 것을 넌지시 말해 준 셈이라, 정우백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모산 근처에 설치할 천막과 음식은 제가 준비하지요.”
“정말인가?”
“예, 제가 섬서성의 상인이라서 금방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정우백이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걸 본 조윤의 눈초리가 엷어지는 순간에 서문경은 두 팔을 벌렸다.
“조 선생과 정 선생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만금상단의 미래가 앞으로 창창할 것 같소.”
“아닙니다. 민초가 이토록 어려워하는 혼란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지요.”
조윤은 서문경에게 점수를 얻기 위해 아첨을 떨었다.
정우백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에 관해서 털어놓았다.
“그렇군.”
서문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좀 추하게 보일지라도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남천웅은 주백천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네가 파락호처럼 구는 건 참으로 자연스럽게 보이는구나. 군인이 아니었다면 사파에서 어깨 좀 으쓱거렸겠어.]
[선배…….]
서문경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서 부들거렸다.
그 화를 두 상인에게 털었다.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지금 움직여 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모산 근처에서 뵙겠습니다!”
조윤과 정우백이 서둘러 만금상단으로 향했다.
누가 더 빨리 만금상단주 조원양과 만날지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서문경은 그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제 걱정되던 것도 해결이 되었으니, 모산으로 출발할 차례구나.”
그 말에 위문엽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허…… 근데 너는.”
“그만하십쇼.”
“흠.”
서문경은 십대고수를 비롯한 구파일방, 오대세가, 무림맹의 정예와 함께 출발했다.
* * *
어딜 가나 시선이 모였고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산길을 타고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먹을거리를 달라고 적선을 구하는 화전민이 적지 않았다.
마교가 만든 참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지랑이를 보면 더더욱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대부분 강인한 정신을 지녔기에 인내했으나, 한둘은 심마에 빠져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언제 나타날까?”
마교에 속한 여러 사특한 마인.
그들이 어디에선가 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특히 칠성교는 가면을 통해서 신분을 숨기거나, 술법을 통해 무인을 자기 수족으로 부릴 수 있었기에 더더욱 두려웠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백이 있는데…….”
“그쪽도 그러오?”
“설마 가다가 만나는 건 아니겠지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모산으로 향하는 백 남짓의 무인들.
마교와 곧 싸울 거란 흥분과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들러붙었으나 후자는 차츰 사라져 갔다.
공통의 적이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공유할 수 있는 정서가 있었다. 칠성교와 천마신교를 막아야 한다는 대의와 협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림과 관은 불가침이라는 불변의 법식도 이번에 서로 파하기로 하였으니…….”
“황실도 이번 일을 절대 좌시하지 않는다는 거요. 가다가 만날지도 모르지.”
동맹이 많았다.
갖가지 악연으로 서로를 적대하던 무인들이 ‘멸마척사’라는 기치 하나로 모였다.
그 깃발을 쥔 서문경은 천의를 이은 무인이며 고금제일인이다.
그 뒤를 따르는 무인의 마음이야 당연히 설렐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장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은 무림사에 남을 것이오.”
“흘흘…… 이름을 남기는 일 없이 조용히 스러질 몸뚱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오.”
젊은 혈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들은 사문의 아이들이 없기에 체통을 반쯤 벗었다. 타문인 서문경에게 성큼 다가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걸음이 느려지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무인들은 최소한 성강의 경지를 이룬 강자들.
잠을 최소화하면서 보신경을 펼쳤다.
최대한 빨리 모산 근처에 도착해서 터를 잡고 쉴 작정이었다.
분명 그러했을 텐데.
“발을 묶어라. 죽어서라도.”
가면을 쓴 흑의인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서문경이 청운을 휘두를 필요도 없는 실력이었다.
선두에 선 고수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시체가 쌓이고, 그것을 밟고 또다시 달려드는 마인이 있을 뿐이었다.
“……무식하군.”
제갈준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씌운 사람에게 검을 쥐여 주고 돌격시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궁금증이 생긴 무인 하나가 가면 아래를 들췄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이 사람은……!”
무인들에게 먹을거리를 구걸했던 화전민들.
정체를 확인한 무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분노를 불태웠다.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면을 씌워서…… 이딴 짓거리를 하다니!”
“다음부터는 죽이지 말고 묶어서 제압하지요.”
도가의 장로가 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삐쩍 마른 사람이라면 수백이 달려들어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날에 무너졌다.
“저, 저들은!”
무인들이 깜빡 놀라서 검을 쥐지조차 못했다.
화전민들이 죽고 나서 나타난 마인들은 바로 행방이 묘연했던 무인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화도 내고, 타일러도 보고, 묶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방법으로도 술법은 풀리지 않았다. 그만큼 가면에 새겨진 술식은 절대적이었다.
“……이미 시도를 해 봤지만, 별수 없어.”
서문경의 말에 무인들은 동문을 죽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일을 각오했다고 여겼지만, 직접 처하게 되니 쉽지가 않았다.
“크윽…….”
“무, 묶어서 관에다가 가둬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술법에 당한 때부터 저들의 생사여탈권은 월현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고통을 줄여 주는 것이 낫겠지.”
“…….”
촤악!
동문을 베는 고수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깎아 내려는 것이냐.’
서문경의 속내가 복잡해지던 그때.
“선배를 만나고 싶다는 도사가 있습니다.”
낯선 남자가 서문경을 찾아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