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3)
-강호가 하나로 뭉친다.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각 지역에서 호족(豪族) 노릇을 하던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뭉쳐서 한 집단과 싸우게 된다니.
심지어 황제마저도 서문경과 무림맹에게 접촉하여 도움을 준다는 말이 돌았다.
“천하가 바뀔 일이로다.”
지식인이 아니라 일개 소작농도 천하의 변화를 입에 담을 정도였다.
이에 많은 부류가 창궐했다.
“우리 교인은 강호를 떠나 새로운 대륙에서 안식을 찾을 것이오!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배를 만들 헌금이오!”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교 집단.
“지금이다! 모든 고수가 호광성에 모인 이때야말로 기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놈들이 새로운 흑도를 구축했다.
혼란은 그렇게 또다시 혼란을 낳았다.
어디서든 회색 연기가 피었고, 누군가가 골목길에서 허무하게 죽었다. 죽음이 무감각해지는 계절이었다.
추운 겨울이 사람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고 말았는가.
그 변화를 서문경은 보지 못했다.
다만 상단을 통해 들었을 뿐이었다.
“사람은 참으로 못났구나.”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토록 어렵고, 힘들고, 어려운 이때 강자는 약자를 갈취하지 못하여 안달이 났나.
어째서 이렇게 무애(無愛)할 수가 있나.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남천웅이 입술을 열었다.
“이럴 줄 알고 백의단(白衣團)이라는 것을 미리 만들어 두었네.”
“백의단?”
“사교와 싸우기 전에 이런 꼴이 날 것 같아서, 관과 함께 대비해두었지.”
서문세가를 통해 황실과 연이 닿았다고.
확실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저 사교와 싸우는 도중에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다 때려잡고 싶지만…….’
서문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서 수련장으로 나갔다.
그곳에 종남파와 해남파의 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든 교류회.
도문의 무학을 하나로 정립하여 우화하는 기로가 눈앞에 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남파의 장문인, 통천옹.
“뭐가 그리 표정이 심각하십니까?”
선배임을 알고서 부쩍 눈치를 보기 시작한 종남파의 목허도장.
그들의 얼굴에 큰 기대감이 있었다.
“도문의 근간에 그런 대의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허허.”
마물에게 대적하였던 고대의 무인들.
그들 중 도사들은 언젠가 다시 나타날 마물에게 대적하기 위해 하나로 정립할 수 있는 무류를 창안하였다는 서문경의 가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목허도장은 말이 안 된다며 부정했고, 통천옹은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다.
“다른 도문이야 그렇다 쳐도, 해남파는 바다 건너에 있는 섬에서 오랫동안 고여 있었는데…… 그 대의가 닿아있겠나?”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서문경도 통천옹의 의문에 긍정했다.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마교와 가장 먼 곳.
해남도에서 개파한 해남파마저도 하나의 도문 아래에 정립할 수 있다면 시야가 달라지리라.
가지가 무한하게 처져서, 하늘의 한 티끌마저 보이지 않는 거목.
그 아래에 펼쳐진 바다가 있다.
이에 서문경은 또 다른 답을 내었다.
“만일 도문의 무학이 하나의 뿌리 아래에 있다면 서로 교류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마교가 코앞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는 때에 무학을 꽁꽁 감추고 있어야겠냐는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도문끼리 서로 무학을 교류하여 힘을 기르라는 제안.
서문경의 말에 통천옹이 자기 수염을 매만졌다.
“그 가설이 맞는다면 강호의 도문이 같은 근간을 지니고 있기야 하겠지만,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요.”
“……그런가, 어려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통천옹이 끝말을 이었다.
“일단은 시도는 해보는 게 낫지 않겠나?”
“……뭣?”
목허도장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통천옹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사문의 무학을 반출하는 것은 중죄. 단전을 폐하여도 이상하지 않으나, 언제 마물과 싸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무론 정도는 논하여도 되지 않겠나?”
통천옹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목허도장을 향했다.
언제까지 강호의 상식에 얽매여 있을 것이냔 책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목허도장이 아니었다.
“나라고 속 좁게 굴고 싶은 건 아니오! 다만…… 당장 오늘 저녁이나 내일 출발할지도 모를 상황에 어찌 무론을 나눈단 말이오?”
“왜 못 나눈단 말입니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서문경이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예전에 무림맹에서 마주칠 때부터 알았습니다만, 왜이리 편협합니까? 내가 군문이라 이해를 못하는 겁니까?”
“아, 아니…….”
“우유부단하고 질투심 많은 건 알겠습니다.”
서문경이 흠을 잡자, 목허도장도 욱하여 말했다.
“그러는 자넨 너무 독선적…….”
“나도 압니다.”
목허도장의 말을 가볍게 끊은 서문경이 진지한 어조로 진의를 꺼냈다.
“서로 흠결 많은 사람인 건 누차 알지 않습니까. 나만 해도 곤륜파에서 운룡대팔식을 익히거나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혀서 썼습니다. 하지만 악한 곳에 쓰진 않았습니다.”
“…….”
목허도장은 잠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론을 공유한다는 것이 껄끄러워서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 일단은 무학을 전수하겠네.”
“좋습니다.”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휘돌렸다.
그 직후에 신공으로 빚어진 아지랑이가 주변에 무겁게 자리했다.
무림맹에 있는 무인이라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었다.
저도 모르게 목검을 꽉 쥔 목허도장이 공력을 운용했다.
“종남의 무학은…… 태을(太乙)부터 시작하여 큰 범주로 나아가네.”
“큰 범주라면?”
“직접 보시는 것이 빠르겠지.”
목허도장의 목검에 구궁의 신행이 자리했다.
* * *
서문경이 무학을 재정립하는 사이, 서문세가에서는 많은 군인이 여섯 무인의 행장을 챙겨 주고 있었다.
유화, 청겸, 성하민, 연준호, 청겸, 둔걸.
그들이 행장을 어깨에 짊어지는 모습을 서문휘가 부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이가 많다는 게 저리 부러울 줄이야! 하민 누나,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
성하민답지 않게 침묵했다.
이에 서문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에요? 갑자기 말씀이 사라지시고.”
“부러울 게 아니야.”
“네?”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는 거잖아.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성하민이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두려움.
그 감정은 함께 떠나는 다른 동기들도 다르지 않았다.
‘경이도 어려워하는 마인을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내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사문에 누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실감이 되질 않아. 앞으로 대체 어떻게 될까.’
그들의 생각에 서문휘의 말이 뒤섞였다.
경지에 올랐으되 아직 나이 어린 청년들이었기에 삶이 얼마나 귀한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
“…….”
서문세가가 잠시 침묵으로 물들던 그때였다.
“두려울 만하지. 누구라도 다르진 않을 거다.”
“……?!”
무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가주 서문이현.
그가 허리를 펴고서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근 눈아래가 검고 피곤하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그 모습이 서문휘에게는 사뭇 무섭게 다가왔다.
“가, 가주님…… 들어가셔서 쉬셔야…….”
“후배들이 보고 있는 자리다. 출정하는 자리에 내가 나타나지 않고 쉬고 있으면 누가 나를 따르겠느냐.”
서문이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서문휘의 걱정을 쳐냈다.
그저 걱정스럽고, 답답한 눈으로 제자들을 훑어보고는 성하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섭다고 말하였느냐?”
“……예.”
평소와는 다른 서문이현의 모습에 겁이 났지만, 성하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수가 되면 마인과 싸우고 싶다고 말했던 주제에, 이제 가려니까 무서워졌어요. 이상하지요?”
“이상하기는.”
서문이현은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성하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이어 눈을 지그시 감아, 여러 기억을 떠올리고 헤아렸다.
“네가 이곳에 있는 동안 대화를 여러 번 하였지만, 아직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었구나.”
“……?”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게 뭔데요?”
“네가 천무학관에 있을 적에 말이다. 마교가 공격해 왔다지?”
“예.”
“경이가 이렇게 말하더구나.”
서문이현은 가늘고, 숨이 가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교 때문에 고통받았던 아이가 있어서… 피붙이도 군인도 아니라지만, 우리와 차이를 두지 않고 돌봐 주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
“가문의 엄정한 규율을 무시하는 부탁이었지. 내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으냐?”
“어, 된다고 하셔서 여기 있을 수 있었겠죠.”
“안 된다고 하였다.”
서문이현은 서문경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화를 내시더구나. 언제 그렇게 편협해졌냐고, 태생이나 배운 무학이 다를지언정 우리와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아이가 아니냐고 말이다.”
“같은 과거라면…… 마교 말씀이에요?”
“그래.”
성하민이 인상을 찡그리자, 서문이현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서문세가에도 그런 역사가 있단다. 들어 보겠느냐?”
“예.”
그 말에 서문이현은 가까운 바위에 앉았다.
성하민을 비롯하여 주위에 모인 무인들을 향해 옛이야기를 해 주었다.
길진 않았다.
오래 하면 해가 질 테니, 최대한 줄였다.
그렇게 해도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성하민의 얼굴에 망설임이 없었다.
소가주 서문휘의 표정도 굳건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여섯 명의 청년이 극진한 예를 취하고는 서문세가에서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문이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서문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 * *
“드디어.”
청마는 완전해진 제단을 보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옆에 있던 다른 칠로두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대의를 완성하였다.”
제단의 끄트머리에서 새어 나오는 검붉은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는 조금씩 위로 피어올라, 하늘을 향했다.
사가가각…….
사슬이 조금씩 갉히는 소리가 모산 정상에 울렸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