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18화 (216/250)

제단 (1)

평범한 의복을 갖춘 남자가 불현듯 제자리에서 멈췄다.

마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크나큰 대로.

그 한가운데에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대자(大字)를 그린 채 누워 있었다.

그것도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

남자는 누워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경험해 본 듯,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걸음이었다.

“이봐.”

“…….”

“들리지 않나?”

인상을 한가득 찌푸린 게 무언가 실의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너였다면 놓치지 않았을까?”

“그게 무슨 말이냐?”

“모든 이가 천재라고 불리는 네놈이었다면, 개잡놈이 무슨 짓을 하든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었을까?”

분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사내가 오른팔로 땅을 내리쳤다.

꽈아앙!

주변에 작은 진동이 일어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렇게 화풀이한 사내가 왼손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이틀 동안…… 잠도 안 자고 싸워 댔는데 이기질 못했어. 비열한 새끼. 잡아서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다음에 하면 되지.”

“다음? 다음이라면 언제?”

“글쎄, 일단은 날 따라오면 되지 않을까?”

남자, 서문경이 히죽 웃으며 사내를 억지로 일으켰다.

이에 사내, 위문엽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비열한 새끼는 내가 직접 잡아 죽일 거야.”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그놈 말고도 죽일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

서문경은 무림맹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저곳에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건강을 회복한 제갈준과 폐관을 마친 진무신검.

태산검문의 무학을 한층 더 발전시킨 금모도왕까지.

이윽고 더 많은 무인이 찾아오리라.

마교와 싸우기 위해서…… 혹은 긴 악연을 끊기 위해서.

서문경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거기 가서는 다른 사람이랑 싸우지 마라.”

“버릇없이 구는 말의 절반 정도는 참아 보지.”

“……하하.”

서문경은 헛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걸어가면서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열흘 안에 합류할 천무학관의 동기들.

그 후배들도 크게 발전해야 할 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월현 같은 놈들과 이백 합 정도는 겨룰 수 있어야 해.’

연준호 같은 친우가 눈부신 발전을 이룬다고 한들, 마교와의 대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서문경은 눈을 꾹 감고는 진심으로 삼천존에게 부탁했다.

협의가 지지 않기를.

천하가 혼란과 어둠에 휩싸이지 않기를.

* * *

“커헉, 헉, 헉…….”

도주에 성공한 월현이 피거품을 뱉어 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위문엽과의 싸움.

위문엽은 생각보다 강하고,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정종의 가르침을 배웠을 제갈준보다는 투박하나 ‘강하다’는 점에서는 한 수 위에 있었다.

“그딴 게 무학이라고? 오걸과…… 다를 바 없는 괴물이다.”

진무신검이나 제갈준, 금모도왕.

그들 모두 강자였다.

청마가 아니라면 압도할 수 없고, 월현 자신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고수.

하지만 위문엽은 그들만큼 강하다고 상정하지 않았다.

그리 판단할 근거나 정보가 부족했고, 익힌 무학이 불안정했었으니까!

‘그만한 고수의 무학 체계가 달라진다는 건……. 필시 누군가 개입한 게 분명한데.’

설마 또 서문경인가?

월현이 사람 몸통만 한 돌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대고 있을 때였다.

“역작이라고 한들 나를 대신할 순 없었구나.”

흉악한 적안(赤眼) 한 쌍이 월현의 머리 위에 드러났다.

청마.

그의 분위기는 대계가 완성되어 갈수록 조금씩 더 흉흉해졌다. 칠로두 사이에서도 격의 차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월현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놈이 생각보다 강했어. 도가와 불가의 기운을 동시에 다루는데…… 거대한 와류 때문에 쉬이 대처할 수 없었고.”

“…….”

“천마께선 어디 계시지?”

“월현야.”

청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름이 공포심을 자극하여 월현이 잠시 대답하길 망설이는 동안, 그가 오른손을 가면에 가져갔다.

“왜 잡아 오지 못하였느냐?”

“처, 청마야.”

“슬프구나.”

월현은 귀를 의심했다.

마물을 되살리는 대계 말고는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던 청마가 저런 말을 입에 담다니?

‘다시 기회를 줄지도 몰라!’

월현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 순간, 청마가 얼굴에서 가면을 떼었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인지라 월현이 눈을 크게 떴다.

지독한 화상.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화상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표정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근육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어떻게 된 거지?’

“너를 만들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이란 것이 움직였다. 하지만 월현야, 모름지기 물건이라는 것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버려지기 마련인 것을 모르겠느냐?”

그는 슬프다는 감정을 모른다.

다만 입에 담았을 뿐이란 걸, 월현은 직감했다.

이미 뜻을 정했다는 사실마저도 말이다.

월현의 입가가 고집스럽게 비틀렸다.

“나의 뭘 만들었다는 거냐?”

“월현아. 비록 그자에게 졌지만, 네가 날 위해 쓰일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저, 정말이냐?”

월현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두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에 청마가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니.

“그럼, 물론이지.”

“어디로 가는 거지? 다시 위문엽을 노리면 되나?”

“하하, 월현야, 그건 나에게 맡기면 된단다.”

청마가 월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너는 이 대계의 마지막 돌무더기가 될 거란다. 앞으로 평생 잊지 않을 거야.”

꽈아악……!

어깨가 강하게 붙잡힌 채 몸이 아래로 기우는 감각.

월현은 전신으로 밀려 들어오는 오한과 공포를 느꼈다.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청마가 쌓고 있는 제단.

거기에 올릴 산 제물은 마인이어도 가능하단 것을…….

눈앞에 있는 청마가 마지막 제물로 자신을 낙점하였다는 것을 말이다.

“같은 칠로두로서 친하게 지낸 가치가 있었어. 참으로 고맙구나.”

청마가 월현의 눈을 가렸다.

* * *

서문경은 위문엽과 호광성으로 향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

서문경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들을 훑었다.

해진 옷차림, 오래 물을 마시지 못해 말라붙은 입술.

누가 봐도 난민처럼 보이는 행색이었으나 주위에 숨죽인 채 앉아 있는 기척이 산재했다.

그래서 곱게 말하려고 했다.

“이런 짓은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고수요?”

“적어도 이 주변에 앉아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몇인지는 알지.”

서문경이 슬쩍 허리에 묶은 검을 드러냈다.

무림에 관한 소양이 없어도 귀품(貴品)은 보는 순간 알기 마련이라.

불쌍한 표정을 짓던 아낙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보인 탐욕의 눈빛에 위문엽이 전음으로 투덜거렸다.

[굳이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나? 한번 싹 쓸어버리고 가지.]

서문경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들도 마교 때문에 여기까지 몰린 걸 텐데, 우리가 더 헤집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참나. 예전에는 이런 애들도 마구잡이로 패고 다녔다는 악명이 아깝네.]

[…….]

서문경은 저절로 아파지는 뒷머리를 매만지고는 아낙네를 비롯한 산적에게 경고했다.

“무슨 연유로 이러는 줄은 모르겠지만, 사람을 해친 적이 있다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귀의하는 건 어떻겠냐?”

“귀의? 군인이 되는 게 아니라?”

위문엽의 의문에 서문경은 간단히 답했다.

“나도 바빠. 절에 있는 중한테 떠넘기는 게 낫지.”

“……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서문경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솔직하게 답해라.”

“거짓말을 어떻게 가려내려고 그러시오?”

아낙네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문경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나에게 거짓말을 가려낼 능력을 주셨다. 천의를 이은 도사, 천무검왕 서문경이 바로 나다.”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는구만?]

위문엽의 말도 무시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하늘을 논하면 쉽게 믿는 편인지라, 그걸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에 아낙네가 입술을 악물며 물었다.

“내가 고향에서 듣기로, 마교 놈들도 자기 행동에 하늘의 뜻이 있다던데 어찌 당신을 믿겠습니까?”

아낙네의 말에 주변에서 더운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떠오른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서문경은 그들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깨달았으나, 그는 딱한 사연으로 누군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하늘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서 묻겠다. 여기서 사람을 덮치면서 단 한 명이라도 죽인 적 있느냐?”

“…….”

아낙네가 시선을 피했다. 더운 숨을 내뱉던 소리도 멈췄다.

그것으로 대답은 끝났다.

이들은 마교의 습격으로 터전을 잃은 채, 남을 해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다.

서문경은 마음에서 동정심을 지웠다.

“나와 위문엽마저 알아보지 못하는데, 식견 없이 이런 짓이 얼마나 더 가능할 줄 알았느냐?”

“그거야…….”

“이런 짓밖에 할 줄 모른다. 그렇게 대답하려거든 혀를 잘라라. 이게 쉬워서 했을 뿐 아니냐!”

당장 서문경의 길이 어떠하던가?

어려운 운명을 외면했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은 배불리 살았을 터였다.

‘물론 이들에게 그만큼 바랄 순 없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 살아가는 건 인간의 도의가 아니지 않나?

서문경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흘겨보았다.

“어딜 하나씩 꺾여서 가든, 곱게 따라오든 선택해라.”

“…….”

아낙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문경은 한 무리와 마주칠 때마다 십수 명씩 따라오게 시켰다.

마교가 만든 참상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을 좌시할 수도 없었다.

‘소악을 방치하여도 또 다른 대악이 되기 마련인데, 사람을 죽인 자들을 그대로 둘 순 없는 노릇이니.’

서문경은 자신이 믿는 대로 행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위문엽은 답답해했다.

“이런 짐을 왜 달고 다녀? 이러다가 청마가 나타나서 인질로 잡으면 어쩌려고?”

“그때는 그때 생각해야지.”

“염병할, 천존이 여기 계셨네.”

“말이 험하십니다.”

“……쩝.”

가끔 위문엽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하루에 두 번씩 그러면 가르침을 빙자해서 몇 번 패 주었다.

물론 위문엽의 발전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문경은 어느덧 백에 가까워진 ‘소악’을 대동한 채 무림맹 본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행렬이지?”

“맨 앞에 구천신검이랑 야차 아닌가?”

“허어…… 척 보기엔 마교도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 같은데?”

많은 말들이 오갔다.

개중에는 구천신검이 사람을 핍박하기 시작했단 추측도 있었으나, 그냥 무시했다.

하나하나 대꾸하기에 피곤한 세상이다.

그 세상에 마물을 부활시키려는 미친 마교가 둘이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서문경은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여유롭게 걸었다.

“……후우.”

기감은 늘 날카롭게, 마기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눈을 부라렸다.

그때마다 기척은 눈 녹듯 사라졌다.

[네가 지치길 기다리는 모양이다만, 그럴 일은 없겠구나.]

위문엽의 말에 서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먹은 영단 숫자가 몇인데요. 하물며 나를 안다면 어찌 마교 놈들이 덤비겠습니까?”

서문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가전무공의 완성.

그 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이번에야말로 긴 악연을 끊을 때다.’

가능하다면 모든 업을 홀로 끝내고 싶지만, 세상사가 만만치가 않다.

서문경은 주먹을 꽉 쥐고서 무림맹의 대문으로 걸어갔다.

신비한 무공사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