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1)
잠시 후.
연무장에 도착한 서문경은 복잡했던 마음을 지웠다.
생동감이 가득했다.
모두가 향상심을 가지고서 서문세가의 무학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서문세가라 적힌 현판에도 먼지 한 톨 없다.
“내가 오는 것도 잊을 만하구나.”
“형님!”
가장 먼저 서문경을 알아차린 사람은 역시나 혈육이었다.
“휘야, 그동안 잘 지냈더냐?”
“예, 물론이죠!”
서문휘가 마주 웃었다.
옛날이었다면 까르르 웃었을 것을, 이제 나이가 드니 제법 훤칠한 태가 났다.
서문경은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렸다.
“몸이 컸나?”
“잘 먹고 잘 수련했으니까요.”
“허…… 내 앞에서 자신감이 넘치네?”
바야흐로 삼 년 전.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처럼, 서문경이 슬쩍 서문휘의 정강이에 발끝을 대었다.
서문세가의 동공을 시험하기 위함.
한데 서문휘의 반응이 다소 의외였다.
“하하, 형님이 안 계신 동안 성취를 이뤘거든요.”
떠나기 전이었다면 기겁하면서 움직였을 녀석이 가볍게 웃어넘기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서야 아이가 장성했음을 깨달았다.
저것이 허세일지라도 옛 사조를 상대로 담대하게 넘기는 법을 깨달았다는 뜻이니까.
서문경은 서문휘의 성장이 기꺼워서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녀석!”
툭, 툭.
서문휘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손에 조금씩 공력을 실었다.
간단한 시험이었다.
‘강한 힘이 코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할까?’
그 궁금증이 불쾌함으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서문휘의 반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휘르륵!
서문휘의 어깨에 구겨져 있던 무복이 펴졌다.
고수라면 누구나 깨치는 화경(化境)!
그런데 기교를 부리는 솜씨가 대단했다.
자신의 공력을 옆으로, 아래로 흘리는데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오호라!”
흥이 난 서문경은 예전처럼 서문휘의 정강이를 향해 후려 깠다.
몸짓은 단순하지만, 수경의 묘리가 깃든 퇴법이다.
정신을 화경에 집중하고 있으면 반응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서문휘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도 이제 쉽게 당하지는 않지요!”
서문경이 천주의 심상에게 무학을 배우는 동안, 얼마나 깊은 고행을 한 것일까?
화경의 이치가 어깨에서 정강이로 이어졌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치르며 숙하게 익힌 움직임이었다.
‘서문세가에 저런 경험을 쌓게 해 줄 만한 고수가 있었던가……?’
서문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서문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딜 보시는 겁니까!”
“이젠 형한테 타박이라도 하려고?”
서문경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어디 한번 겨루어 보자. 네 성장을 눈앞에서 보는 맛이 있겠다.”
서문경은 손목을 탁 털었다.
내관혈이 찌르르 울리고, 공력을 머금은 소부혈을 무명지로 강하게 자극했다.
“해 볼 테냐?”
“기꺼이……!”
서문휘가 발을 가볍게 굴렀다.
발아래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삼보의 묘리가 보였다. 서문경에겐 추억의 순간이었다.
산골 아이가 서문세가의 무학을 펼치는 것을 목도한 때.
어두컴컴하던 미래가 개는 기분이었다.
되살아난 목숨을 버리려던 과오를 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오냐!”
서문휘의 선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쩌억!
주먹을 손바닥으로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서문휘가 허리를 뒤틀었다.
두 가지였다.
힘을 그대로 실어서 찰 것이냐, 혹은 가까이 다가와서 주(肘 : 팔꿈치)를 휘두를 것이냐.
서문경의 눈이 서문휘를 훑었다.
“옳거니.”
무엇을 하려는지 환히 보인다.
서문경은 서문휘가 펼치려던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쩌적, 쿵!
두 팔꿈치와 정강이가 연달아 부딪치고, 수구혈을 노리고 피하는 몸짓마저 똑같다.
서문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를 놀리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보고 싶어서다.”
“……!”
흥분으로 붉어졌던 얼굴이 차분히 변하는 것을 보았다.
영민한 후배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이다.
자신이 서문휘란 무인에게 기대하는 모습, 그것은.
“강적을 꺾기 위한 타개책이라.”
서문휘의 혼잣말에 서문경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무학을 닦고 경지가 올랐다고 한들, 마교의 주구에게 필적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들을 꺾기 위한 수가 필요하다.
서문경은 서문휘에게서 그 해답을 보고 싶었다.
“자, 슬슬 패를 꺼낼 때가 되었지?”
휘르륵!
서문경의 우장에서 강력한 일장이 너울쳤다.
서문휘의 내력으로는 쉽게 막을 수도, 흘릴 수도 없었다.
이것을 절묘하게 펼치어 내니.
“서문장법이다.”
쿠콰콰!
서문경이 펼친 공력이 곧 파도가 되어 서문휘를 덮쳤다.
이마저도 봐준 것이긴 했다.
서문세가의 무공으로 펼쳤으니 서문휘가 쉽게 파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니까.
‘그 경우에도 칭찬해 줄 생각이었는데.’
서문휘의 쌍장에 천주심경이 강하게 맥동했다.
검을 들지 않았음에도 펼치는 걸 보면, 권각술도 검법 못지않게 수련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좋은 대답은 아니다.
서문경의 낯빛이 굳어졌다.
“힘으로 꺾겠다는 게 네 대답이냐?”
가볍게 펼쳤던 것에 공력을 더했다.
조그마했던 서문장법의 크기가 팔뚝만큼 자랐다.
이래서야 서문휘가 전력을 끌어내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단, 서문경이 기억하는 과거라면 말이다.
콰지직!
양손에 깃든 뇌창(雷槍) 속으로 공력이 깃들었다.
서문경이 보기에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정작 합일의 순간이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수없이 반복한 장인의 솜씨.
‘너도 너만의 무리(武理)를 만들었구나.’
서문세가라는 거대한 나무에 자라난 가지들.
그 가지들 사이에 서문휘의 무학이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서문경은 서문휘를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서 외쳤다.
“아름다운 무학이긴 하나, 막아 내지 못하면 무용하다!”
“압니다.”
씨익 웃은 서문휘가 전신을 휘돌렸다.
언뜻 보면 회천각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있는 무학은 분명 서문세가의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서문검법을 저렇게……?’
검이 아니라 박투로 응용한 일수.
서문경은 서문휘가 서문장법을 쳐 내는 것을 보고 손을 털었다.
“네가 이렇게 장성하여 자기 답을 드러냈으니, 뭘 더 볼 필요가 없다.”
“벌써 끝내시는 건가요?”
“더 보여 줄 거라도 있느냐?”
“더 있죠. 있긴 한데…….”
서문휘의 시선이 뒤에 있는 두 동기에게 향했다.
양무연와 청겸.
두 녀석도 자기 무학을 보여 주고 싶다는 듯, 몸이 잔뜩 달은 듯했다.
“어디 한번 볼까?”
서문경은 환하게 웃었다.
* * *
세 시진 뒤.
해가 지고 나서야 서문경은 침소에 누울 수 있었다.
뛰어나게 성장한 삼인방을 제외하고도 무공을 봐 달라는 무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피식 웃었다.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까 혹여나 나태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보셨습니까, 정의맹의 숨겨진 저력을?”
“허, 허허…… 칠로두한테 수많은 무인이 죽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항상 장난으로, 그리고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깼던 서문패.
삼촌답지 않았다.
서문경은 그가 지금의 서문세가를 보고 평안을 찾았으면 했다.
그건 지금까지 함께한 주백경과 성하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사부 직책을 공자님께 넘겨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주 무사님보다 더 많은 사람을 가르치잖아.”
“녀석들……. 놀리는 거야?”
“놀리기는요. 요즘 공자님께서 계속 서문의 무공을 발전시키느라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요.”
주백경의 목소리에서 툴툴대는 게 느껴졌다.
하기야, 서문세가의 무인들은 더욱 발전한 무학을 배우는데 골머리를 앓으니까.
주백경도 여간 바쁜 것이 아닐 것이다.
서문경은 주백경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너는 어때?”
“발전한 거야 좋지만 군문에 입적한 장성들 중에 글줄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매일매일 가르치느라 고생이지요.”
길게 대답하는 주백경의 목소리에 적잖은 한숨이 담겼다.
“한 번에 잘 가르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군인이 되기 전에 글이나 배우고 오지’라고 꾸짖을 수도 없고 말이죠.”
“너도 고생이 많구나.”
“공자님이야말로 워낙 고생이죠. 구파일방의 최고 기재가 여기 모여 있지 않습니까? 공자님이 볼 전서구가 한둘이 아닐 텐데요.”
그 말에 서문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주백경이 지적한대로 동기들의 근황이나 발전을 묻는 전서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날에는 새장이 바글바글해서 방목해야 할 정도.
앞으로 한 달은 새가 우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져야 했다.
“동기들 사문의 장로님들을 불러서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를 거야.”
“쯧. 현 강호의 절대고수가 가르쳐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지.”
“삼촌!”
서문패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야. 술이나 마시자.”
“……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요.”
“학관에 있을 때 마셨다며. 내가 싫으냐?”
“하아…… 알겠습니다.”
서문경은 지는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백경과 성하민도 은근히 동했는지 조용히 술잔을 매만졌다.
술을 따르고, 마시고, 이따금 하늘을 보고.
소일거리 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다도를 즐기는 꼴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감정의 교류는 이어졌다.
서문경의 전신에 늘어난 상처와 서문패의 얼굴에 점점 깊어지는 주름.
서로를 살피며 속으로 생각을 갈무리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것이면 대답이 되었는데.
서문경이 침묵을 깨었다.
“……이제 몇 년이죠?”
“삼 년.”
“기네요.”
“나한텐 짧았어.”
“왜요?”
“서문세가의 역사를 새로이 써 내려가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무척 즐거웠으니까.”
그 말에 서문경이 잠시 침묵했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영약이나 구해 주시죠?”
“얼마나 더 세지려고 그래?”
“그야…… 아직 천마가 천하에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먹고 죽이는 게 빠르지!”
“그게 가능하면 제가 검을 놨지요.”
“허허, 허허허…… 이놈 봐라.”
너털웃음을 흘린 서문패가 술잔을 놓았다.
“거목이 자라난 자리에 호수가 생기고, 산짐승이 돌아다니며, 만물이 생장했으니 낡은 바위도 슬슬 자리를 지킬 때가 됐지.”
“그 바위도 나름의 향취가 있는 법인데요.”
“바로 떠나진 않을 거야. 지켜봐야지.”
서문패는 서문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네가 천마와 무사히 대적하는 것을.”
“……!”
“앞으로 네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 말에 주백경 또한 술을 한 번에 비웠다.
“저도 잊지 마십시오.”
“…….”
서문경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