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보 (4)
무림맹주.
남천웅은 불야성을 눈앞에 두고서 천으로 잘 닦은 검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쇳덩이에 비쳤다.
차갑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마교와 부딪칠 고수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후우.”
차가운 쇳덩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듯이.
남천웅은 지극한 호흡으로 길어 온 숨을 하단전 끝까지 밀어 넣고서, 다시 내뱉었다.
그러고서 천천히 장검을 들었다.
“…….”
칼날을 들어 올리면서 심상에 많은 표상(表象)을 떠올렸다.
‘이런다고 하여 본가가 나를…….’
오래된 망념을 베었다.
‘칠로두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내가…….’
두려움을 베고 또 베었다.
그렇게 정수리 위까지 들어 올렸을 때, 남천웅의 눈동자엔 망설임이 없었다.
“전원, 나를 따르라.”
그 말에 청풍대와 흑룡대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쿵!
미약한 진동이 강호 전체를 뒤흔드는 순간.
“잠시만 기다려 주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력이 무림맹에 합류했다.
* * *
“멀리서 마교가 지켜보고 있을 거다.”
서문경이 툭 던진 말에 동기들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무당산, 그리고 곳곳에도 마교도 몇몇이 숨어 있었어. 마교로 변모한 흑도가 어떤 결과를 낼지 궁금했겠지.”
“……과연.”
동기들이 턱수염을 매만졌다.
활동이 융성했던 마교가 왜 갑자기 조용해졌겠는가?
“우리가 서문세가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대명의 군대와 직접 맞서 싸우는 건 칠로두조차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크다.
서문경은 동기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칠로두가 온갖 사특한 마공을 쓴다고 하나, 천마에 비할 바는 아냐. 그놈은 괴력난신이 맞다.”
“이길 수 있을까?”
동기들의 심유한 눈이 서문경에게 향했다.
이번 문답을 통해 의지를 확고히 정하겠다는 눈빛이라.
서문경도 이번에는 쉬이 비웃지 않았다.
“나도 몰라.”
솔직한 답을 이어 갔다.
“승리를 확신할 순 없어. 그래도 한 가지는 약속할게. 허망하게 지진 않을 거야.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까.”
서문경이 원하는 것은 그저 홀로 싸우지 않는 것이지, 방패막이로 삼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서문경은 마교에게 수많은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면 떠나도 좋아. 물론 그 전에 움직이면…… 알지?”
마지막에는 농담을 덧붙여서 칠했다.
마교와 싸우러 가는 와중에 기를 꺾어 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한데 동기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려는 친구도 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떠나?”
“……?”
“우린 싸우려고 온 거야. 마교든, 칠로두든 얼마나 세든 상관없어.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미 바다에 배를 띄웠겠지.”
“……미안하다.”
그 말에 동기들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주고 싶은 것이 있어.”
“뭔데?”
“화룡신단이라는 거야.”
동기들이 가져온 것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나무 상자였다.
척 보아도 귀한 물품이었기에 서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영약을 줄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영약?”
서문경이 놀라서 되물었다.
구파일방의 영약!
단순히 무인이 취할 것이 아니라, 귀중히 보관하기만 해도 가치가 무궁무진하게 뛸 물품이었다.
그것을 선뜻 주겠다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인지라, 서문경은 가장 정보가 뛰어날 둔걸에게 물었다.
“화룡신단이 뭔데?”
“구파일방의 도문이 취급하는 영약 중에서 가장 뛰어나지. 백 년에 하나 만들어지면 다행이고.”
둔걸이 부럽다는 표정을 할 정도.
언제나 그랬지만, 동기들은 귀한 인재이자 후원자였다.
“자, 어서 열어 봐!”
동기들이 보채자 서문경은 함을 열었다.
그러자 적색 단약에서 지금까지 먹은 어떤 영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선향이 나와 후각을 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주에 기운이 스며들다니……?’
삼단전의 조화.
서문경이 구축한 천주에 단약의 기운이 엉겨 붙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니 서문경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눈동자가 커졌다.
“이게 화룡신단인가?”
“도문끼리 힘을 합해서 만든 영약이야. 원랜 오걸 선배들 중에 한 명에게 드리려고 했지만…… 진무신검께서 네가 희망이라고 하셨거든.”
“오…….”
서문경이 감탄하여 화룡신단에 손을 가져가는데, 동기들이 극구 말렸다.
“여기서 먹으면 안 돼!”
“아직 덜 만들어진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화룡신단을 제대로 단전에 안착시키려면 와룡경의 행공이 필요해.”
그 말에 서문경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글쎄……?”
서문경이 지금까지 익힌 무학들.
천주 이전에는 태청신공이 있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곤륜의 호흡이 있었다.
하물며 상단전의 수련까지 마친 자신에게 특별한 행공이 필요할까?
“대충 먹어도 될 것 같은데.”
“……!”
동기들이 제지하기도 전에 서문경이 화룡신단을 집어삼켰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삼단전과 일천세맥에 강한 열기가 몰아쳤다.
그제야 서문경은 와룡경의 행공이 필요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열기를 가라앉힐 방법이 와룡경에 있었겠구나.’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삼단전이 타 버려 폐인처럼 지냈을 터.
하지만 서문경은 달랐다.
강철의 기둥과 같은 천주에 아무리 강한 열기를 가한다고 한들, 뜨겁게 달구는 정도에 그쳤다.
콰아아아…….
그와 동시에 서문경의 전신에서 회색 연기가 치솟았다.
산불에 폭우가 내리면 수증기가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
그것을 모르는 동기들로선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왜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대로 서문경이 죽어 버린다면 그 원망을 어찌 감당하랴!
동기들은 서문경을 억지로 잡아 앉히고선 등에 두 손을 댔다.
과거 이름 없는 고수가 남긴 절세의 신공, 와룡경.
그 행공을 따라서 화룡신단의 화기를 가라앉히고 조화를 이룰 생각이었건만.
“……!”
와룡경으로 축기한 내공이 서문경의 삼단전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동기들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동기들은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서문경의 삼단전이 자신의 공력을 잡아당기는데, 그 힘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일공자님!”
이변을 알아차린 서문세가의 무관 몇몇이 서둘러 다가왔다.
이에 동기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오지 마라.
그 뜻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무관들이 뒤로 물러나는데, 개중에 기감이 뛰어난 자가 돋아난 닭살을 매만졌다.
“처음에는 흡성대법 같은 사특한 술수인 줄 알았더니만…….”
물을 나무가 빨아들이듯(水生木).
서문경이 화룡신단의 화기와 동기들의 공력을 조화롭게 조율하는 것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천주가 화기와 수기를 자연스럽게 조율하고 있었다.
장엄한 광경에 누군가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수생목, 목생화(木生火)라!”
서문경의 하단전이 빨아들인 와룡경의 공력이 기해혈과 거궐혈을 거쳐 상단전으로 향하니.
서문경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회색 연기가 백회혈을 통해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점차 고리를 이루기 시작하여…….
“오기조원!”
연준호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목소리에 적잖은 질시와 감동이 숨겨져 있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전설로 치부되던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질 줄이야!
이 충격은 주위에 있던 서문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일공자께선 어떤 경지에 오르신 건가……!”
와룡경이 아니면 먹으면 즉사라고 여겨지던 화룡신단을 먹고도 멀쩡한 데다, 동기들의 공력까지 자기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화룡신단을 취하기 전부터 고등한 경지에 있었다는 뜻!
많은 무인이 동경과 질투를 표하는 와중에도 서문경의 삼단전은 끊임없이 순행하고 있었다.
‘차갑고, 뜨겁다.’
수생목, 목생화.
오행의 이치가 천주를 세차게 두들겼다.
대장간에서 더욱 단단한 철을 만들기 위해서 연단하듯, 천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쿠르르…….
서문경의 임독양맥이 계속해서 물을 머금고, 불을 틔웠다.
조금이라도 치우치면 와르르 무너질 균형이었으나 천주심경이 조화롭게 했다.
‘이 모두가 두 번째 일생이 안겨준 행복이야.’
신비한 무공사전이 준 두 번째 기회.
오장육부가 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화기 속에서도 서문경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주로 무한한 만상(萬象)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화기를 일천세맥에 걸쳐서 퍼뜨리고, 수기로 천주의 뿌리를 강건하게 만들며…… 태청신공으로써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각기 다른 세 기운을 다루는 일.
평범한 무인이라면 진즉 주화입마에 빠졌거나 임독양맥이 무너져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서문경은 달랐다.
경파와 수경.
바깥에서 찾아온 외력(外力)에 두 무학이 힘을 합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혹은…… 합쳐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설마 과거 마교와 싸운 도사들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까마득하게 먼 후대에 다시 나타난 사교와 마물.
그들과 맞서 싸울 무공을 남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서문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순행을 계속했다.
콰르르르……!
보리 줄기처럼 가늘던 일천세맥에 활력이 돋으니 천주 또한 더욱 무겁고 깊게 자리를 잡았다.
말 그대로 자강(自彊).
서문경이 화룡신단의 기운을 완전히 흡수할 때쯤.
“허어…….”
동기들이 감았던 눈을 반개하고 서문경의 등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아…….”
동기들은 재차 한숨을 내쉬고서 서문경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다다를 수 없는 봉우리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면 어떠한 마음이 들까?
자기는 그 마음을 안다고 여겼다.
강호십대고수 몇몇을 만나 보고는 자긴 승복할 수 있는 그릇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러리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동기들의 눈동자에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지금이야 해가 밝아 보이지 않겠지만, 저 너머에는 별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서문경은 그곳에 있었다.
무슨 부활이냐며, 무슨 천의냐며 비웃는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가리고 있었다.
초고수를 넘어선 경지.
그곳에서 찬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의 내력을 체감해 본 동기들로선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럽구나, 부러워. 내 그릇은 이토록 좁았구나.”
진정한 강자.
서문경의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니, 눈이 부셔서 감히 뜰 수 없었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