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03화 (201/250)

진일보 (3)

조급함.

두려움.

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당당히 맞설 때도 있었지만, 몸을 피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일이 더 잦았다.

무림의 호사가가 듣는다면 비웃거나 조롱하겠지.

하지만 그 과정이 지금의 서문경을 만들었다.

천마와 싸우기 위해서. 전생에서 얻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서문경의 목소리에 여섯 무인이 눈을 빛냈다.

천무학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자기 발로 나갔다.

언제든 잊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연에 불과했을 터였다.

그러나 동기들은 서문경을 기억했다.

“뭘 그리 쑥스러운 얘길 하고 그래?”

청겸이 빙긋 웃었다.

예전부터 그랬듯,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으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동안 은둔하여 곤륜파의 무공을 갈고 닦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뚜렷한 태양혈과 곧추 세운 지실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은은히 풍긴다.

곤륜산의 운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웅장함이 그의 기백에 배어 있었다.

서문경은 철부지 같았던 청겸이 안 본 사이에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건 다른 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멀리서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맞아. 본론부터 들어가자고.”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

구파일방에선 아직도 삼대제자일 나이에 양무연과 둔걸이 닿은 경지는 결코 낮지 않다.

나이에 비해 눈빛이 침착하고 행동거지가 절도 있었다.

‘마교가 성숙시킨 거겠지.’

서문경은 쓰게 웃었다.

이립까지 마교와 싸우다 죽은 그에게 있어 동기들은 아직도 아이였다.

무인보다는 사문의 어른들에게 어리광을 피울 나이.

무공을 끊임없이 궁리하기보다 주색에 관심이 많은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마교의 존재가 일찍 철들게 했다.

“화산파는…… 괜찮아?”

유화가 연준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과거 칠로두의 일인, 백야흔에게 사문이 초토화되지 않았던가.

그 피해는 여전히 거대한 상흔으로 남아 있다.

화산파의 흔적은커녕 깎아 지르는 길조차 평탄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연준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매화나무를 심기 좋아졌어.”

“……뭐?”

“홍수가 일어났으면 물을 빼내야지, 망연자실할 순 없잖아.”

연준호의 얼굴은 담담했다.

“화산은 새로 태어날 거야. 내가, 그리고 남아있던 어르신들이 그리 만들 거니까.”

“…….”

저 말에 담긴 무게를, 다른 동기들은 차마 가늠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마교에 의해 사문이 무너진 충격과 재건해야 한다는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경험조차 없었다.

오로지 서문경만이 연준호의 말에 긍정했다.

“늦지 않았어.”

“……그래.”

연준호가 웃었다.

다른 이들은 화산파의 재건을 비웃었다.

마교가 이리 날뛰는데 어찌 다시 성세를 떨칠 수 있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서문경만은 달랐다.

진심으로 화산파의 재건을 믿고 도와줬다. 어렴풋이 깨달은 매향지경을 다듬고 완성하는 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 그리고 더 발전하기 위해서.

“힘을 합하자.”

“좋아.”

서문경은 씩 웃었다.

“다들 머릿속부터 비워.”

“……?”

저게 무슨 소린가?

원래 서문세가에서 무공을 배우던 유화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때 서문경에게 무공을 배웠던 양무연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네가 노스님처럼 말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아니야.”

“……?”

“어차피 지금 알고 있는 무공은 가치가 없어. 그러니까 지우라는 거야.”

“……!”

지극히 도발적인. 아니, 당장 살초를 펼쳐도 이상하지 않을 말.

은거하는 동안 사문의 무공을 궁구히 익힌 청겸이 가장 먼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너라도 하면 안 되는 말이 있어.”

“왜? 어차피 칠로두 앞에서 무용한 무공이라면, 잊는 것이 나을 텐데.”

서문경은 언제 호의를 보였냐는 듯 금세 정색했다.

쓸모없는 무공.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사문을 모욕하는 언사다.

청겸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았다.

쩌적…….

단신으로 마인을 무찌르는 협행이 허언이 아니었던 걸까?

기저에서 발하는 의념만으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다.

연무장의 벽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서문경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증명하지.”

서문경은 말했다.

“성하민을 제외한 너희 다섯 명 전부 덤벼도 나를 제압할 수 없을 테니까.”

“……후회하지 마라!”

까득.

어금니를 꽉 깨문 청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운해가 발끝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환(幻) 그리고 변(變).

지극히 높은 곳에서 펼쳐지는 운룡대팔식이 서문경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과연, 이것이 정종인가.

서문경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주둥이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산속에서 익힌 건 보신경뿐인가.”

뛰어난 보신경에 비해 부족한 무공.

서문경의 눈은 곧바로 틈을 알아차렸다.

운룡대팔식에 이어지는 운룡반천장은 언뜻 보면 자연스럽지만, 절대고수의 안력에선 이질적이었다.

스릉!

칼을 뽑아서 내는 소리.

검명만으로 청겸은 일장을 뻗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기운의 문제가 아니다. 서문경의 경지는 마음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수준에 있었다.

“심검? 아니, 이건……”

청기(靑氣)와 심의(深意).

지극히 깨끗하게 정련된 내공과 의지.

그것이 한데 모여서 의념으로 화했다.

청겸의 시선이 저절로 하늘로 향했다.

“네가 대팔식을……!”

사문을 그토록 폄하하고서 운룡대팔식을 펼치다니!

청겸은 움츠러들었던 몸을 펴고서 서문경을 좇았다.

하지만 서문경은 운룡대팔식이라는 틀 너머에 있었다.

콰앙!

군문의 보신경.

압(壓)의 묘리가 담긴 걸음이 청겸의 움직임을 억죄었다.

그 순간, 연준호가 움직였다.

“낙매성우!”

비무가 아닌 결투에도 초식명을 외치는가.

서문경은 그다워서 피식 웃었다. 명석한 판단은 아니었다.

이미 매화검법을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낙매성우의 검로를 역으로 되받아치려는 그때, 연준호의 미소가 맺혔다.

“전부 아는 것으로 오판할 줄 알았어.”

“……?!”

촤르르륵…….

낙매성우가 한순간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로 퍼졌다.

서문경이 아는 낙매성우가 아니다.

그렇다고 연준호가 거짓으로 속인 것도 아니었다.

매향.

연준호가 새로이 터득한 화산파의 경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틀이 없이, 자유로운 매화검법이라……!’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매화검법이란 화려하여 속을 알 수 없는 검법. 이른바 환의 극점에 있었다.

하지만 연준호는 화려한 것을 넘어섰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음공에 가까운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잎과 향.

둘 중 하나 중 어느 것이 더 자유롭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냄새일 테니까.

“그래도…… 그게 전부라면.”

통째로 부수면 그만이다.

서문경은 감탄을 접어 두고서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마치 철퇴를 휘두르는 듯한 검로였으나, 그 안에 담긴 기의 움직임은 현묘하기 그지없었다.

쩌저적!

낙매성우는 그대로 흩어졌다.

파훼된 여파에 연준호가 입가에 피를 머금었다.

그걸 본 다른 무인들이 움직였다.

“진심이라면……!”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양무연과 둔걸.

지금까지 서문세가와 연을 두지 않고 활동하던 동기가 병장기를 붙잡았다.

창과 봉.

검보다 긴 병장기로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언제까지고 운룡대팔식으로 허공에 있을 수 없으니 그 순간을 노리겠다는 수가 뻔히 보였다.

서문경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내가 여태껏 먹은 영약이 얼만지 알고.”

“……뭐?”

“기다리지 말고 따라와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서문경은 지상에 남은 동기들에게 검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무공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공을 통째로 깨부수는 칠로두의 마공이 어떤 것인지.”

무서움을 알아야 상대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다.

무인이라면 화를 낼 말이지만, 군인인 서문경에게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 * *

“교룡.”

“…….”

“언제까지 때를 기다릴 거야?”

흑향의 물음에 모산의 교룡은 말했다.

“절반이 죽을 때까지.”

“왜 그렇게 기다리는데?”

“내가 움직이면 천하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

“예전부터 말하던 인과율이라는 그거?”

“…….”

교룡은 자세히 답하기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모산의 정상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자.

그는 백야흔과 비슷하면서도, 차원이 다른 수위에 있었다.

수많은 마공을 연단하여 인간의 틀을 깬 칠로두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흑향은 배시시 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칠로두에 있는지도 몰랐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의심하는 자나 발견한 자 모두 죽인 건 아니고?”

“……부정하진 않지.”

“강천도 잘 움직이고 있잖아. 슬슬 무거운 엉덩이를 드는 게 어때?”

“…….”

그 말에 교룡은 하늘을 보았다.

아직은 청명하다.

천상의 눈이 어둠에 잠겨서 제대로 천하를 보지 못할 때.

먹구름이 천하를 뒤덮을 지경이 되어서야…… 교룡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하늘, 혹은 괴력난신이 보낸 자가 완전히 자기 힘을 키웠을 때…… 그때가 내가 나설 때야.”

신비한 무공사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