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일보 (2)
천하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지지 않으려 스스로 빛을 내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걸과 천하십대고수가 그러했고, 천무학관의 기재가 필사적이었다.
특히 서문경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기재. 아니, 천재들.
강북에는 구름을 휘감은 용이 있어 곤륜의 기둥이 되었고, 한때 불타 스러질 뻔하였던 화산파를 다시 일으키는 옥검이 존재했다.
그들의 행보는 젊은 후기지수에게 귀감이 되었다.
강남에는 창 하나로 가문의 오랜 폐습을 부순 천재와, 나태함을 이겨 내고 걸출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협객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된 무인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허, 이러려고 강호로 나온 게 아닌데 말이지.”
청마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곡창지대부터 불태우려고 했던 계획도 무너지고, 도맥을 부수기 위한 시작점으로 섬서성을 택했으나…… 백야흔은 죽었다.
다른 칠로두는 무얼하고 지내는지 불분명하다.
특히 흑향 그년은, 늘 자기 멋대로 굴었다.
오로지 흥미 본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쯧.’
천마를 강림시킨다는 계획에 흑향은 늘 바쁜 일이 있다면서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당장 남궁세가 때도 마찬가지.
그녀가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남궁명의 반란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믿을 건 적마와 교룡, 월현 정도인가…….’
만인살 강천은 지금도 오걸과 십대고수를 조용히 제거하고 있었으니 논외.
셋만 제대로 힘을 합해도 강호에 은은히 떠도는 희망을 짓이길 수 있다.
천무검왕 서문경.
처음에는 어린놈이라고 은연중에 무시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생사대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이제는 가만히 둘 순 없겠어.”
싹을 자른다.
청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아래, 강호 전체가 그려진 지도에 수많은 점이 찍혀 있었다.
마교와 외적.
구파일방과 관가에 침투하고 있는 숫자가 대략 삼천.
무공을 익힌 숫자는 반의반도 되지 않았지만, 내부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하다.
청마는 히죽 웃었다.
혼란을 걷히기 위해 온갖 기지와 용기를 보였으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자…… 어찌할 테냐, 서문경. 네가 그토록 노력하여 만든 정의맹에 간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냉정하게 잘라 낼 수 있겠느냐?”
이제 막 발족한 정의맹.
힘의 균형과 정치가 팽팽하게 당겨진 공간에서 간자가 나온다고 한들 쉽사리 쳐 내기 어렵다.
모략이라고 여길 테니까.
서문세가가 천하를 쥐려고 하는 게 아니냔 의심을 사고도 남는다.
청마는 조용히 조소를 머금었다.
“세상사가 전부 깨끗하게 돌아가지 않는 법이란 걸 이번 기회에 깨닫게 해 주마.”
* * *
“잘라 내.”
서문이현은 단호했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어찌 세상사람 전부를 품어 갈 수 있겠는가?
애초에 정의맹을 꾸리기 위해 흑도와 사파와도 손을 잡았다.
그 순간부터 이 순간이 다가올 것임을 잘 알았다.
‘자기 손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손바닥을 뒤집을 놈들 따위, 처음부터 우방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선 서문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정의맹에 끌어들일 사파는 세 곳으로 한정하고 있었습니다.”
녹림, 수로채, 낭인.
그 외에는 규모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잡것들이다.
정의맹은 작은 집단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유지하기 위한, 그저 그런 것들.
서문이현은 잡티가 큰 그림을 망치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놈들에게 배정된 점 기지의 권한을 철회하고, 정의맹의 명부에서 박탈시켜라.”
“반발이 클 텐데요?”
“황명(皇命)으로 고해라.”
“아무리 전권을 위임 받으셨어도 너무 이름을 파시면……”
“책임질 일이 생긴다면 내가 그 자리에 서겠다.”
서문이현의 목소리에 단단한 힘이 담겼다.
그야말로 철인.
관인끼리 붙여진 이름이 무림에 퍼지게 되리라는 예감이 서문경의 머리를 스쳤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불과 열흘.
서문세가에서 출발한 수많은 전서구가 천하를 바꾸었으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가 정의맹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데! 이제 와서 토사구팽이라고?”
“용납할 수 없어! 감히…… 우리 흑사문을 우습게 봤다고? 내 체면을 이렇게 짓밟아?”
각지의 호족.
폐단을 일삼던 집단이 반발했다.
일찍이 정의맹에 이름을 올림으로서 선(善)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들이었다.
적어도 마교의 편에 서진 않았으니, 존경을 받는 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험해지면 언제든 그들의 품으로 향할 자들이기에.
서문이현은 철인의 면모를 보였다.
“황명이다. 반기를 드는 자, 집단, 가족, 오촌까지 전부 역도로 칭해라.”
저 한마디.
혼란에 혼란을 가중하는 말이었으나, 천자의 말이라는 것은 혼돈마저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가장 먼저 군문(軍門)이 나섰다.
홍가를 비롯한 명가에 속한 군문 전부가 고삐를 반대로 틀었다.
잠시 방벽이 허술해지긴 했으나, 북적과 남만을 비롯한 외적을 완벽히 막아 내던 창이 안쪽을 향했다는 뜻.
안락함에 취해 있던 호족이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이러고도…… 신뢰를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소?!”
“우리가 죽더라도 정의맹에 속한 모두가 눈을 뜨고 있소!”
호족들은 죽어가면서 서문세가를 저주하거나 천하에 단말마를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서문이현의 일처리는 냉혹했다.
“입을 막아라. 그들의 이마에 마(魔)를 찍어라.”
그들의 단말마는 세상 사람의 귀에 닿지 못하고 스러진다.
되레 마교의 일원이었다는 표상만 남고 죽었다.
때때로 간자였다는 증거가 나오긴 했으나, 대부분은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을, 서문이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명의 존속이라는 대의를 유지하는 데 온정을 품었다간 몸이 느려질 것이다.”
마교와 외적.
역사적으로 한족을 멸하기 위해 움직인 그들이 손을 합했다.
하물며 수백 년의 세월을 기하였으니, 어중간한 각오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냉혈한(冷血漢).
서문세가 내에서 가주를 두고 몇몇 사람이 쑥덕거렸다.
역사를 기록하는 문관이 특히 그러했다.
서문이현은 이를 알면서도 침묵했다.
누구도 문책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누가 봐도 악한에 가까운 처분이니까.’
협(俠)이 아니다. 선(善)도, 도리(道理)도 아니다.
오로지 대명을 방비하기 위한 길.
군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피를 흩뿌렸다. 그 길에 일말의 가책은 느낄지언정 후회하진 않는다.
서문이현의 머리에 하얀 새치가 생길 때쯤, 서문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뭐?”
“아버지가 든 등짐을 나누지 않으면, 어찌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서문이현은 아들의 손가락을 보았다.
건드리면 부러질 듯, 얇고 새하얗던 것이 언제 저렇게 굵어졌나 싶었다.
눈을 잠시 떼었다고.
깜짝할 사이에 자라난 아들이 무게를 나누자고 한다.
서문이현의 입술이 들썩였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극히 적은 그이기에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웠다.
‘너무나도 기쁘지만, 차마 함께할 수가 없으니…… 어찌 거절해야 좋을까.’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면 궁성은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책무라는 아주 작은 불티에 의지해, 흑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벽을 더듬거리면서 전진하는 하루하루.
오해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적과 아군을 오인하게 되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다.
베고 나서야 진실을 깨닫고, 술로 마음을 달랜다.
그 후회와 타인의 원망을 아들에게 나누자고?
서문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끼어들 생각 말고, 앞가림부터 먼저 해라.”
저 말에 틀림은 없었다.
서문경에게 달린 것은 균형이 아니라 파격.
존재만으로 승리의 균형추가 기울어있음을 과시해야 한다. 서문세가에서 보여준 무공을 천하에 증명하여, 마교의 세를 줄여야 한다는 과업이 있었다.
이에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북적과 남만을 한 번에 처리할 계책을요.”
“……!”
서문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북적과 남만, 왜구 중에서 둘만 치울 수 있다면 대명을 수호하는 어려움이 덜 테니까.
그 방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서문이현의 시선에 서문경은 대답했다.
“최근, 고수가 실종되는 일이 잦습니다. 당장 오걸와 십대고수만 하더라도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많지요.”
“……그래서?”
“제가 미끼가 되고자 합니다.”
쾅!
서문이현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절대로 아니 될 일. 눈이 저절로 부릅떠졌다.
“내가 허락할 것 같으냐!?”
“길어질수록 힘들어진다는 건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비축된 식량이 줄어들고, 환란이 길어지면 뚝심 있는 자도 변하고 맙니다.”
서문경은 전생에서 겪은 일을 진심으로 논했다.
물론, 서문이현에게는 과한 걱정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는 현명하고 강인한 자였으니까.
가장 믿을 만한 자의 배신마저도 머릿속에 둘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서문경의 말에 서문이현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들을 그리 두면, 내 체면은 완전히 시궁창이 되겠구나.”
“이미 정의맹을 세운 공신을 처분하는 폭군 아니십니까?”
“……하하.”
천자께서 들으면 노하실 말을, 저리 터무니없고 대책 없이.
서문이현은 껄껄 웃어 버렸다.
“네 목숨을 거는 일이다. 아차 하는 순간 칠로두에게 합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남 일처럼 구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두렵고, 몸을 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서문경은 진심으로 말했다.
전생의 실패에서 시작하여 몇 년.
필사적으로 구르며 무공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실이 눈앞에 있다. 실패하면 그대로 끝.
천마를 마주하지도 못하고 목이 달아난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실패를 다시 한번 반복하는 셈.
그것이 더 무섭고 두려웠기에, 피로 젖은 길에 스스로 발을 옮겼다.
“저에게 서문세가의 정예와 며칠의 시간을 주십시오.”
“며칠의 시간?”
“본가에 체류중인 유화와 하민이, 주변에 있는 친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가전무공을 다듬으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저라면 그들을 단시간에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대종사.
무예십팔반을 전부 진화시킨 서문경의 무학은 이미 전설에서나 언급되는 자들과 나란히 하고도 남았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