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01화 (199/250)

진일보 (1)

‘얼굴을 이제야 보네.’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인 건 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유화는 체면조차 잊은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든 찾아오라더니, 결국 자기 볼일이 더 중요하다 이거지.”

애초에 큰 기대를 품고 온 것이 잘못이었을까?

사저들이 말했듯, 그냥 빈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 서문경과 마주하지도 못했으니까.

유화의 시선이 손바닥으로 향했다.

“……쓰라려.”

겨울이었다.

물기 한 점 없는 건조한 날씨에 암벽을 오르고 의미 모를 동작을 반복했다. 전부 토대를 다지기 위함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매일 하늘이 누렇게 보였다.

체면이고 뭐고 대(大)자로 쓰러져서 숨을 헐떡여야만 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체력이 늘어나고 근육이 붙었다.

그때 서문패가 물었다.

“후기지수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고수가 되고 싶으냐?”

“그야 당연히…….”

“고수가 되려거든 이보다 더 힘든 수련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보다요?”

“물론이지.”

서문패가 연무장 바닥을 발끝으로 때렸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칼 한 자루가 그의 손에 잡혔다.

살기 가득한 칼의 울음소리.

뽑힌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실전이었다면 목을 베였다.

그 서늘한 예감에 유화가 목을 매만지고, 서문패가 입술을 달싹였다.

“경이었다면 막았을 거야.”

“……!”

“앞으로 싸울 적들은 경이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아. 지금 수준으로 네가 일선에 설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는 듯.

서문패가 조소를 머금었다.

전장에서 적을 향해 보이는 비웃음.

저 안에 담긴 업(業)과 살의가 깊다.

이제 겨우 천무학관을 졸업하고, 약관도 되지 못한 유화가 견딜 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녀 또한 사천당가에서 겪은 일이 있었기에.

“그럴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니까.”

유화의 눈빛에 독기가 담겼다.

사천당가에서 겪은 슬픈 일은 오로지 자신이 약해서 생긴 일.

서문경이나 서문패처럼 일기당천의 강함이 있었다면 활로가 생겼을 것이다. 평생 뒷전으로 여겼던 자강(自彊)의 의지가 활활 불타는 듯했다.

하지만 서문패는 가볍게 고갤 내저었다.

“그걸론 부족해.”

“……?”

“내일 경이가 폐관을 깨고 나올 것이다. 실제로 보는 게 좋겠지. 그 아이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 말을 끝으로 하루가 지나서, 오늘.

유화는 사열대 아래서 입김을 불었다.

봄이 가까워지는 겨울, 아직은 추운 계절에 수많은 군관이 어깨를 편 채 서문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문(一門) 전체가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어…….’

유화도 아미파의 일원이기에 잘 알았다.

일가, 일문 전체가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물다.

개파조사의 등선일에 모이는 것이 전부. 그마저도 거리가 너무 멀면 직인이 찍힌 편지로 참석을 대신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서문세가의 총력(總力). 남만과 북적을 상대하던 장군들까지도 사열대 아래서 자리를 지켰다.

‘경이가…… 문중에서 이토록 고귀한 사람이었구나.’

가주 서문이현일지라도 쉽사리 만들 수 없는 자리.

단 한 명, 서문경이 가전무공을 시연하는 것을 보기 위해 모두가 모였다.

만약 서문패가 유화의 신분을 보증하지 않았다면 오지도 못했을,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유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멀찍이,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저벅, 저벅.

걸음에서 느껴지는 일정한 파문(波紋).

한 사람의 기백이 아니라, 수백의 군기(軍旗)를 마주하는 것 같은 존재감.

복장은 새하얗고 깔끔했다. 하지만 얼핏 보았을 때 먼지구름에 몇 번이고 휩쓸린 노장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서문의 일공자 납시오!”

서문패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사열대 위에 나타난 그는 서문경의 등 뒤에서 호위하듯 섰다.

평소처럼 히죽 웃거나 서문경의 어깨를 두드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몹시 진지하게 신장(神將)처럼 서서는, 엄숙한 자세로 서문경에게 검을 건넸다.

“…….”

서문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신검처럼 받들었다.

뒤이어 하늘을 보고 외쳤다.

“서문은, 명(明)을 지킨다!”

아주 당연한, 한족의 천하를 지키겠다는 맹세.

그러나 지금은 농담이 되고 말았다. 황성에서 먼 곳일수록 당연한 약속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세상이 혼란하니 착복하지 않는 사람이 우스운 것이리라.

서문경은 그 혼란을 끊어 내기 위해 외쳤다.

“서문은, 의무를 지킨다!”

단 한 사람의 외침.

사열대 위에서 힘차게 외친 한마디가 사열대 아래의 장군들에게 퍼졌다.

“의무…….”

“그랬었지.”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누군가는 과거를 떠올렸다.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서문경에게 과거를 투사하는 것이다.

이제 막 군관에 몸을 투신했을 때의 젊음을 떠올린 것이다.

서문경은 꿇었던 무릎을 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검절우……!”

서문세가의 가전검법, 일 초식.

단단하고 날카로운 일검이 사열대에서 펼쳐진다.

곧고 재빠르기만 한 쾌검에 무엇인가, 특별함이 번뜩였다.

장군들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을 보았다.

“환, 환인가?”

“아니야. 마상에서 펼쳐도 이상하지 않을 직검이지.”

아지랑이와 같았다.

서문경이 펼치는 것은 전장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단순함에서 탈피했으나 벗어나지도 않았다.

아주 커다란 그릇에 새로이 담은 듯.

서문경의 검은 이전과 달랐다.

무림의 무공을 섞은 것이 아니라 일체화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검무가 끝나고.

“창(槍)!”

서문경의 외침에 서문패가 사열대 뒤쪽에 있던 철창을 건넸다.

장군들은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검법만 바꾼 것이 아니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지……”

검에 이어서 창.

어찌 보면 창법이 근본에 가까웠다.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창과 활이었으니까.

다시 서문경의 춤이 펼쳐졌다.

란, 나, 찰. 기본에 가까운 창법이었으나 단순하지 않았다.

“허어…….”

“굳어있던 생각이 풀려나가는 기분이야. 어찌 저럴 수 있지?”

장군들은 검법과 비슷한 충격에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동안 도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가전무공을 저리 뜯어고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뜯어고쳤다는 표현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화, 진화인가……”

병졸을 위한 무공.

셋이서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병법.

전장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한 단순함이, 이제는 마공과 무공을 상대하기 위한 웅대함으로 바뀌었다.

서문경은 숨을 훅 내뱉으며 창을 내려놓았다.

세 번째.

“봉(棒)!”

“……!”

장군들은 이전보다 더 큰 충격. 아니, 경악에 빠졌다.

검과 창은 애초에 서문세가의 근본에 있었다. 수집한 무공의 가짓수도 많으니, 바꿀 수 있는 재료가 많은 셈이다.

하지만 봉은 어떤가?

너무나도 단순하여 뜯어고칠 틈이 없다.

괜히 무림의 타구봉법이 강호제일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서문경은 그것을 동등한 수준으로 뜯어고쳤다고 주장하는 셈.

장군들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뜯어 본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병졸에게 나눠 줘선 안 될 테니까.

“개천(開天)!”

첫 초식의 이름부터 달라졌다.

서문경은 힘차게 외치고는 봉을 크게 휘둘렀다. 봉이 아니라 곤(棍). 짧은 곤봉을 휘두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저런.”

“길이가 너무 짧아.”

장군들의 시선은 정확했다.

봉을 저렇게 휘두르면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고, 거리가 짧아 창에 곧바로 찔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서문경은 달랐다.

꽈르릉!

사열대에 굉음이 울렸다.

한순간 낙뢰가 내리꽂힌 줄 알았으나, 서문경의 근력과 내력이 만들어 낸 일격이었다.

합기(合氣).

기예를 넘어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교가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포탄인가?”

“허허.”

장군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았다.

사열대의 반대편, 돌담 맨 윗줄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단순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어렵다고 투정을 부려야 할 때였군.”

“그러게 말일세.”

“……설마 십팔반 전부를 고친 건 아니겠지?”

어느 장군이 마지막으로 한 말에 전부가 침묵했다.

불가능하다.

서문세가가 시대에 따라 다른 하늘을 섬기면서 수백 년 충성하여 만든 세월을 어찌 약관도 되지 않은 청년이 뜯어고친단 말인가.

그러나 서문경은 봉법에서 끝나지 않았다.

무리한 운용에 손바닥이 따끔거릴지언정 멈추지 않는다.

“쌍수도.”

“오냐.”

서문패는 조카의 고생을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아니, 이 자리에 서기로 한 서문경의 의지를 믿었다.

‘경이는 우리에게 보여 줄 거야. 마교와 싸우고 이길 수 있는 무예의 고귀함을, 승리의 가능성을.’

불과 삼 년 전에는 문제아라고 여겼다.

갑자기 강호에 나가서 수습하기 어려운 사건사고를 터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서문패에게 있어 서문경은 가장 자랑스러운 조카이자, 군관이요, 무인이었다.

등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 서문경이라면.

마교와 외적이 손을 잡은 이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다.

“네 동기들…… 요즘 잘 살고 있는 모양이던데.”

“압니다.”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천무학관에서 마주한 동기들.

비록, 남궁명은 마교에게 홀리게 되었지만 다른 친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유화 또한 마찬가지.

아미파의 자존심을 접어 두고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것만으로 서문경에게 너무나도 기꺼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온 손님도 있으니, 보여 줘야지요.”

무공사전에 잠시나마 의지했던 자신과 다르게, 유화는 타고난 천재였다.

무예십팔반의 시연을 보고 나면 반드시 얻어 갈 터.

서문경은 숨을 크게 가다듬었다.

“서문은…… 쇠하지 않는다.”

이날.

서문세가는 가전무공의 비급 전체를 수정하고, 한층 더 진일보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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