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200화 (198/250)

무서고 (5)

장강은 하나지만, 수많은 수류(水流)로 갈라진다.

이름조차 없는 하류로, 혹은 지역 마다 다른 이름의 강으로.

무공 또한 마찬가지다.

무공으로 깨달음을 갈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단련하는 자가 있다.

그들의 무공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처음 만들어진 의도와 진의가 갈라지거나, 하나로 합해진다.

세상은 전자를 삼류, 후자를 상승 무공이라고 일컫으니.

‘상승 무공을 하나로 엮는 건 장강의 하류를 하나로 합치는 거나 마찬가지구나.’

서문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사나흘 동안 비급만 보느라 시야가 흐리고 혓바늘이 섰다.

아마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 눈앞이 핑 돌겠지.

그만큼 피곤이 쌓였지만, 발전은 있다.

서문경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 그때.

“목표하시는 바는 이루셨는지요?”

관리인이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장구한 물길을 하나로 묶는 일이 겨우 사나흘 만에 될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서문경은 달랐다.

“노인장께서 무학에 박식하다고 들었습니다. 서문세가 내에서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으음…… 공자님이 들으신 만큼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겸양이 과하십니다. 가전무공의 발전에 손을 더해 주셨다고 들었는데요.”

“허허.”

명망이 하늘을 찌르는 서문경의 거듭된 칭찬에 관리인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싹텄다.

도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는 걸까?

조심스럽게 물으려는 찰나에 서문경이 말했다.

“제가 정립한 검법의 이론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고 허점이나 빈자리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말과는 다르게 관리인은 마음 깊이 실망했다.

‘겨우 사나흘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그 시간 동안 대단한 무학 이론을 짜낼 리 없다.

달마도 불가능할 일이다.

여러 젊은이가 그러듯, 허무맹랑한 무학 이론을 들고 와서는 냉정한 평을 듣고 실망하거나 도리어 화를 낼 테니까.

‘하물며 일공자님은 명망이 드높으니…… 쓴소리를 듣고 좋아하실 리가 없지. 큰일 났다.’

어떻게 돌려서 말하면 좋을꼬!

전전긍긍하는 관리인의 속마음을, 서문경은 쉽지 않게 꿰뚫어보았다.

“그리 미덥지 않으신가 봅니다.”

“예에? 아닙니다. 당장 들어 보고 싶습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잖습니까. 사나흘 만에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을 게 뻔한데, 대단치 않은 걸 어떻게 돌려 말할지 고민하셨겠지요.”

‘마,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건가?’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말하셔도 인정할 테니까요.”

“하나…….”

“진심입니다.”

보통 젊은이가 저런 말을 하면 십중팔구는 거짓말이다.

약관 전후에 아니꼬운 소릴 들으면 울컥하는 게 정상이지, 가만히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일까?

그러나 서문경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일 없이 잠잠했다.

그 모습에 관리인의 세월이 가져다준 감이 작게 속삭였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구나.’

하기야, 약관도 전에 소년 영웅이라고 불린 몸이니까.

소문을 좀체 믿지 않는 관리인이지만, 세상에 쩌렁쩌렁한 위명까지 무시할 만큼 외골수는 아니었다.

“보여 주십시오. 공자님의 무학을.”

관리인은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때까지도 별 기대를 품지 않았다.

기껏해야 절대고수의 내력 자랑이겠지, 낙관했다.

‘일공자님이 창안한 무학이 엉터리라고 해도 무슨 문제겠나, 강대한 경지에 도달하신 것이 중요하지.’

“시작하겠습니다.”

서문경은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검이 없어도 형(形)과 의(意)를 뚜렷하게 나타낼 경지였으니까.

무겁고 둔탁한 철검이 오히려 방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펼치고자 하는 것을 상상했다.

심상(心象)이다. 지금 펼치려는 것은 무공사전에 기록된 검법의 총화(總和)이자 서문경이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이다.

‘편리에 취한 군신을 벤 검은, 그저 강하고 화려한 검이 아니었어.’

수십, 수백, 어쩌면 일천.

세지 못할 만큼 떠올리고 수없이 좌절했다.

어째서 그 일 초식을 기억하지 못할까, 떠올리지 못한다면 이정표를 잃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또렷하게 보인다. 가려는 길과 도리를.

“스으읍…….”

한 번의 호흡으로 전신을 가득 채운다.

천지 간의 호흡이다.

무서고의 둔탁하고 퀴퀴한 공기에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

관리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문경이 발하는 내력이 도가처럼 청아할 줄은 몰랐기에.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다.

서문경은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에 강한 존재감이 깃들었다.

별.

아니, 성운(星雲)이.

관리인의 시야에서 어른거린다.

검강은 별이 되고 검기는 구름처럼 휘돈다.

“대주천복마검……?”

관리인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서문경은 공동파의 상승 무공을 펼쳤다.

“아니오.”

서문경의 손목이 기교를 부린다.

언뜻 성운을 이루던 무리가 점점 떨어지며 너풀거렸다.

그래, 무수한 매화잎이 하늘에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앉듯이.

관리인은 실색한 얼굴로 외쳤다.

“매, 매화검법! 이십사수의 후반부를 어찌 공자께서……!”

“아니라오.”

매화는 다시 변화한다.

낙루(落淚)처럼 떨어지던 검기가 스스로 덩치를 키워 간다.

광대(廣大)하다.

천하를 짓누를 듯한 검법을, 관리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일공자님께서 멸문시킨 남궁세가의 절학, 창궁무애검법이잖습니까!”

서문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걸까?

저도 모르게 부아가 치민 관리인이 성을 내며 캐물었다.

“새로운 무학이 아니라, 공자님이 배운 상승 무공을 시연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아니오, 이제 볼 준비가 된 겁니다.”

“……!”

서문경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검을 아주 작게 비틀어, 광대한 기세를 흩뿌리던 검기가 태극을 이루고…… 태극은 다시 성운이 되어 천체를 침습한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뒤늦게 깨달은 관리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이, 이건 서문검법의 번검유회였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번검유회로 이루어진 거였어.”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눈이 현혹되면 중심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아, 아니…… 현혹될 수밖에 없잖습니까! 상승 무공이 연거푸 펼쳐지는 것처럼, 아니, 펼쳐지는데!”

관리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대단한 무학입니다. 어찌 하나에 정립시켰을지, 부족한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다른 구파일방의 장로가 보면…… 무림 공적으로 몰릴지도 모릅니다!”

“무림 공적?”

서문경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번 생에 무림과 가까워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품은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마교가 환난을 일으키는데 자기네 무공이 그리 존귀하다면 차라리 죽어야지요.”

“……공자님!”

관리인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걱정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방금 본 무학은 무림인이 인지할 수 있는 벽을 넘었다. 어쩌면…… 마교가 사라지고 나면 서문세가가 천하를 지배할 무력을 지닌 것과 진배없으니……!’

과연 황제가 가만히 놔둘까?

맘만 다르게 먹으면 자기 위에 군림할지도 모를 존재를?

관리인은 진심을 다해 조언했다.

“공자님. 저야 이 가문에 귀속된 몸이라지만…… 남들 앞에서는 절대 써서는 안 됩니다.”

“노인장께서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 압니다.”

“……아신다고요.”

“예. 마교의 환난이 끝나고 나면, 그 문제겠지요.”

서문경은 심상에서 마주한 군신을 떠올렸다.

그는 편리를 추구했다. 그래서 마교와의 싸움에서 상징밖에 남지 않은 황제를 축출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자신보다 더욱 편한 환경에서 싸웠을 것이다.

신비한 무공사전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보다 더욱 강했을 거고.

‘이제는 내가 시험 받을 때인가.’

군관의 의무.

명나라를 수호하는 것.

하지만 그 하늘이 서문경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나아가 죽음을 원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서문경은 쓰게 웃었다.

심상에서 군신에게 일갈한 것치고는 모양새가 빠졌지만.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잊지 않으면 해답은 있고, 등불을 켜 놓으면 사람이 모인다지요.”

“……나중에 생각하신다는 뜻입니까?”

“당장 마교와 손잡은 외적이 사방팔방에서 날뛰고, 사천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야수궁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지요.”

그러니까.

서문경은 쓴웃음을 얼굴에서 지웠다.

나중 일은 잠시 잊는다. 지금은 군관의 의무를 다할 때.

“이 무공을 펼칠 곳이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보든, 그것이 명나라의 사람이라면…… 구하는 것이 제 일이요, 직무이니까요.”

“공자님.”

“본가의 누구에게 물어도 똑같은 답이 나오리란 걸 노인장도 아시겠지요.”

“…….”

관리인은 잠시 침묵했다.

워낙 젊은 공자를 만나서 잊고 있었다.

‘서문패 같은 별종이 아니고서야, 이 가문 사람들은 다 이렇다는 것을…… 정말로. 정말로 말을 듣질 않는구나.’

편하게 살 수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손만 그림자에 뻗으면 일 년의 녹봉쯤이야 보름 만에 벌어들일 수 있다.

명나라의 관제가 깨끗한 편이라지만, 서문세가쯤 되면 그래도 된다.

군관의 정상에 있으면 황제여도 함부로 끊어 내질 못한다.

‘하지만 서문세가는 그러질 않지. 하긴, 그래서 이 관리인 자리에서 몇십 년 동안이나 있었던 건가.’

가문 내에서 하찮은 잡일 따위, 돈을 주고 파는 게 당연한 세태인데.

서문세가는 그러지 않아서 오래 일할 수 있었다.

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무공과 마찬가지로, 서문경이라는 인간을 뒤늦게 이해한 것이다.

“어리석었습니다.”

“아닙니다. 조언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언젠가 방책을 마련하든, 자리를 마련해서 허락을 받아야겠지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황제인가 혹은 무림인가.

관리인의 물음에 서문경은 간략히 대답했다.

“천하에게.”

그 말에 관리인의 마음이 크게 두근거렸다.

서문경은 군관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의무를 다할 청렴한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을 걷는 걸 주저하지도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거인을 몰라보다니, 내 눈이 옹이구멍이었구나.’

관리인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답했다.

“공자님의 무공을 정립하고 다듬는 데 제가 아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

대화조차 하지 못했던 청년에게 깊이 충성을 다짐했다.

신비한 무공사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