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99화 (197/250)

무서고 (4)

무서고의 늙은 관리인.

굽은 등과 오른 손목이 바깥쪽으로 비틀어져 있다.

‘무공서가 가득한 곳에 있어도 무쓸모한 신체라니.’

왜소하다 못해 애처로웠으나 노인의 눈동자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서문경은 황급히 시선을 거뒀지만, 그는 이미 의중을 짐작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 오시는 분들은 다들 놀라시곤 하지요. 이내 납득합니다. 지금 공자님처럼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 기왕이면 가족이 볼모로 잡혀있는 편이 낫지요. 암기해서 반출하는 경우가 없도록.”

관리인은 잔혹한 민낯을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흔히 노인이 그러하듯,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농담.

서문경이라고 벗어날 수 없었다.

가주 서문이현이 신임하는 일공자이니 더더욱.

“그 말이 정말이라면…….”

“농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으로 이보다 더 잘 먹고 사는 사람 못 봤습니다.”

“아버지가 그리 만든 게 아니라요?”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관리인도 순간 당황했다.

뒤이어 한 방 먹었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허허, 공자님의 입심이 대단히 맵습니다.”

“다들 그리 말하곤 하지요.”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수직에는 수직. 무공과 입심은 상통하는 편이 있었다.

“그보다, 찾는 무공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수십 년 동안 관리하면서 어디에 있는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예십팔반.”

“……예?”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을 구성하는 무공서와, 뿌리가 되었던 기초까지 전부 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관리인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 과하다. 추리고 추려도 족히 수십에서 백 권. 등이 굽은 노인에게 시키기엔 업무가 너무 과중했다.

“혹시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무릎을 꿇으시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로 그 비급들을 모두 보려고 왔습니다.”

“정말입니까? 아니, 그걸 전부 보시는데도 시간이 한참은 걸릴 겁니다.”

서문경의 재지와 오성이 뛰어나다는 말이야 밖에서 수없이 들려온다.

비급을 보고 이해하는 능력 또한 천재적이겠지.

하지만 수십, 백 권이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초식만 해도 수백에서 천.

그 움직임을 나눠서 일만.

인간의 암기 능력과 이해로 가능할까?

관리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가전무공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너무 효율이 떨어집니다. 전대 가주님께서도 무예십팔반의 완성을 바랐지만…… 포기하셨지요.”

“전 다릅니다.”

서문경은 관리인과 시선을 맞추고 크게 호흡했다.

“젊은이라면 흔히 하는 소리지만, 증명하기 위해 사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강호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나 이 노체(老體), 불가능한 것을 말리기 위해 관리인으로 있는 겁니다.”

관리인의 눈이 고수처럼 맑았다.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되, 수많은 비급을 접하며 학식을 쌓았다.

진의를 숨긴 행간을 해석하고 가주에게 보고하는 나날.

고수보다 뛰어난 지식을 지녔다고 자신한다.

절대고수일지라도 바다처럼 넓은 무학(武學)을 지니긴 못할 테니까.

다만, 이번 상대는 관리인이 경험하지 못한 남자였다.

“안내하십시오. 비급을 옮기는 건 도와드리겠습니다.”

“……허어.”

젊음이란, 관리인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예십팔반의 완성!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고금제일인이 되기에 충분한 업적이요, 무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남는다.

‘결국 일공자님도 도전하는구나.’

과연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게 될지.

관리인은 애석한 마음을 꾹 짓누르고서 앞장섰다.

* * *

세 시진 뒤.

서문경과 관리인은 비급으로 이루어진 산을 보고 감탄했다.

“오…….”

“오십 년을 넘게 일하면서 이렇게 많은 책을 꺼내 보긴 처음입니다.”

관리인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렸다.

언젠가 꺼낸 만큼 다시 정리해야 한다.

그 고단함을 알기에 앞일이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주가 신임하는 일공자에게 어찌 투정을 부릴까?

관리인은 핼쑥해진 안색으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문경은 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급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서문세가 이전.

한족을 수호하기 위한 군문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같은 시대를 살던 문파의 필사본까지 있다.

‘전진교의 비급도 일부 있다지?’

워낙 보안이 엄중하여 제대로 필사하지 못했지만,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에 기틀이 되고 남았으니.

실체가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다.

서문경은 관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보신경을 펼쳤다.

“진가태극권…… 전진교 검법…… 천둔검법 전반부…….”

비급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자니 실감하게 된다.

서문세가의 무서고에 존재하는 비급이란, 강호에 공개되면 혈겁이 일어나고도 남는다는 것을.

‘아버지가 여기서 몇 권을 비밀창고에 옮긴 것도 말이지.’

혹시 신비한 무공사전이 무서고에 있었던 건 아닐까?

서문경은 조심스럽게 책 한 권 한 권의 이름을 훑었다.

저 비급 중에 기물이 있다면 반드시 챙겨서 용법을 알아야 할 테니까.

“……없군.”

역시 신비한 무공사전 같은 기물이 동시에, 혹은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진 않았다.

당장 군신만 해도 말하지 않았나.

‘황제의 지위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면, 무공사전은 유일한 거야.’

서문경은 제자리에 풀썩 앉았다.

확신을 얻었으니 마음이 한결 개운했다.

무공사전은 유일하다.

그 사실이 위안을 주었다.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될 일.

“이제는 읽을 때인가.”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서문검법.

여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공방일체의 검법이다.

전장에서 쓰이는 것을 기조로 하여 단순하고 강맹하니.

‘무인들과 싸울 땐 임기응변으로 조금씩 다르게 펼쳐야 했으니까. 이 부분에서 첨삭이 필요해.’

수직과 수평.

제아무리 검법이 빠르고 기기묘묘하게 움직여도 두 직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문검법은 마상(馬上)에서 펼칠 수 있도록 더더욱 직선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무인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안다.

피부에 난 솜털을 스치는 바람만으로 알아차리고, 반응하려고 든다.

시시때때로 위기에 들지 않았나.

‘당장 삼 년 전 검치가 진지하게 검을 들었다면…… 죽었겠지.’

강함의 고하가 아니라, 검법의 깊이.

그 사실이 서문경을 채찍질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천무학관의 동기들에게 무공을 갈구하고 닦았다.

‘밖에서 공부한 것을, 안으로 들이밀고 줄여야 할 때야.’

번천광검결, 매화검법, 창궁무애검법, 대주천복마검, 태허검결.

무공사전으로 익힌 뛰어난 검법의 숫자만 해도 다섯이다.

천하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했다.

군신과의 싸움에서 한순간 합일했지만, 온전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어쩌다 펼치는 건 깨달음이 아니고, 운에 불과하니까.’

서문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군신과의 싸움.

칼 한 번에 목숨이 끊어지고, 의지를 시험한다.

군관과 편리하기 위해 황좌에 오른 무뢰배가 서로를 해하기 위한 생사결이었다.

그 마지막에.

‘내가 펼친 건 무엇이었을까. 그걸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무학을 정립하고 다듬어야 해.’

탑처럼 높게 쌓인 비급들.

서문세가의 가전무공을 일군 과거 기록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구닥다리라고 천시 받는 구시대 비급까지 무더기였다.

이 속에서 진주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관리인이 말했던 것처럼 시간 낭비가 될지.

오로지 서문경의 의지와 재지, 오성으로 판가름 날 일이었다.

“좋아. 시작하자.”

팔락.

손가락으로 첫 장을 넘겼다.

그곳에 서문검법의 첫 초식을 창안하고 정립하기 시작한 이름이 있었다.

-서문환.

고리 환(環)자였다.

이름조차 생소하여 언제 적 사람인지도 모를 사람이 친절하게 써둔 문구가 있었다.

-말 위든, 쓰러졌든, 한쪽 팔을 다쳤든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검법을 목표로 한다.

비검절우.

내리던 비마저 자르는 쾌검.

서문경도 숱하게 써온 초식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직선이고 흐름이 읽혔다.

‘그래서 백열이라는 파생 초식을 만들었지만…….’

무학자가 수없이 붙어서 만든 초식보다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서문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민이 깊어지니 저자가 남긴 몇몇 글귀에 시선이 갔다.

-단순할수록 펼치기에 쉬워지는 법. 병사에게는 개인의 무력이 아니라 단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무공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무인과 시비가 붙는다면, 군관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록이든 사색이든 남기기 위해 적는다.

‘……이런 게 있었나?’

어째서 이런 글귀는 서문검법 판본에 남아 있지 않은 걸까.

내심 짐작하기에, 전장에는 쓸모없는 사색이라서 기록하지 않은 듯했다.

애초에 저 글귀마저도 흘려 써서 목판으로 만들기 어려웠을 테고.

서문경은 빙긋 웃었다. 옛 사람의 고민이 제법 흥미로웠다.

-비검절우. 초식명은 화려하게 지었지만 무림인의 기기묘묘한 초식에 비해 단순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름으로 위장할 뿐이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단순함에 깊이를 더할까? 그건…….

팔락.

서문경이 다음장을 넘기자 비검절우의 그림이 있었다.

아주 평범한, 일초식의 기록.

‘이건 이미 봤던 건데.’

원본의 책장이 유실된 걸까?

의아하던 찰나,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몇 자 적혀 있었다.

-겹쳐서, 더욱 겹쳐서, 전진교 천둔검법처럼 위장하여. 진의를 숨기고 접근하는 쾌검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천둔검법?”

전반부라면 아까 쌓아 둔 비급 사이에 있지 않았나.

서문경은 곧바로 천둔검법 전반부를 펼쳤다.

“있다!”

서문환의 필기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책장이 있었다.

-비검절우를 이런 식으로 펼친다면 아주 달라지겠지.

천둔검법 전반부.

언뜻 보면 대주천복마검과 매화검법을 섞어 놓은 듯해도 높은 기량의 검사만이 펼칠 수 있는 검기 연격이 적혀 있었다.

비검절우를 섞는다면 어떨까?

서문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능해.”

심상 속, 서문경은 천둔검법처럼 수없이 겹치면서도 빠른 쾌검을 펼칠 수 있었다.

연습이 더 필요하겠지만, 다른 방향성을 그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서문경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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