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고 (3)
신념과 명예.
그들은 무인이 들으면 케케 묵었다고 혀를 찰 이유로 비키지 않았다.
절대고수라는 벽 앞에서 계란을 들고서.
‘귀찮은데, 참.’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문경은 피식 웃고서 밧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파앙 하는 소리가 허공에 퍼지고 일그러졌다.
가공할 만한 악력과 내공.
사내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끄응.”
군문에 뼈를 묻은 사내라도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의 신분 또한 고귀하다.
충성을 바치는 가문의 일공자이자 중진의 총애를 받는 자.
다 알면서도 막아서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고되다니.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치시지요.”
편곤을 든 사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절거렸지만, 서문경은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자네가 비키지.”
“……공자님이야 상관없겠지만, 저는 문책을 받아서 말입니다.”
“고작 문책 때문에 반병신이 되겠다?”
“명예가 있으니까요.”
“명예?”
“일공자님께서 강호에서 행했던 일이 그랬듯, 저 또한 법도와 질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사탕발린 소리군.”
서문경이 기수식을 취한다. 이제 말로 넘길 기회는 지나갔다는 뜻.
사내들은 저마다 쓴웃음을 지으며 방진을 취했다.
강대한 고수에게 시간을 끌기 위한 귀갑진(龜甲陳).
-중공과 좌익은 편수(鞭手). 장사가 음현(陰顯)을 취해라, 그때에 맞춰 변화한다.
평범한 귀갑진이 아닌, 음혈귀갑진(陰血龜甲陳).
위치를 고정시키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고, 틈을 노려서 정을 망치로 내리찍는다.
사내들은 시선으로 호흡을 맞추고 서문경에게 돌진했다.
휘르륵!
편곤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네 갈래로 갈라진 가죽띠가 작은 돌풍을 일으켜 눈을 희롱하면, 중앙에 자리한 도리깨가 정수리를 때려 부수는 죽음의 춤이다.
저벅, 서문경이 발을 앞으로 떼었다.
편곤이 휘둘러지는 춤사위로 들어가 기꺼이 검을 뽑았다.
“……!”
이를 예상하지 못한 사내의 눈이 커졌다가 차츰 잦아들었다.
어차피 반병신이 되어도 원망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공자님도 원망하지 않깁니다.”
편곤의 춤사위가 더욱 격해진다.
손목으로 기교를 부린 까닭이다.
손잡이로부터 도리깨가 달린 끄트머리까지, 특수한 쇠와 가죽으로 만든 부위가 엄청나게 휘어졌다.
팔뚝에 닿을 듯 위태하던 편곤이 순식간에 서문경을 향해 휘둘러졌다.
꽈아앙!
철종(鐵鍾)을 두드린 듯한 찰음이 울렸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윽, 하는 소리를 냈다.
‘손목이 퉁퉁 붓다니…….’
반동이 어찌나 거셌는지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사내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장사야!”
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문경의 등 뒤에서 장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찬 묵철의 견갑.
장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딪친 사람의 뼈와 살을 끊어 내기 위해 갈고리가 달려있었다.
“뭐 이런!”
군문의 기병(奇兵)이 이렇게 많았나?
서문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강호에서 온갖 것을 보았지만, 지금처럼 깜짝 놀란 건 처음이었다.
‘가문에 오래 있었지만, 저런 물건은 처음 보는데…….’
초견(初見) 이상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자신과 이상할 정도로 인연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서문경이 흥미로운 눈으로 보는 사이, 장사가 콧김을 내뱉었다.
“뭔 딴 생각이냐!”
지척까지 돌진한 장사가 상반신을 좌로 비틀었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서문경을 노리고, 편곤이 재차 휘둘러진다.
서문경이 숨을 훅 내뱉었다. 정심하기 그지없는 내력이 내관혈을 통해서 칼끝까지 치밀었다.
“검견불퇴.”
후배에게 가르침을 내리듯, 서문경은 초식명을 중얼거렸다.
검을 휘두르는데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박했다.
교차하는 두 직선을 잘라 내는 수평.
단 일 검으로 두 명의 초식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편곤과 장사를 제외하고도 경비조는 꽤 많았다.
“막아라!”
“공자가 아니라 외적으로 생각해!”
신념을 품은 자가 많았다.
서문경을 일공자가 아니라, 아예 마인으로 치부하는 놈도 있었다.
‘나중에 좌천당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무공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자가 많았다.
무서고를 지키는 자가 무려 열하고도 여섯.
대기조와 수면 중이던 군관까지 전부 뛰쳐나와서 서문경을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소란은 없었다.
“뭐 저런……!”
“쉿. 다물어.”
서문경은 그들을 일검에 두 명씩 제압하고는 재갈을 물렸다.
거기다 사지까지 결박하니, 사내들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차이가 이렇게 날 줄 몰랐다는 걸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귀가 있으면 소문을 들었을 텐데.”
“…….”
강호의 소문을 어찌 쉬이 믿느냔 시선이었다.
서문경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무서고에서 볼 일이 끝나면 주 무사한테 말해서 독려시켜야겠어.”
“……!”
사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특히 편곤을 든 사내가 두 무릎을 꿇었는데, 얼굴에서 그것만은 안 된다는 절규가 담겨있었다.
‘주 무사가 대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길래 그러지?’
서문경이 아는 주백경은 그렇게까지 험하지 않건만, 어째 사내들은 염라대왕의 이름이라도 들은 듯했다.
하지만 서문경은 알지 못했다.
주백경의 가르침은 자신에게 물들었다는 것을.
* * *
한 시진 뒤.
서문경이 떠난 자리에 주백경이 뒤늦게 도착했다.
“일공자님한테 처참하게 패했다고?”
“……예.”
“그분께서 강하신 거야 알지만, 맡은 직무를 지키지 못한 건 죄야.”
“…….”
강호의 오걸과 맞먹는다는 절대고수에게 어찌 이긴단 말인가!
사내들은 저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서문세가에서 주백경이란, 어떠한 변명도 용납하지 못하는 괴팍한 대사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나를 깨우러 오거나 가주님께 물어서 확인을 해봤어야지. 그랬다면 일공자님께서도 납득하고 기다렸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시간이 너무 새벽이라.”
“시간이 뭐? 그런 건 이유가 되질 못해.”
주백경은 단번에 사내의 대답을 쳐 내곤 인상을 한가득 썼다.
아직 젊은 인상인지라 서문패나 서문이현처럼 깊이는 없었으나, 조금 더 표독스럽게 보이는 효과는 있었다.
어차피 젊은 대사부가 된 것.
성격 좋은 바보보다는 잘 가르치는 쓰레기가 나을 테니까.
그 악명은 무서고를 지키는 고수 열여섯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이번엔 서문패 장군님의 실수가 맞았지만, 정말로 일공자님께서 강행하신다면 막을 만한 능력이 필요해. 이해하나?”
“……예.”
“하면 수련을 해야겠지.”
그 말에 사내들은 몸서리쳤다.
주백경이 말하는 수련이란, 현재 서문패이 가르치고 있는 여인과 비슷했다.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고 난 뒤 비무를 서너 시진이나 진행하는 지옥행.
저 둘 딴에는 그것보다 더욱 빠르게 실력이 늘어날 방법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겪는 사람은 골병이 든다.
“저어…… 저희를 대체할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편곤의 사내가 반기를 들어 봤지만, 주백경은 단호했다.
“내가 대신하지.”
“예?”
“나 혼자는 아니야. 손님을 가르치고 있는 서문패 장군과 함께 할 것이다. 이러면 됐나?”
“…….”
서문패와 주백경.
서문세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대고수가 무서고를 지킨다는데 어찌 안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미리 얘기하고 온 걸지도 모른다.
‘무서고에 일공자님이 있는 것 자체가 방비잖아.’
서문경.
서문세가에서야 일공자의 신분으로만 대해도, 강호에서는 오걸과 동급으로 불린다. 그가 무서고에 기거하는 한 침입하거나 불태우는 건 불가능했다.
자는 시간만 어찌저찌 방어하면 그만.
‘……치사하지 않나.’
주백경의 생각을 알아차린 사내가 은근슬쩍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금세 깔았다.
주백경이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가 서문경과 비교해서 넘치면 넘쳤지, 부족하지는 않았다.
서문경의 경지가 전보다 드높아져서였지만, 공부가 부족한 사내들은 제멋대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주백경 대사부가 더 강한 것 아닌가?’
‘괴팍하다곤 하지만, 강해질 방법을 가릴 건 아니지…….’
어차피 주백경에게 끌려갈 것이라면 생각이라도 바꿔 먹는 것이 낫다.
사내들은 예예거리고는 주백경을 따라서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서문패와 아미파에서 온 후기지수가 있었다.
“아직 한참 남았다! 얼른 움직이지 못해!”
“허억, 헉…….”
땀에 푹 젖은 채 움직이는 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웠으나, 사내들은 함부로 동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몇 시진 지나지 않아서 저렇게 될 테니까.
동질감을 느끼는 사이에 주백경이 말했다.
“자, 이제 우리도 시작하지.”
“…….”
사내들은 울상이 된 채 주백경의 등 뒤를 따랐다.
* * *
한편 무서고.
그곳에 도착한 서문경은 가장 먼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공기가 탁하군.”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 준다지만, 고서가 많은 공간은 필연적으로 탁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문이현의 비밀 창고도 그랬다.
구파일방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비급과 필사본은 족히 수십 년은 됐다. 무서고도 마찬가지로 수백 년은 족히 됐을 고서와 판본이 가득했다.
“어디 보자…….”
서문경은 군문의 비급이 가득한 곳으로 향했다.
오래 전에 외적에 의해 멸문한 군문과 북적의 무공까지,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어 보기가 편했다.
그렇게 이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둘 즈음.
“누구시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서문경을 찾아왔다.
신비한 무공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