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비한 무공사전-197화 (195/250)

무서고 (2)

“무서고를 개방해 달라고?”

서문이현이 서류를 내려놓곤 진의를 묻는 듯한 시선으로 서문패의 얼굴을 훑었다.

철인이 공무를 멈춘다.

그만큼 큰 호기심을 가졌거나, 의구심을 품었다는 뜻.

서문패는 태연한 척했다.

“큰 싸움이 코앞이니까 준비를 해야지요.”

제발 그냥 지나가라……!

질문 공세를 받기 싫었던 서문패는 속으로 요행을 바랐다.

하지만 보통 깐깐했으면 관인 사이에서 철인으로 불렸을까?

“전쟁 하루 전에도 체력 온존이랍시고 부관 옆에서 코를 졸며 잔 네가 준비를 논하느냐? 차라리 땔깜으로 쓰자고 하지 그러냐.”

서문이현의 미소가 오늘따라 얄미웠다.

아니, 사실 대놓고 자신을 놀리는 소리지.

서문패는 심통이 난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랑 지금이랑 같습니까? 이번엔 물러날 곳 없는 방어전이요, 한족의 명운이 달린 일인데 저여도 긴장하고 대비해야지요.”

“말이 청산유수다. 누가 준비해 줬느냐?”

“하이고. 나도 장군입니다. 평소에 쓰지 않을 뿐, 머리에 최소한의 학식은 담겨 있습니다.”

“그래?”

서문이현이 다시 서류를 잡았다.

이제야 열쇠를 넘겨주고 공무에 힘쓰려나, 하는 사이에 재차 물어왔다.

“조금 전, 경이가 깨어났다지?”

“예.”

“자네와 대화를 나눴다는 말도 들었어. 무슨 내용인진 모르지만.”

‘온종일 가주실에 있으면서 별걸 다 아는구만.’

서문이현이 서문패의 표정을 힐긋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 불만 가지지 말아. 아무리 직위가 중해도 서문세가의 가주잖나. 집안 돌아가는 꼴은 알고 있어야지.”

“예에.”

“그 아이의 부탁인가? 몇 주를 잠들고, 이제 막 일어나선 또 무서고에 틀어박히고 싶다고?”

“…….”

서문패는 입을 꾹 닫았다.

가주로서, 그리고 아비라면 당연히 거절할 일이니까.

아미파에서 온 후기지수의 일도 그렇다. 서문경에게 배우고 싶어서 찾아왔을 외인을 아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서문이현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동생, 삼촌으로서 어떻게 해 주고 싶은 거야?”

격의 없는 질문.

가주와 식솔이 아닌, 순수한 가족으로서.

서문패는 잠시 고민했다. 길진 않았다.

평소 자신이 그렇듯, 뱉은 말은 짧고 굵었다.

“걔 맘대로.”

“이래서 조카 좋아하는 삼촌은 안 된다니까. 가지고 싶다는 건 사주고, 하고 싶다는 건 도와주고…… 편들어 주는 걸 일처럼 여겨. 너무 보듬으면 버릇만 나빠지는데 말이야.”

서문이현이 서류를 다시 내려놓고는 똑바로 서문패를 보았다.

“벌인 일은 제대로 끝맺음 짓게 해야지. 안 그래?”

“아미파의 후기지수를 말하는 거라면, 경이를 직접 찾아온 게 아니라 배움을 구하러 온 거잖아.”

검봉 유화.

그녀의 재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나다.

‘흠을 채워 주면 머지않아 고수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은 새싹이 자라나길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싹을 짓밟고 불씨를 던질 종자가 각지에서 일어나고…… 지아비 잃은 여인의 통곡과 무인의 단말마가 메아리친다.

서문패는 많이 들어왔다.

전장에 나서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재능 있는 새싹을 죽음을 숱하게 보았기에,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그 아이가 원한다고 하던가?”

“아직 나한테 단 한 번도 이기질 못했거든.”

“서문의 대장군에게 이길 생각을 해? 자신감 넘치는 아이군.”

“분수에 넘치는 재능을 가지면 흔히 오만해지곤 하지. 여태 숨기고 살았다는 개소리나 하기에 몇 번 두드려 주고, 꽤 재밌어.”

“곡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던데.”

“그건 엄살이지. 아, 그것보다 형한테 비밀 창고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누가?”

“당연히 당신 아들이지.”

“경이 그놈이?”

“하하하 진짜 있나 보군. 답지 않게 목소리가 크잖아.”

서문패과의 대화에 서문이현이 작게 웃었다.

장정 세 사람이 뉘면 꽉 찰 공간.

서문세가의 가주실에서 두 남자가 삼 년 만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 * *

이튿날 새벽.

찬 공기가 솜털을 간질이는 시각에 서문경은 눈을 떴다.

“그새 왔다 가셨나.”

머리맡에 두어진 열쇠.

명색이 명군의 대장군이라는 사람이 자객처럼 몰래 두고 간 듯했다.

‘집이라고 너무 마음을 풀었나.’

만약 서문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는 사이에 무슨 해꼬지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

서문경은 깊게 반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한테 무서고 열쇠를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설마, 나한테 주는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하진 않으셨겠지?”

에이, 설마.

마음 속에서 일어난 불안을 애써 걷어치웠다.

“아무리 삼촌이어도 용처를 싹 다 말하진 않았을 거야.”

서문경은 말로 다시 되뇌고는 이부자리를 싹 치웠다.

탁.

종이에 선이 얇은 서체로 몇 자리를 슥슥 적었다.

-자리 비움

‘이건 성의가 없나.’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서문경 전속 하인과 성하민.

심상에 빠져있을 때 돌봐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서문경은 새 종이에 다시 적었다.

-가족처럼 잘 보살펴 줘서 고마우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자리를 비웁니다. 위급한 상황이 오면 주 무사나 가주님께 전해 주십시오.

흘려 쓰는 일 없이 꼼꼼하게.

명가의 일원답게 매끄럽게 써 낸 글자는 제법 멋스러웠다.

서문경은 혼자 만족하곤 밖으로 나갔다.

“무서고가…… 북쪽이었나.”

열쇠를 쥐고 가는데도 긴장감이 들었다.

병기고, 작전실 등 세간의 사람들이 서문세가에서 가장 엄중하리라고 생각하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한때 소가주였던 서문경은 알았다.

서문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곳.

가주가 아니면 다가가는 것만으로 공격 받을 수 있는 장소.

‘서문세가. 아니, 서문세가 이전부터 존재한 군문(軍門)과 멸문한 무가의 무공까지 전부 모아 둔 곳.’

무서고.

서문경은 기감으로 주변을 살폈다.

열두 시진, 하루 온종일 불규칙적으로 자리하며 접근을 감시하는 자가 다섯이나 있었다.

‘하나하나가 고수…… 땅에 울리는 무게가 묵직한 걸 보면 편곤도 있군.’

워낙 무겁고 관리가 어려워서 무림인은 쓰지 않는 무기.

하지만 그 파괴력과 합공에서 존재하는 이점 때문에 군문에서는 많은 이가 사용한다.

웬만한 검은 편곤의 강도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측면에서 날아드는 둔기의 무서움은 당해 본 자만 안다.

‘당하면 죽거나 병신이 되는 무기……. 어디 한번 간이나 볼까.’

서문경은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말했다.

“거기 있는 것 아네. 무서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겠나?”

“일공자님이라면 아시지 않습니까? 저흰 안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이 가득 선 목소리.

일공자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말을 걸기도 전에 급습했겠지.

생각보다 직무를 잘 따르고 있다.

서문경은 그 점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딨는지만 말해 준다면 될 텐데…… 그게 어려운가?”

“가주님의 직인이 들어간 증거나 징표가 필요합니다.”

“열쇠가 있다.”

“…….”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문경은 가만히 선 채 그들의 행동을 대강 추측했다.

‘전음 혹은 수화(手話)인가. 철두철미하군.’

상대가 누구여도 저런 식이라면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열쇠를 가져왔다는데 저럴 필요가 있을까?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는 찰나에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가주께서 직접 받았다는 증거는 없습니까?”

“……뭐?”

“실례되는 말인 건 알지만, 우린 일공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문세가의 일인(一人). 가주님의 명만을 따르지요.”

그 증거가 없는 한, 절대로 안내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서 막아서리라는 소명.

서문경은 그들에게서 어떠한 의지와 각오를 느꼈다.

“이럴 때 삼촌이 있었다면 일이 편했을 텐데……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하건 밀어붙였을 거 아냐.”

“가주님이라면 열쇠를 넘겨주실 때 증거를 주셨을 겁니다. 그걸 제시해 주십시오.”

“삼촌이 양도해 준 거야. 알잖아, 어떤 사람인지.”

“사소한 건 잊곤 하지만, 설마 그 증거까지 버리시진 않았을 겁니다.”

“…….”

설마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서문패가 아닐까?

서문경은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지체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물며, 동이 완전히 트면 성하민이나 유화가 쫓아올지도 모르고…….

‘온전히 제압할 수야 있지만, 그것도 가문의 보안을 박살 내는 일이라 기분이 나쁜데.’

쉽게 말을 들어주면 안 되려나.

하나의 기대를 가진 채 기다렸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서문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원망하지는 마. 삼촌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

단 일 초.

서문경의 팔이 나무 벽을 꿰뚫었다.

세차게 흩날리는 파편 뒤로 사람이 붙잡혔다.

붙잡힌 사람도, 주변에 있는 사람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훈련 받은대로.

붙잡힌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서문경을 껴안으려고 들었다.

풀지 못해서가 아니다.

요청에 불응한 서문경을 확실하게 제압하려는 유일한 수단.

“용서하십시오!”

팔뚝 근육이 옷을 찢고 튀어나온다.

소림사의 역근경처럼 외공을 철저하게 단련한 무인인 듯, 타고난 장사였다.

그 장사의 힘을 역으로. 서문경은 붙잡으려는 힘을 지렛대로 삼아서 뒤로 내던졌다.

“사량발천근……!”

누군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편곤이다. 그것도 웬만한 대들보만 한 굵기의 둔기가 서문경의 정수리를 노렸다.

그러나 힘이 온전히 실리지 않았다.

끝까지 휘두르는 게 아니라, 직전에 멈추려는 듯 손목이 경직되어 있다.

이건 실망이지.

서문경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제대로 할 수 없냐는 핀잔이 전신에서 살기와 함께 뻗쳤다.

그와 동시에 편곤을 든 사내가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

그것이 무슨 신호였을까?

사내들의 기세가 변했다.

내던져졌던 장사도 상체를 낮추고서 돌진할 채비를 마쳤다.

직선과 직선.

편곤과 돌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온전히 제압한다는 망설임을 버린 서문세가의 고수들.

서문경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어디 봐볼까, 마교와 싸우더라도 도움이 될 재목들인지!’

서문경은 곧바로 발을 뻗었다.

편곤을 든 사내의 정강이를 후려치고서 시야를 넓혔다.

화살과 장창.

정직하게 오지 않는다.

속도와 흐름이 달라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편곤을 든 사내가 다치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

서문경은 그 틈을 노렸다.

쩌억!

어깨로 사내를 밀치고 장사가 돌진하기 전에 운룡대팔식의 공식(空式)을 펼쳤다.

한순간 부옇게 떠오르는 몸 아래로 장사가 스쳐 지나갔다.

“……으악!”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한데 뭉쳐 쓸렸다.

서문경은 가볍게 착지하고서 물었다.

“더 할 텐가?”

“…….”

사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비킬 수가 없다.

그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난 뒤에야 서문경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어딨는지 알아. 내가 묻는 건, 진짜로 운신이 불가능할 때까지 얻어맞는가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건 문제군. 나 때문에 서문세가의 전력이 망가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

“좋아. 이제부턴 장담하지.”

서문경은 나무 벽을 묶고 있던 밧줄을 꽉 잡았다.

“다치지 않게, 잘 제압해 주지.”

사내들이 하려고 했던 행동 그대로, 자비를 베풀어 줄 작정이었다.

신비한 무공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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